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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16 19:03 수정 : 2013.08.20 13:59

[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① 연재를 시작하며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도
3당 합당 반대하는 학생들도
1990년엔 모두 ‘소비에트’였다
그러나 정작 소련은 쿠데타로
비참하고 허무한 종말을 맞았다

PC통신·전화카드·전동타자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스러지고
희망까지 떠나가 버린 시대
그것을 1990년대라고 부른다

1990년 이른 봄의 어느 날, 나는 동기 몇 명과 함께 불어터진 라면 냄새 그득한 선배의 자취방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원체 달변으로 유명했던 선배는 정연한 논리로 한창 진행중이던 울산 현대중공업 사태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지금 울산은 완전히 소비에트야.” ‘소비에트’. 1905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최초로 지구상에 등장한 노동자들의 자치 기구이자 이후 러시아라는 거대한 나라를 붉게 물들인 단어. 그 음산한 단어가 울산이라는 고향 근처의 도시와 결부됐을 때의 전율은 지금도 생생하다. 좀 뻥이 심하다 싶긴 했지만 선배의 말이 전혀 터무니없다고 여길 상황도 아니었다. 실제로 현대중공업에는 정권이 전력을 기울인 육해공의 공권력이 투입됐고 ‘노동자 계급’들은 골리앗 크레인 위에서 ‘외로운 늑대’(당시 노동자들이 스스로 일컫던 암호명)가 되어 결연히 싸웠으며 그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믿는 학생들은 현대그룹 사옥은 물론, 각처의 현대 관련 시설물, 하다못해 현대자동차 대리점까지도 화염병으로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로운 늑대, 그 시절의 울산은 소비에트

그해 5월 나는 방위병 입대를 했다. 4주간의 훈련 도중 첫 일요일이 왔다. 5월10일인가 그랬을 것이다. 불성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당시 몇 년간 교회에 나가지 않은 주제였지만 기독교인을 호출하는 조교의 호령에 손을 번쩍 들었던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대로다. 초코파이도 먹고 싶었고 내무반에 남아 있다가 혹여 있을 사역에 동원되기도 싫었던 것이다. 예배 시작하자마자 혼자만의 기도(?)를 시작해서 찬송과 설교를 무시하던 중 나는 벼락처럼 예배당을 울리는 목사님의 기도에 기함을 하며 깨어나고 말았다. 나를 깨운 건 “깨어 있으라!”는 설교가 아니라 ‘소비에트’라는 단어였다. “오 주님. 지난 5월9일 소비에트를 꿈꾸는 수만명의 학생들이 서울 시내를 뒤덮고 온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저들로부터 이 나라를 구하여 주시옵소서.”

1990년 5월9일은 민주자유당, 그러니까 지금의 새누리당의 원조, 즉 김영삼 민주당 총재와 김종필 공화당 총재, 대통령 노태우가 만세 삼창을 하고 만든 ‘민주자유당’의 정식 창당 일이었다. 그날을 디데이로 삼은 대규모 시위가 기획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바, 목사님의 눈물 섞인 기도는 나를 흥분케 하기에 충분했다. 조금만 더 자제력을 잃었다면 “할렐루야!”를 외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소비에트를 꿈꾼 적은 별로 없는 ‘리버럴’ 성향의 대학생이었고 당시는 새까만 훈련병 신세였지만, 민자당의 창당이란 결코 찬성할 수 없는 ‘보수들의 대야합’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나는 목사님이 눈물로 걱정했던 ‘소비에트를 꿈꾸는 학생들’의 건승과 승리를 하나님께 열렬히 빌었다. 아마 그날의 예배처럼 충실하게 ‘아멘’ 소리를 부르짖은 일은 그 전으로도 그 후로도 손가락으로 꼽으리라.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다.

대망의 소집 해제의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던 무렵, 희한한 소식이 들려온다. 소련에서 개혁 개방을 선도하던 고르바초프를 겨냥한 ‘쿠데타’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케이지비(KGB, 소련 국가보안위원회) 수장, 국방부 장관 등 거창한 직함들이 일으킨 8월 쿠데타였다. 고르바초프를 연금시키고 소련을 과거로 되돌리려는 이 보수파의 쿠데타는 “주동자들이 보드카에 취해서 일으킨 쿠데타”라는 농담 같은 기사가 나올 만큼 엉성했다. 스스로의 운명을 자멸로 몰고 간 패착이었다. 그 여름 유독 기억에 남는 뉴스는 쿠데타가 진압된 뒤 러시아 최고 소비에트가 낫과 망치가 그려진 소련의 깃발을 폐기하고 옛날 로마노프 왕조 시절의 파랑 빨강 하양의 삼색기를 러시아의 공식적인 국기로 공표했다는 것이었다. ‘소비에트’가 수십년 동안 사용해 오던 자신의 상징을 스스로 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넉 달 뒤 소비에트연방은 공식적으로 해체된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74년을 존속하며 그 깃발 아래 섰던 쟁쟁한 인물들과 허다한 역사적 사건들을 뒤로하고, 한때 조선을 비롯한 여러 피압박 민족의 기댈 언덕으로 자부했던 소비에트. 세계를 양분하는 슈퍼파워로 군림했던 그 이름은 그 역사에 비해 비참할 만큼 허무한 종말을 맞았다. 한국의 한 대학생이 “지금 울산은 소비에트야!”라고 들떠서 부르짖고 “소비에트를 꿈꾸는 학생들의 준동”을 목사님이 눈물로 근심하던 때로부터 2년도 지나지 않아 과거의 단어로 역사 교과서에 등재되고 만 것이다. 소비에트를 꿈꾸던 이들에게나 증오하던 이들에게나 그 과정은 상상 이상으로 짧았고 어이없을 만큼 허무했다.

이광수가 변절하던 1930년대를 상기하라

1990년대는 그런 시기였던 것 같다. 한 시대를 풍미한다 싶었던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때까지 철석같이 탄탄했던 것들이 짚단처럼 스러져 갔다. 크게는 인류의 거대한 실험이었던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했던 것도, 30년 넘게 우리나라를 지배하던 군부의 그림자가 걷혔던 것도, 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는 아이엠에프(IMF) 사태가 밀어닥쳐 수천만 한국인들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위협한 것도 모두 1990년대였다. 어디 거창한 것뿐만이랴. 얼마 전 화제가 됐던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서 제작팀의 고민 중 하나는 불과 10여년 전 당시를 재연하는 데 필요한 소품들을 구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듯 90년대는 “어떻게 이런 게 나왔을까” 탄성이 그치기도 전에 새로운 물건이, 생소한 매체가 연속부절로 등장하며 이전의 것들을 구닥다리로 몰아붙이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무선호출기(일명 삐삐), 피시(PC)통신, 전동 타자기, 플로피 디스크, 도트 프린터 등이 그랬고 수십년 사용하던 버스 토큰이 사라졌고 ‘주산학원’이 사멸돼 가던 때였다. “언제라도 힘들고 지쳤을 때 내게 전화를 하라”(꽃다지 노래 ‘전화 카드 한 장’ 중)며 선물로 전해 주기도 했던 전화카드의 효용 역시 휴대폰의 보급과 함께 급격한 사양길을 걸었다. 1990년대를 두고 전쟁 이후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변화가 가장 급속도로 일어났던 시대였다고 하면 과장이 될까. 1990년대는 마치 파도가 모래성을 허물듯 그 이전의 역사가 쌓아올린 자신만만한 성채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렸고 그 성벽 위에서 안주하던 사람들, 성벽 안에서 일상을 영위하던 사람들을 대혼란에 빠뜨렸다. 그 거센 파도는 많은 것을 쓸고 가 버렸고 더 많은 것들을 휘몰고 왔다.

매우 엉뚱하고 표면적인 발상임을 전제하고서 나는 가끔 일제 강점기의 역사와 최근의 역사를 비교해 보곤 한다. 우리의 1970년대는 일제 강점하의 1910년대의 재판이었다. ‘불온한’ 조선 청년들을 무조건 잡아다가 그 볼기짝을 걸레짝으로 만들 수 있는 ‘조선 태형령’이 살아 있었던 1910년대의 무단통치 시절과, 술자리에서 한 불평 한마디에 대역죄인 취급을 하고 여자들의 치마 길이와 남자들의 머리카락 길이까지 단속하려 들었던 유신 시대는 그 폭압성에 관한 한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그 후 1920년대는 1980년대와 조응한다. 3·1 항쟁 이후 임시정부 수립(1920)으로 시작해서 광주학생운동(1929)으로 막을 내리는 1920년대는 일제에 맞선 조선인들의 실천이 가장 광범위하고 열정적으로 펼쳐진 이른바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광주항쟁의 피바람과 함께 들어선 전두환 정권에 맞서 여러 젊은이들이 필사적인 항쟁을 벌인 1980년대처럼 말이다.

그럼 1930년대는 어떨까. 1920년대의 치열한 독립투쟁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주의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독립운동 전선은 무너지고 분열됐다. 일제 강점기 최대의 민족운동단체이자 좌우합작 조직이었던 신간회가 1931년 5월 해소되고 일본이 그해 9월 만주를 들이치며 대륙 침략의 발동을 건 것은 1930년대를 상징하는 사건이라 할 것이다. 이 암담함 속에 춘원 이광수를 비롯하여 조선 청년들의 ‘롤 모델’이라 할 사람들은 속속 자신의 노선을 바꿨고 기존 체제에 자연스럽게 편입됐다. 60년 뒤의 90년대, 자본주의 파괴를 꿈꾼 사람이 “그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라 물으며 집권 여당에 ‘투신’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던 것처럼. 고시촌이 이른바 노동 현장에 뛰어들었다가 ‘돌아온 대학생’들로 붐볐던 것처럼. 적잖이 지치기도 하고 정말 무엇이 가능한지 혼란스럽기도 하고 목전에 닿은 듯 보였던 희망이 홀연히 사라진 시대. 그리고 이후 펼쳐진 또 다른 격변 속에 바삐 잊혀지고 제대로 돌아봐지지도 않는 처지로 역사의 지층 아래 깔린 시기가 1930년대와 1990년대의 공통점이 아니었을지.

밀레니엄, 어느 할머니의 그림일기처럼…

그 어떤 격동기 속에서도, 그 어떤 전환기 속에서도 사람들의 일상은 살아 숨쉬고 맥을 이으면서 미래의 역사의 씨줄과 날줄을 엮어 가고 다음 시대를 규정하게 된다. 어느 시대에든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 90년대는 앞길의 갈피를 잡지 못하던 대학생이자 새까만 훈련병이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거대한 사회의 한 부속품이자 회사의 말단이 되어 월급을 받아 가정을 부양하는 6년차 방송 피디가 되기까지의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즉 역사적인 차원을 떠나 개인적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간 10년이었지만, 2013년 오늘 새삼 ‘응답하라 90년대’의 주문을 되뇌다 보니 그 바쁜 일상 속에 알알이, 또는 굵직하게 박혔던 수많은 사건들과 인물들이 떠오른다. 그들이 나의 일상에 얽혀들었던 순간의 느낌들이 생생하게 뇌리를 흐른다. 때로는 유쾌하고 감동적으로, 조금 더 많이 슬프고 암담하게.

개인적으로 1990년대를 열었던 열쇳말이 ‘소비에트’였다면 90년대가 끝나던 1999년하고도 12월, 나의 화두는 ‘밀레니엄’이었다. <리얼 코리아>라는 프로그램을 연출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상부에서 명령이 내려왔다. 프로그램 제목을 <밀레니엄 탐험 리얼 코리아>라고 바꾸라는 것이었다. 발음도 잘 안되어 고생했던 ‘밀레니엄 탐험 리얼 코리아’의 새해 기획 코너는 ‘새 천년 새 인물’이라는 코너였다. 기획 의도는 ‘새 천년 뉴 밀레니엄을 맞아 과거와 달리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가는 인물들을 소개함’이었다.

그 가운데 기억나는 것은 세 명이다. 서울대학교 최초의 비운동권 총학생회장. ‘송파 민씨의 시조’라고 제목을 붙였던 아프리카 가나계 한국인. 그리고 평생 동안의 일상을 그림일기로 남긴 한 할머니. 앞의 두 사례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그림일기 할머니는 사실 ‘새 천년 새 인물’에는 들어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템을 강행했다. 아이템이 없기도 했지만 끝끝내 그를 고수한 이유는 “새로움이란 ‘단절’이 아니며 다른 형태의 ‘계승’이다”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새 천년 새 인물 가운데 새 천년이 기려야 할 사람 하나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잖습니까”라고 나는 팀장 앞에서 뻗댔고 덕분에 나는 한 꼼꼼한 할머니의 내밀한 그림일기 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결혼과 육아, 아이들의 성장과 집안의 부침은 물론 그 속에 어른거리는 전쟁과 가난, 격변과 대사건의 그림자들까지. 앞으로 이 면은 사학을 전공하기는 했으되 공부와는 별로 친하지 않았고, 조국의 미래 등 거창한 고민과도 거리가 멀었던 한 마흔 중반의 장삼이사 직장인이 가지는 90년대의 느낌에 대한 ‘그림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함께 돌아보고 느껴보고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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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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