윤고은 소설 <9회>
어느새 천변입니다. 나는 그 천변 끝자락에 있는 종로고시텔로 들어갑니다. 미로같이 좁은 골목들이 건물 안에 있다는 사실이 퍽 마음에 드는 곳이었죠. 다만 내가 머무는 5층에 ‘나이 찬 아들’들의 ‘분 냄새 없는 방’들이 나열되어 있다는 건 퍽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가방 속에는《천변풍경》이란 소설집이 들어 있지만 나는 그걸 읽고 싶지 않았습니다. 며칠째 미뤄두는 중이었죠. 청계천에서 빨래하던 아낙들의 이야기를 엿들으며 자랐던 내게 천변은 언젠가는 꼭 담아내고 싶은, 박제하고 싶은 풍경이었는데, 그걸 결국 나는 썼던 모양이지요. 그렇지만 책을 펼치기가 이상하게 두려워서, 나는 그걸 들고 단장과 대학노트를 챙기고 다시 천변으로 나왔습니다.
밤의 청계천은 조명을 밝히고, 잘 꾸며진 화단처럼 관상용으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통유리로 광합성을 하는 카페들이 줄을 이어 서 있고, 그 앞으로 순례 행렬처럼 관광객 무리가 지나가고, 시계 초침처럼 자주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리곤 했죠. 내가 말하고 싶었던 천변의 생활상은 이미 숨통이 막힌 저 청계천 아스팔트 속 어딘가에 묻혀 있는 모양이지만, 간혹, 한가한 물줄기는 그 부근을 건드리기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관광공사 건물 앞, 긴 의자에 앉아서 대학노트를 펼쳐 들었습니다. 그리고 몇 문장을 적어봤습니다. 한참 후에《천변풍경》을 펼치면 그 속 어딘가에는 지금 내가 적은 문장들이 모양새는 조금 달라도 뿌리는 같게, 적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거죠. 그러나 펼쳐 든《천변풍경》 속의 말들은 아무리 읽어도 생경하기만 합니다. 내친김에 가방 속에서《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도 꺼내 읽어봅니다만 어떤 것도 더 이상 내 살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타인의 살갗처럼 느껴져서, 그 문장들의 낯선 요철에 이리저리 숨을 뱉어보다가, 표정을 이리저리 부비대다가, 나는 그만 멈췄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관리과장 말대로, 나는 박태원이 아닌가 보다, 하고.
내가 적은 문장들 위로 한층 더 무거운 밤이 아스팔트처럼 덮입니다. 꼭 그때 그 밤처럼요. 저만치서 전차가 정해진 선로를 이탈하는 게 보였습니다. 전차라니요. 그렇지만 탈주하듯 달리는 전차 안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한 남자가 서 있는 게 분명히 보였습니다. 단장과 대학노트의 무게를 버겁게 느끼며 다소 피로한 듯, 아니, 실상은 외로운 듯 서 있는 한 남자. 저 남자는 나를 닮았습니다. 새벽 2시까지 두 발로, 때론 전차의 시커먼 바퀴들을 동원하여 산책을 지속할 소설가 구보. 그의 그림자가 전차에 함께 실려 저만치 사라지고 있습니다. 내가 달려가 저 전차에 올라탄다면, 어쩌면 나는 선로를 따라 몇 페이지를 거슬러 올라, 몇 십 년을 거슬러 올라 오래전의 이곳으로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이미 지나온 앞 페이지의 몇 문장이 또 재생되고야 맙니다.
‘구보는 종로 네거리에 아무런 사무도 갖지 않는다. 처음에 그가 아무렇게나 내놓았던 바른발이 공교롭게도 왼편으로 쏠렸기 때문에 지나지 않는다.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나 그의 앞을 가로질러 지난다. 구보는 그 사내와 마주칠 것 같은 착각을 느끼고, 위태롭게 걸음을 멈춘다.’
나는 어느 틈엔가 다시 이 문장 속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전차도, 구보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내 두 발만이 수맥 탐지기처럼 움직이는데, 발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그 우연의 각도를 좇으며, 걸어봅니다. 여전히 의심스러운 건 저 문장 속의 ‘공교롭게도’입니다. 모든 공교로움 속에는 이유가 있는바, 아무래도 왼편으로 쏠린 데는 어마어마한 우주의 원리 같은 게 있는 거지요.
발이 왼편으로 나를 인도한 그곳에는 또 다른 문장 하나가 커다랗게 걸려 있었습니다. 교보타워의 현수막이 그새 바뀌어 있더군요. 나는 거기 쓰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보았습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걸음을 멈추고, 그걸 소리 내어 읽고서야 나는 이 모든 혼란의 이유를 찾은 것 같았습니다. 가려웠던 거예요. 저건 이상의 문장이겠지요, 그러나 저 문장이 자꾸 눈과 귀에 들러붙어 마침내 내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요, 자꾸 내 것인데 도둑맞은 양 느껴지는 이유가 대체 뭘까요. 나는 또 어디론가 열린 골목을 찾아야 했어요. 활자 받침들이 낫처럼 내 발목을 끊어놓을까 봐 댕강댕강 달려나갔습니다. 늘 걷던 길을 그렇게 달리면서야 나는 구보의 산책로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새로운 이야기 하나로 다시 편입된 것 같았습니다. 혹시 그 밤, 나를 목격한 사람 없나요? 박태원에서 이상으로 급작스레 탈피하던 한 사람을 본 적은 없나요? 있다면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왜 그리된 건지 조금도 아는 척 말고, 그냥 잊어주시길.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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