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3.11.01 19:08 수정 : 2013.11.03 14:51

6월항쟁으로 실시된 16년 만의 직선제로 ‘제6공화국’이 들어서고 맞은 1990년대 초반은 1980년대와 전혀 달라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재벌 비리 은폐, 민간인 사찰, 군 부재자 투표 부정선거 등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사건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이를 폭로한 건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지 못했던 몇몇의 용자들이었다. 이지문 육군 중위도 그랬다. 그는 1992년 3월22일 기자회견을 열어 군 부재자 투표의 문제점을 발표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⑥ 양심선언

1987년 6월, 전국을 울린 “호헌철폐 독재타도” 함성으로 대변되는 ‘6월 항쟁’은 제6공화국을 낳았다. ‘민주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16년 만의 직선제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가 “나를 코미디의 소재로 삼아도 좋다”고 선언했고 오늘날에조차 손에 쥘 경우 경을 칠 것이 뻔한 북한의 원전들, 이를테면 <피바다>나 <꽃 파는 처녀>가 원본 그대로 출판되고 읽혀졌으며 수천명의 시위대가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구속 전두환!”을 외치는 가운데 종로 대로를 메우고 행진을 했다.

“여차하면 폭동이 날 분위기”(노태우 대통령 회고록 중)를 이기지 못하고 전직 대통령의 가족들은 줄줄이 감옥으로 갔고 전직 대통령 부부도 울며불며 설악산 백담사로 쫓겨 가야 했다. 6공화국의 첫 대통령 노태우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6공화국 들어 권위주의가 어느 정도 청산되고 그만큼 민주화가 진전된 데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최소한 90년대 초반의 한국은 80년대 초중반의 한국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아니 달라 보였다.

그 시대는 쓰레기를 민주화라는 양탄자 아래 죄다 감춰 놓은 채 애써 깔끔한 척하는 방과 같았다. 이를 모르는 체하거나 정말로 모르는 사람들이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는 가운데 쓰레기는 양탄자 아래에서 온존하고 있었다. 이때 용감하게 양탄자를 들추며 여기에 쓰레기가 있다고 부르짖는 용자(勇者)들이 등장한다. 우리는 그들의 외침을 ‘양심선언’이라 부른다.

김대중·김영삼·노무현 등 사찰한 국군보안사

1990년대 초반은 가히 ‘양심선언’의 시대였다. 그 시발은 1990년 5월11일 <한겨레신문> 보도를 통해 재벌들의 비위와 감사원의 은폐를 폭로한 이문옥 감사관이었다. 이 감사관은 “23개 재벌 계열사의 비업무용 부동산 보유비율이 43퍼센트로 드러났는데도 업계의 로비에 따라 상부의 지시로 감사가 중단됐다”는 내용을 신문에 제보했고 이는 엄청난 파란을 불러왔다. 감사원 이하 정부가 펄펄 뛴 것이야 말할 것도 없겠다. 감사원은 이 감사관에게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는 각서를 쓰라고 윽박지르는 한편 사직서의 동봉을 요구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도 칼을 빼들었다.

“실제 내용과 크게 다른 자료를 언론기관에 유출하여 정부의 공신력을 떨어뜨렸다”는 것이 이문옥 감사관의 구속 사유였는데 정작 혐의는 ‘공무상 비밀누설죄’였다. 여기서 우리는 소련 시절의 농담을 떠올리게 된다. “서기장 각하는 바보다!”라고 크레믈(크렘린) 광장에서 외친 시민이 체포됐는데 그 혐의가 “국가기밀누설죄”였다는.

1990년 가을, 또 하나의 양심이 우리들의 발아래 숨어 온존하던 독재 시절의 쓰레기들을 들춰내어 움켜쥐고 절규한다. 9월23일, 칠흑 같은 어둠이 세상을 싸안고 있던 새벽 2시, 한 이등병은 복무 중인 군부대 담을 넘는다. 그의 품 안에는 대한민국 전체를 뒤흔들 엄청난 폭탄이 들어 있었다. 폭탄의 정체는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등 후일 대통령이 되는 대한민국의 야당 정치인들을 포함해 재야인사, 종교계 인사 등 1300여명의 개인 정보와 사찰 기록이 담긴 디스크와 관련 서류였다. 탈영병의 이름은 윤석양이었고 그의 부대는 국군보안사령부였다.

1990년 5월 이문옥 감사관이
재벌 비위와 감사원의 은폐 폭로
윤석양 이등병은 군에서 탈영해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기록을
용기 있게 세상에 공개했다

“여당후보 지지와 공개투표 강요”
1992년 이지문 육군 중위는
군 부재자 투표 비리를 고발했다
개인의 양심을 지킴으로써
전체의 양심을 건드렸다

당시 대한민국 보안사령부는 친위 쿠데타 등으로 인해 계엄령이 내려질 때 미리 검거해야 할 인사들의 명단을 추려 그 인적사항과 도주로, 예상되는 은신처까지 파악하고 실제 검거 훈련까지 거치고 있었다. 윤석양 이병이 갖고 나온 디스크들은 그 치밀한 도상훈련과 계획의 결과물이었다.

이 사건이 터진 다음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이상한 얘기가 들렸던 기억이 난다. “윤석양 그 사람, 속해 있던 조직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는군.” 윤석양은 대학 4학년 2학기를 마치고 제적된 사람으로서 ‘혁노맹’이라는 조직의 일원이었는데 신병교육대에서 보안대에 끌려간 뒤 협박에 못 이겨 조직의 정보를 다 부는 바람에 그 동료, 선후배들이 굴비 엮이듯 저 악명 높은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끌려갔다는 전언이었다. 양심선언과는 별개로 당시의 ‘운동’에 그가 끼친 해악 때문에 이른바 ‘(조직 내 궐석재판의)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후일 체포된 뒤 수형 생활 중에 만난 왕년의 동지는 윤석양 이병에게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퍼부었으며 출옥한 뒤에도 어떤 이들은 극언을 쏟아내며 질타했다고 한다. 윤석양 역시 자신 때문에 피해를 본 이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피할 수 없어 은둔에 가까운 세월을 오랫동안 보내야 했다고 하니 소문은 상당 부분 사실인 것 같다. 나는 그의 본의 아닌 프락치 노릇과는 별개로 윤석양 이병이 보여준 용기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우선 그는 눈 한번 질끈 감으면 안을 수 있는 편안함의 유혹을 거부했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내 실속이나 차려 무사히 제대하고 내 갈 길 가자는 ‘세속의 지혜’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끝끝내 무너져 가던 양심의 대들보를 일으켜 세움으로써 인간의 존엄함을 구현했다. “양심의 소리는 아주 작고 고요하지만 때로는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듣기조차 거북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는 윤석양의 토로는 그가 맞닥뜨려야 했던 괴물 같은 현실과 그 괴물의 촉수로부터 지키고 싶었던 내면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런 전투 끝에 양심의 손을 치켜든 사람들은 90년대 초, 연속부절로 출몰했다.

이문옥 감사관의 양심선언을 보도한 1990년 5월11일<한겨레신문> 1면.
이 중위에 맞선 국방부의 옹졸한 단결

14대 총선을 이틀 앞둔 1992년 3월22일 밤이었다. 서울 종로6가의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사무실에 준수하게 생긴 육군 중위가 나타났다. 그의 입에서 놀라운 사실이 흘러나왔다. 그는 백마부대, 즉 9사단 28연대 2대대 6중대 소속 소대장 이지문이었다. 9사단은 그로부터 12년 전, 즉 1980년 사단장 노태우 소장의 명령으로 전방에서 탱크를 몰고 서울로 진입했던 바로 그 부대다. 이지문 중위가 임지를 떠나 서울로 온 이유는 12년 전과 정반대였다.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군 부재자 공개 기표, 중간검표 등 군대 내에서 자행된 민주주의의 압살을 고발했다.

“여당 후보를 지지할 것과 공개 투표를 강요했습니다. (중략) 장래에 대한 불안으로 적잖은 갈등을 느끼고 있고 무엇보다 동료, 선배 장교들에게 돌아갈 불이익 때문에 가슴이 아픕니다.”

이지문 중위는 운동권이 아니었다. 그와 같은 과 동기였던 동아리 선배 말로는, 이지문 중위는 “87년 6월 정도에나 데모를 따라나가 봤을까 그 뒤에는 전혀 운동권이 아니었고 그냥 수업 잘 들어가던 범생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지문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튀지도 않고 덤비는 성격도 아니었던, 오히려 내성적이었다는 육군 장교가 어떻게 군대 안의 선거 부정이라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나 동시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로 치부되던 치부를 폭로하게 됐을까. 자신도 그 때문에 고민한 모양이다. 월간 <사회평론 길> 1995년 3월 호에서 이지문은 이렇게 얘기했다.

“어떻게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을까? 저도 설명이 잘 안됐어요. 그런데 작년에 대전에서 밤차를 타고 올라오다가 ‘아마 내가 처한 상황이 이런 경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바로 앞자리에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술 취한 남자 두 사람이 타서 그 여자 옆자리에 앉아 자꾸 치근덕대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자리를 바꿔 주었지요. 그러고 나니 이 술 취한 사람들이 행패를 부릴까봐 은근히 겁이 나데요. 내가 싸움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다른 자리에만 있었으면 아마 가만히 있었어도 됐을 겁니다. 부정선거 고발도 바로 그런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자리에만 있었어도 가만히 있었으면 될 일이었다. 그가 곧 제대하게 될 육군 병장 이 병장이었다면 아마 양심선언은 없었을 수도 있다. 눈 딱 감고 연대장이 시키는 대로 1번 후보를 찍은 투표용지를 눈앞에 보여주고 “이 병장 제대 며칠 안 남았지? 말년 휴가에 특박 더 끊어 줄까?” 하는 자상한 배려를 받으면 됐을 것이다. 이지문 중위가 장교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충성 명예 단결’을 부르짖는 대한민국 육군 장교였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지문 중위는 과연 그 행위가 누구에 대한 충성인지, 얼마나 군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인지, 나아가 이 옹졸한 단결 아닌 담합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 의심하게 됐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역시 단결(?)하여 이지문 중위에 맞선다. 전 부대원 수백명의 연대 서명을 받아 “그런 일 없었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당연히 이지문 중위는 갖가지 혐의를 뒤집어쓰고 불명예 제대를 한다. 확정되어 있던 대기업 입사도 당연히 취소된다. 뒤이어 익명의 제보들은 쏟아져 나왔고 국군 통신사령부 이원섭 일병이 나서 이지문 중위의 진실을 뒷받침한다.

이런 용기들은 군 부재자 투표 제도를 개선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다. 그 의미를 설명하자면 간단한 수치 하나만 들면 될 것이다. 5년 뒤의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50만표 차이로 당선되지만 우리 군은 70만 대군을 자랑하지 않던가.

그 와중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본의 아니게 악의 대열에 편입될 수밖에 없는 보통 사람들이다. 이지문 중위의 직속상관인 중대장은 정의를 숭상하고 명예를 목숨같이 여기는 육사 출신의 에프엠(FM) 군인이었다. 그 중대장은 선거와 관련하여 정신교육을 하다가 그만 뒤돌아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1번을 찍어 달라”고 말하며 내무반을 황급히 떠나야 했다. 양심선언 후 헌병대에서 마주했을 때 이지문 중위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며 양해를 구하자 중대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네 일이 있기 전부터 정신교육을 시키지 않아서 연대, 사단, 나아가 군단에서까지 찍혀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너로 인해 더 큰 피해를 입을 것은 없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보듯이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

엉뚱한 답변 꺼낸 그 중대장을 어찌 원망하랴

그러나 이 멋진 장교는 언론사 기자들이 “이지문 중위의 말이 전혀 사실이 아니냐?”고 캐물을 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이라고 입을 떼고서도 결국에는 “내성적인 성격 탓에 사물의 부정적 측면만을 집중적으로 예리하게 바라본 듯하다”는 엉뚱한 답변을 뱉어야 했다. 이지문 중위는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 역시 그를 비난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진짜 군인이었다면 직위를 걸고 이지문 중위의 진실을 옹호했어야지, 비겁하게 거짓말이나 하는 꼬락서니를 왜 비난할 수 없느냐?”고 누군가는 책상을 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 이지문의 증언 속의 그 중대장이라면 속에 없는 말을 하고 기자들 앞을 벗어난 뒤 건물 뒤에서 땅을 치며 통곡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가장 일반적인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하여 정작 가장 격렬한 분노를 터뜨려야 할 대상은 한 용감하고 명예로운 장교를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20년 전에 벌어진 얘기를 했다. 그때 이미 직선 대통령이 청와대에 좌정해 있었으며, 여소야대도 이루어봤다. 국회에서 한때의 세도가와 재벌들이 쥐 잡히듯 잡히는 모습을 보며 통쾌해하기도 했다. 이제 이만하면 민주주의는 웬만큼 하지 않나 싶은 마음도 들던 때이기도 했다. 툭하면 “때가 어느 때인데 그런 짓을 하겠느냐”가 입버릇처럼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그 허울 아래에서 과거의 독버섯들은 칡넝쿨이 되어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아채고 있었다. 그를 목도하고도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 뭘, 원래 세상은 다 그런 거지”라고 짐짓 쿨한 체하던 사람들 틈에서 소수의 의로운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과 행복을 전부 걸고, 개인의 양심을 지킴으로써 전체의 양심을 건드렸다.

당시 이지문 중위는 이런 기대를 남겼다. “(저는 떠나고) 중대장님과 동료 장교들, 그리고 우리 소대 사병들은 군에 남아 있게 되었지만,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그리고 각자 사회를 보는 눈이 다르다 하더라도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양심적이면 항상 같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20년 후 오늘, 우리와 우리의 나라는 과연 그 기대에 충실한가. 그 시절 이지문 중위에게, 윤석양 이병에게, 이문옥 감사관에게, 그 외 모든 양심선언자들에게 “당신들의 공로로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나마 살게 됐소!”라고 치하할 상황에 도달해 있는가. 대답이 예스였으면 좋겠지만 ‘양심상’ 나는 그 대답을 할 수 없다.

반면, 20년 후 오늘의 역사가 어처구니없는 도돌이표를 그리고 있다고 해서 90년대 줄줄이 이어졌던 양심들의 결단으로도 바뀌는 건 결국 없지 않았냐고 한탄한다면, 나는 그 탄식 앞에서도 고개를 저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오늘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을 수 있지만, 그들 덕분에 우리는 여기까지라도 온 것일 테니까. 또 칠흑 같은 어둠이 온다 해도 누군가는 그들처럼 양심의 성냥을 그을 것이니까. 세상없는 역류 속에서도 그를 거슬러 새 생명을 낳는 연어처럼 누군가는 자신들의 양심을 펼쳐 보일 테니까.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