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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9.13 19:19 수정 : 2013.09.15 14:46

(※클릭하면 이미지가 커집니다.) 지금은 우리에게 삶의 일부가 돼버린 고통인 ‘전셋값 폭등’은 1990년에는 낯설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1990년 4월10일 전셋값 폭등을 견디지 못하고 일곱살, 여덟살 아이들과 함께 자살을 선택한 한 가장의 유서에는 “내 집 마련의 꿈 은 고사하고 매년 오른 집세도 충당할 수 없는 서민의 비애를 자식들에게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고 쓰여 있었다. 그의 유서는 2013년에도 현재진행형이다. <동아일보>, <경향신문> 갈무리

[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③ ‘전세 대란’과 아이들의 죽음

1200원이었던 학교 앞 밥값이
1500원으로 단번에 오른 1990년
서울 전셋값도 23.7%나 올랐다
전셋값 감당 못해 자살한 일가족
그중엔 7살·8살 아이들도 있었다

가난은 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집세와 빚에 치이던 부부가
아이들 집에 두고 문을 잠근 채
경비원·파출부로 일하러 간 사이
불이 나 3살·5살 남매가 죽었다

대학에 입학할 무렵 학교 앞 백반 값은 1200원이었다. 학교 구내식당 장국밥은 450원이었다. 말하자면 ‘세종대왕’ 한 분만 계시면 학교 안에선 근 20명이, 학교 밖에서도 8명이 넉넉히 배를 채울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거기에 서울 출신이거나 서울에 끈이 있는 학생들은 당시만 해도 ‘몰래바이트’라 불렸던 과외를 하며 한달에 25만~30만원 정도의 고소득을 올렸다. 밥값에 비추어 그 시세를 가늠해보면 요즘의 100만~120만원 정도의 짭짤한 수입인 셈이다. 데모로 시끄럽고 배를 곯고 다니는 고학생도 많았지만 캠퍼스는 나름 풍성했고 사회적 분위기도 그랬다. 80년대의 ‘3저 호황’으로 인한 경제성장과 88서울올림픽의 후광은 여전히 그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1990년 봄이 왔을 때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일단 학교 앞 밥값이 1500원으로 단번에 올랐다. 일거에 25%가 훌쩍 뛴 것이다. 1500원 2000원 하던 돈가스는 거의 100% 상향 조정이 됐다. 하숙비도 들썩들썩했다. 오른 하숙비를 감당하지 못해 짐을 싸들고 친구 자취방이나 학생회관을 전전하는 친구들이 꽤 많았다. 당시의 물가상승지수를 굳이 찾아보지 않더라도 80년대의 호황과는 사뭇 다른, 이상기류가 흐르기 시작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캠퍼스에서 일어난 일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1990년 3~4월, 전셋값 때문에 죽은 사람만 17명

국민은행 통계에 따르면 1990년 서울 전셋값 상승률은 23.7%에 달했고 그 전해에는 29.6%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80년대에서 90년대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전셋값이 무려 60% 넘게 날아오른 것이다. 88년 서울올림픽과 이후 새도시 건설에 이르기까지 전국을 휘몰아친 부동산 열풍과 인플레이션의 파도가 쓰나미로 화하여 서민들의 터전을 덮친 결과였다.

“폭등하는 부동산 가격에 내 집 마련의 꿈은 고사하고 매년 오른 집세도 충당할 수 없는 서민의 비애를 자식들에게는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1990년 4월10일, 온 가족이 함께 세상을 등져 버린 한 가장의 유서다. 그의 아이들은 일곱살, 여덟살이었다. 유달리 춥고 눈도 많이 왔던 겨울을 거쳐 찾아온 1990년의 봄은 여전히 겨울처럼 삭막했다. 3월과 4월 사이, 전셋값을 감당하지 못해 죽어간 이가 17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이즈음 한겨레에 실린 박재동 화백의 만평 하나를 나는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어느 허름한 방 안, 튀어나올 듯 눈이 충혈된 아버지가 쭈그리고 앉아 있다. 방 안에 달랑 하나 있는 장롱 위에는 언제든 이사 가야 할 처지를 상징하는 듯 짐 보따리가 얹혔다. 아버지 앞에 앉은 남매는 아버지에게 뭔가 다급하고 애타게 말하고 있었다. 정확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이런 말이었던 것 같다. “아빠, 우리 안 죽일 거지?”

그 무렵 그렇게 바닥으로 눈을 내리깔던 아버지가 한둘이 아니었고, 그 가운데 몇 명의 눈은 실제로 살기에 뒤집혀 아이들의 목을 스스로 조르기도 했다. 오죽하면 1990년 4월 전셋값에 치여 죽어간 17명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제까지 열렸을까.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전국세입자협의회가 연 이 합동위령제에서 세입자들은 추모사를 읽으면서도 이후 다가올 가을 이사철을 걱정하고 있었다.

1990년 봄은 실로 봄이 왔으되 봄 같지 않았다. 활짝 피어났다 곧 맥없이 떨어지는 꽃잎처럼 많은 생명이 세파에 휩쓸려간 나날이었다. 그해 봄의 가장 슬픈 죽음으로 나는 이 사건을 들고 싶다. 그 죽음은 전셋값 때문에 들이닥친 것은 아니었지만 가난 때문에 삶이 깎아지른 벼랑 아래로 떨어진 것은 동일하다.

1990년 3월9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한 연립주택 지하방에서 불길이 솟았다. 발견자는 청소를 하던 중 난데없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본 이웃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는 부리나케 연기 나는 곳으로 달려갔지만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다행히 안에는 사람이 없구나 가슴을 쓸어내린 아주머니는 알음알음 수소문하여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던 집주인과 인근 합정동에서 파출부 일을 하던 그 아내에게 집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숨이 턱에 닿도록 집으로 달려온 어머니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애들이! 애들이 안에 있었어요.”

모두가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문을 밖으로 잠근 것은 부모였다. 아이들이 어리니 행여 부엌에만 나가도 연탄불이나 식칼 등 다칠 일이 많고, 밖에라도 나가면 길이라도 잃을까 두려웠다. 부모는 다섯살, 세살 아이들을 방 안에서 놀게 하고 문을 잠갔다. ‘조금만 있으면 엄마가 올게’, 그 약속을 남기고. 그러나 아이들은 살아서 엄마를 보지 못했다. 아이들은 그 작은 손톱으로 열리지 않는 문을 긁어대다가 화마에 휩싸였다. 다섯살 혜영이는 방바닥에 엎드린 채, 세살 영철이는 옷더미 속에 코를 박은 채 숨져 있었다.

부부는 충청도에서 농사를 짓다가 도저히 가난을 이길 수 없어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살려면 일을 나가야 했고 남편 혼자 힘으로는 벅찼다. 아내도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지만 걸리는 것은 아이들. 시골에 계신 어머니에게 보냈다가 “더 이상 못 맡겠다”는 말과 함께 되돌아왔다. 돈을 쪼개 이웃에게 주며 아이들을 봐 달라고 부탁해 봤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끝이 났다. 그렇다고 아내가 집에 들어앉자니 오르기만 하는 집세와 늘어가는 빚더미가 하늘 같았다. 대책은 하나, 아이들을 집에 두고 문을 잠그고 나가는 것뿐이었다. 다섯살 누나에게 세살 동생을 데리고 잘 놀라는 당부만이 가난한 부모가 할 수 있는 조처의 전부였다. 그리고 아이들은 성냥을 가지고 놀다가 화마에 휩싸였다.

“몇 푼이나 번다고. 여편네가 문 잠그고 나가서…”

이 사건은 온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내게도 매우 껄끄러운 기억을 심어 주었다. 사건 발생 얼마 후 어느 날, 술 한잔 걸치고 버스 차창에 머리 기대고 잠을 청하는데 뒤에 앉았던 중년의 부부가 남매의 일을 화제 삼는 것이 들렸다. 건성건성 넘기고 있는데 둘의 대화가 갑자기 화전(火箭)이 되어 내 귓전을 뚫고는 머릿속에서 폭발했다.

“몇 푼이나 번다고. 여편네가 문 잠그고 나가서 그 지랄을 하게 했는지. 남편이나 여편네나 똑같다.”

“맞아요. 무조건 애들은 엄마가 있어야 돼.”

솔직히 악의가 있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는 승객이었고, 그 행색도 “싸장님”과 “싸모님”도 아니었다. 나름 슬픔에 혀를 차는 말이었고, 안타까움을 표한다는 것이 좀 지나쳤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부부는 내게 봉변을 당했다. 다음 정거장에서 올라탄 선배가 끼어들고 혼이 빠진 부부가 황급히 내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경찰서 신세를 졌을지도 모른다. 마치 내가 죽은 아이들의 아비라도 되는 양 악을 썼고 엄마라도 되는 양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퍼부어댔으니까. 23년 전 어느 버스 안에서 술 냄새 풀풀 풍기는 젊은놈의 느닷없는 발악에 혼비백산했을, 이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음직한 당시의 중년 부부께 다시 한번 사죄의 뜻을 표한다.

그때 나를 화나게 했던 것은 그 대화에서 나온 하나의 명제였다. “애들은 엄마가 길러야지!” 어찌 보면 당연한 명제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옳은 명제가, 가장 잔인한 명제인지도 모른다. 법대로 하면 되고, 가정은 지켜져야 하며,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야 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 그 옳고 지당한 책임을 사회가 전담 내지는 분담하지 않고 개인에게만 떠밀 때, 그 명제는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동아줄이 아니라 그 목을 잡아 죄는 올가미 줄로 변신한다. 남의 집 마루를 닦아서 번 돈 30만원을 몽땅 빚을 갚는 데 들이부어야 겨우 살아갈 수 있었던 어머니에게 그 명제는 무엇이었을까.

아이들이 죽은 지 6개월 뒤인 90년 10월, 개인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라고 단언하는 노래 하나가 세상에 나왔다. 그 노래는 공연윤리위원회 심의를 거부한 탓에 방송으로는 들을 수 없었지만 그 노래를 듣고 눈물을 쏟은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퍼져 갔다. 가수 정태춘씨가 부른 ‘우리들의 죽음’이었다. 정태춘의 5집 음반에 실린 이 노래는 정태춘씨의 낮게 깔리는 음성도 음성이지만 간간이 삽입된 가슴 찡한 내레이션으로 더욱 유명했다. 마지막 내레이션은 아이들의 것이었다. 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 대목에서 눈물을 쏟았다.

정태춘의 ‘우리들의 죽음’이 바꾼 인생

“엄마 아빠 슬퍼하지 마. 이건 엄마 아빠의 잘못이 아니야. 여기 불에 그을린 옷자락의 작은 몸뚱이를 두고 떠나지만, 엄마 아빠 우린 이제 천사가 되어 하늘나라로 가는 거야. 그런데 그 천사들은 이렇게 슬픈 세상에는 다시 내려올 수가 없어. 언젠가 우린 다시 하늘나라에서 만나겠지. 엄마 아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운 가장 예쁜 말로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어. 엄마 아빠 엄마 아빠 이제 안녕.”

1990년 3월9일. 감당할 수 없는 전셋값의 벼랑에 온 가족이 함께 몸을 던지는 일이 줄을 잇던 즈음, 맞벌이를 하고 밤늦게까지 일하지 않으면 하루 연명조차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격증하던 시기의 초입에서 어린 남매는 죽어갔다. 앞만 보고 달려온 고도성장의 동력이 사그라들고 그 그늘 속 절망과 슬픔은 깊어지던 90년대의 신호탄이었다. 불행한 남매 혜영이와 영철이의 죽음, 그리고 그 남매를 담은 노래 ‘우리들의 죽음’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진보 진영에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로 손꼽혔던 손낙구씨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부동산 계급사회> 서문에서 자신이 왜 부동산 문제에 몰두했는지의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가수 정태춘이 눈물로 부른 ‘우리들의 죽음’이란 노래가 있다. 1990년 3월9일 어느 맞벌이 부부의 어린 자녀가 비극적으로 숨진 사건에 얽힌 사연을 담았다. (중략) 그로부터 15년 뒤인 2005년 10월11일 서울 서초구 원지동 ‘개나리마을’, 빈민들이 비닐하우스로 집을 짓고 사는 이곳에서 엄마가 공장에 야근하러 간 사이 불이 나 여섯살, 네살배기 형제가 불에 타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중략) 지하 셋방이나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다가 채 인생의 꽃을 피워 보지도 못하고 불에 타 죽어야 하는 아이들 앞에서 명색이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에 몸담아 온 사람으로서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15년 동안 나는 과연, 과연 무엇을 했단 말인가’라고.”

그로부터 몇 년간 손낙구씨는 필사적으로 대한민국의 깊숙한 근저에 똬리를 틀고 앉아 사방의 자양분을 빨아들이고 있는 부동산이라는 괴물과의 사투를 벌이게 된다. 희망이란 이렇게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어둠이 더 짙어지고 냉기는 갈수록 심할 때, 그 속에서 계속 삶의 온기를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어둠과 냉기에 시들어가는 이들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무엇이든 해보자며 팔을 걷어붙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들의 절망은 나의 책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함께 슬퍼해주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는 것. 그렇게 희망은 돋아나는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90년대는 지금보다는 그 희망이 더 많이 남아 있던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속절없이 사람들의 뉴스가 연이어 사람들의 귓전을 때렸고, 합동위령제를 지내며 그들의 죽음을 아파하는 몸짓들이 줄을 이었으며 “정부는 대책을 세워라”는 호소가 보수언론부터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까지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하루에 수십명이 절망 속에 목숨을 끊어도 신문 한 귀퉁이 차지하기 어렵고, 한 공장 출신의 해고자 수십명의 생명이 연이어 사라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요즘에 비하면 그나마 따뜻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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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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