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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1.08 19:19 수정 : 2013.11.10 15:48

1991년은 남북 스포츠 단일팀이 꾸려졌던 처음이자 마지막 해다. 남북이 하나 되어 서로를 응원하는 날은 언제쯤 다시 찾아올까.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 단일팀으로 참가한 북한의 리분희(왼쪽)와 현정화 선수가 손을 잡고 웃고 있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

[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⑦ 남북 단일팀의 추억

대학에 들어가서 낯선 것 중의 하나가 ‘연호’(年號)였다. 적잖이 비장한(?) 연호들이 대자보와 과 학회지와 심지어 자판기 일회용 컵에까지 수놓여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본 연호는 ‘분단조국’이라는 연호였다. 내가 입학했던 1988년은 ‘분단조국’ 44년이었다. 아마 올해 2013년은 분단조국 69년이 될 것이다. 이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이런 분단 조국의 역사 속에서 남북이 계속 으르렁거리는 와중에도 ‘정치와 무관한’(글쎄? 아무튼) 스포츠만큼은 힘을 합쳐 보자는 논의가 나온 것은 꽤 오래전부터였다. 1964년 도쿄(동경) 올림픽을 앞두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권유를 받은 남북은 단일팀 구성을 위해 머리를 맞댔으나 결국 결렬됐다. 하지만 당시 합의된 항목 가운데에는 이런 것이 있었다. “국가(國歌)는 해방 이전의 ‘아리랑’으로 한다.” 이 합의는 수십년 동안 지하에 묻혀 있다가 90년대 들어 샘물처럼 솟아오르게 된다.

KOREA냐 KORYO냐, 깃발 정하기부터 난항

연이은 방북 파동으로 80년대 끝자락의 남북관계는 매우 험악했지만 90년대가 동터오면서 남북은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분위기가 사뭇 바뀌고 있음을 극적으로 드러낸 사건은 1990년 베이징(북경) 아시안게임이었다. 이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남북은 그놈의 ‘단일팀’을 위해 협의를 계속한다. 팀의 깃발을 정하는 일부터 난항이었다. 남측은 흰색 바탕에 녹색 한반도가 그려지고 그 아래에 KOREA라는 문구를 새긴 기를 제시했고 북측은 흰색 바탕에 황토색 한반도에다 KORYO, 즉 ‘고려’를 영문으로 새긴 기를 제시했다. 그놈의 색깔이 뭐라고 치열하게 맞서던 남과 북은 결국 흰색 바탕에 파란색 한반도 지도가 새겨진 깃발로 합의를 도출해 낸다. 지금도 간간이 누군가의 손에 들려 펄럭이는 한반도기의 탄생이었다. 끝내 아시안게임에 남북 단일팀을 내보내지는 못했지만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남북은 ‘합동응원’의 형태로 작은 통일을 이뤄내게 된다.

북한 응원단장이 남한 응원단을 찾기도 했고 남한 응원단을 이끌던 뽀빠이 이상용은 북한 응원단 앞으로 뛰어들어 열렬한 박수를 받기도 했다. 뽀빠이 아저씨와 농악대 옷을 입은 북한 응원단이 뜨겁게 끌어안은 사진은 보는 사람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생각해 보면 참 쉬운 일인데 어찌 그리 어려웠던가 말이다.

베이징 아시안게임 이후 남과 북의 국가대표팀이 서울과 평양을 각각 방문하여 치르는 통일축구대회가 성사된다.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해방 직후 행해졌던 ‘경평전’의 부활이었다. 남북의 화해 분위기는 점차 무르익었다. 1991년, 즉 분단조국 47년 4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단일팀을 출격시키는 데에 합의한다.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 탁구 선수권대회였다.

사람들의 주된 관심은 여자 탁구에 쏠렸다. 여자 탁구에 관한 한 중국은 세계 최강이라는 수식어도 모자라는 우주 최강의 만리장성이었다. 그나마 개인전에서는 간혹 중국을 꺾는 개가를 올린 적도 있었지만 단체전에서 중국을 꺾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일이었다. 그때까지 중국은 단체전 8연패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에리사라는 스타를 내세워 한국 대표팀이 단체전에서 중국을 꺾은 적도 있지만 그 이후 단 한 번도 중국은 우승컵을 놓치지 않았다. 수십년 동안 탁구 좀 친다는 남과 북 모두에게 중국은 요즘 인터넷 용어로 ‘넘사벽’이었다.

영화 <코리아>에서 보듯 남과 북의 선수들이 갑자기 한 팀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분희 언니’라는 말에 ‘정화 동무’로 맞받는 어색함 속에서도 현정화, 홍차옥, 리분희, 유순복으로 이뤄진 남북 단일팀은 승승장구하면서 결승에 진출했다. 북한 선수들이 부담을 느끼던 유럽 선수들을 무너뜨린 것은 현정화였고, 간염에 걸린 몸을 무릅쓰고 분전하여 한국 선수들을 감동시킨 것은 리분희였다.

그리고 결승전. 상대는 말할 것도 없이 중국이었다. 그 선봉에는 탁구의 마녀 덩야핑이 서 있었다. 일찍이 스포츠를 즐겼던 한국 사람들에게는 별로 떠올리기 싫은 몇몇 이름들이 있다. 이를테면 말레이시아 축구팀 골키퍼 아루무감(원숭이 같은 긴 팔로 한국 팀의 슛을 악착같이 막아내던), 중국의 여자 농구 헐크 천웨팡(진월방) 등등, 그 대열에서도 지긋지긋하게 빛나는 이름 덩야핑은 한국 선수들을 매번 좌절시켰던 ‘마녀’였고 이 마녀는 빗자루 대신 라켓을 타고 다니며 이후 세계대회 우승만 18번을 차지하는 대기록을 세운 사람이다.

12 대 17까지 몰린 유순복은
갑자기 또 약을 먹은 듯했다
거짓말처럼 따라붙기 시작했다
마침내 동점, 그리고 역전
나는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축구에서도 기적같은 동점골
최영선, 최철, 조인철 등
북한선수 향한 열렬한 환호
1991년, 그것으로 끝이었다
3년 뒤 급속히 얼어붙었다

이 마녀가 맥없이 거꾸러진다. 마녀를 물리친 것은 남한의 에이스 현정화도 아니고 북한의 고참 리분희도 아닌 홍안의 함경도 처녀 유순복이었다. 현정화에 따르면 “약 먹은 것처럼 공을 쳤다. 한 포인트를 따내곤 한 40~50㎝씩 점프를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약 먹었다는 표현이 틀리지도 않은 것이 그 후로 유순복이 언감생심 덩야핑을 물리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녀는 ‘약’을 먹었을 것이다. 사상 최초로 재일본민단과 총련이 한데 모여 환영 만찬을 베풀고, 경기장에서 한 깃발 아래에서 백발성성한 1세부터 우리말 서툰 3세들까지 코리아를 부르짖는 그 모든 분위기가 약이 아니면 무엇이었으랴.

현정화도 질 수 없다는 듯 중국 국내 선발전에서 두각을 나타낸 신예 가오쥔을 눌렀다. 게임 전적 2 대 0. 한 번만 더 이기면 우승이 눈앞에 있었지만 역시 중국은 중국이었다. 현정화·리분희 두 에이스가 나선 복식에서 졌고 현정화마저 중국의 덩야핑에게 덜미를 잡혔다. 다시 유순복이었다. 1991년 4월29일 탁구선수권대회 여자단체 결승전 마지막 경기에 나서는 유순복이 화면에 잡혔을 때 아련하게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아파트 아래층에서 함께 텔레비전을 지켜보는 가족들인 듯했다. “유순복! 유순복! 유순복!” 작달막하고 동그란, 현정화처럼 매섭지도 않고 리분희처럼 노련해 보이지도 않는 뭉툭한 처녀는 세계 랭킹 2위 가오쥔을 만났다.

반공주의자 아버지마저 아들을 얼싸안고…

운명은 2세트에서 갈렸다. 유순복은 천리마의 기세로 백핸드를 휘두르고 속도전의 스피드로 스매시를 해 1세트를 따냈고, 2세트를 맞았는데 중국의 가오쥔은 2세트 들어서 막강한 ‘가오’를 잡기 시작했다. 유순복은 12 대 17까지 몰렸다. 가오쥔의 승리까지 4점을 남겨 둔 상황에서 갑자기 유순복은 또 약을 먹은 듯했다. 한 점 한 점 유순복은 거짓말처럼 따라붙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가 동점을 이뤘을 때를 나는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나 역시 ‘40~50센티미터의 점프’를 하며 펄쩍펄쩍 뛰고 있었던 것이다. 급기야 가오쥔을 잡아버린 순간에는 내가 마치 유순복인 양 마루에 드러누워 버렸다.

재일동포들은 하염없이 울면서 만세를 불렀다. 젊은이고 늙은이고 스탠드에 일어서서 무엇 만세인지 모를 만세를 부르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처음으로 이룬 단일팀이 중국을 꺾고 세계를 제패하다니. 참으로 상서로운 징조로 보였고, 문익환 목사님의 시구절 “통일은 됐어!”가 귀에 아른거렸다. 단일팀의 국가(노래)로 이미 30년 전에 결정된 바 있으나 처음으로 울려 퍼지는 ‘아리랑’을 따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린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분단조국 47년. 드디어 그 철의 세월은 중국의 만리장성을 거뜬히 넘은 코리아의 젊은 여성들의 손에 내동댕이쳐진 듯 보였다. 흰색 바탕의 하늘색 단일기는 가을 하늘보다도 높은 곳에서 청명하게 빛났다.

단일기가 휘날릴 곳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1991년 6월에 열린 세계 청소년 축구 대회였다. 남북 청소년들이 함께 이룬 단일팀이 조금이라도 성과를 내 주기를 기대하며 대진표를 보고 절망했던 기억이 새롭다. 남북단일팀은 마라도나의 나라 아르헨티나, 루이스 피구(2002년 월드컵의 그 피구)가 이끄는 주최국 포르투갈, 그리고 유럽의 아일랜드와 한 조였다. 만만하기는커녕 해볼 만하다고 표현할 상대조차 꼽기 어려웠다. 첫 경기는 아르헨티나전이었고 경기 시간은 새벽이었다. 알람시계를 두 개를 맞춰 놓고 새벽 두 시에 일어나 눈을 비비며 경기를 기다렸다. 승리를 기원한 건 아니었다. 손발을 맞춘 지도 얼마 안 되는 남과 북의 청소년들에게 감히 아르헨티나를 어떻게 해보라는 기대를 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그저 실망하지 않을 만큼, 그 패배의 원인이 ‘단일팀’으로 돌려지지 않을 정도의 경기를 펼치기만을 기대했다.

예상외의 선전,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격전 끝에 0 대 0을 이어가던 중, 비겨도 이긴 거라며 함께 밤을 새우던 아버지와 덕담을 나누는 차에, 나는 믿기지 않는 장면에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아르헨티나 문전에서 흘러나온 공을 가로챈 북한 출신의 조인철이 미사일 같은 슛을 쏘았고 통쾌하게 네트에 꽂혀 버린 것이다. 당신이 함경도 출신이시면서도 “북한 놈들”이라면 눈을 부릅뜨던 반공주의자 아버지와 그에 맞서서 열렬한 입씨름을 전개하곤 했던 아들은 얼싸안고 환호했다.

기적은 계속됐다. 2차전 상대는 아일랜드였다. 역시 잘 싸웠지만 코리아는 후반전에 한 골을 먹어 패색이 짙었다. 3차전 상대로 주최국 포르투갈이 버티고 있었기에 아일랜드에 패배한다면 예선 탈락이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 후반전 남한 출신의 조진호가 결정적인 찬스를 놓쳤다. 조진호는 일어나지 못한 채 땅을 치며 안타까워했다. 해설위원 신문선도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땅을 치는 저 모습이 7천만 겨레의 심정입니다.”

종료 1분을 남기고 한 ‘코리안’이 공을 몰고 사이드라인을 타고 돌진했다. 놀라운 스피드였다. 그의 이름은 북한 출신의 최영선. 지쳐 버린 아일랜드 선수들을 따돌리며 오른쪽을 치고 들어간 최영선은 기가 막힌 크로스를 올렸고 역시 북한 출신의 최철이 머리를 갖다 댔다. 기적 같은 동점골이었다. 그라운드에서 남과 북의 코리안들은 통일이 돼 버렸다. 누가 남인지 북인지 가리지 않고 한 덩이가 되어 울고 웃고 환호했다. 아마 그 시간 한반도 남과 북의 코리안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전쟁 이후 남한 사람들이 북한 사람에게 그렇게 열광적으로 환호한 것은 처음이었으리라. 강철, 최철, 조인철 등 유난히 철자 돌림이 많았던 남북의 청소년들은 그야말로 ‘의지의 한국인’이며 ‘끈기의 조선인’으로서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기적을 일궈 냈다.

예선을 통과한 코리아 팀은 운 나쁘게도 세계 최강 브라질을 만난다. 스포츠신문들은 한번 해볼 만하다며 요란한 나팔을 불었고 국민들도 부푼 마음으로 또 하나의 기적을 기다렸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현실의 냉엄함을 일깨우기라도 하듯 브라질은 코리아 팀을 맹폭했고 5 대 1이라는 스코어가 단일팀의 최후를 장식한다. 그래도 잘했다는 감동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현정화 “단일팀 같은 거 하지 말자”

남북 단일팀의 추억은 딱 91년의 봄과 초여름에 국한된 채 멈춰 버렸다. 털도 생생하고 상아도 찬연히 빛나지만 얼음 속에 갇힌 채 급속 냉동돼 버린 매머드 같은 신세라고나 할까. 그로부터 3년 뒤 남북은 불바다와 피바다의 협박을 교환하며 얼어붙었고 미국은 북한 핵을 빌미로 실제로 북한 공격 계획을 세우고 미국인들에 대한 소개령까지 내렸다.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적대와 평화의 핑퐁게임, 무력충돌과 정상회담의 냉온탕을 오가는 세월 속에서 단일팀의 꿈은 사라졌다. 고락을 같이하며 세계를 놀라게 한 동료들과 아프게 헤어지고 그 뒤로는 만나지도 못한 선수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지바의 영웅 현정화 감독의 말은 그래서 서럽다.

“정치적인 이벤트를 할 바에야 차라리 단일팀 같은 거 하지 말고 각자 국가를 인정하고 사는 게 낫다는 마음이 굳혀졌다.”

그러고 보면 1991년 분단 조국 47년은 그래도 남과 북이 ‘정치적 이벤트’라도 도출할 수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즉 남도 북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하고 북도 남에 대해서 당당함이 남아 있었던 즈음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는 뜻이다. 이후 북한은 ‘고난의 행군’에 진입했고 남한은 외형적 성장을 계속했다. 남북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져 북한은 단일팀 따위를 고려할 상황이 아니게 됐고 남한은 단일팀 따위를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남북 청소년 단일팀 북한 측 코치였던 문기남 코치가 2003년 탈북하여 남한에 정착한 사실은 그 서글픈 현실의 단면을 냉엄하게 비춘다. 오늘 밤, 남북 단일팀의 추억을 까마득한 과거의 영역에서 더듬고 있는 나로서는 현정화 감독이 언젠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을 묵묵히 곱씹게 된다.

“북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무조건 도와줘야 한다고는 생각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통일이 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장기적으로는 준비를 해서 통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나빠져서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도와줘야 한다. 정말로 손을 떼어버리는 상태까지 가면 안 되지 않나.”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 모두의 대표가 되어 세계를 제패했으나 눈물 흘리며 이별해야 했고 다시는 그날의 동료들과 마주하지 못한 한 탁구인의 탄식이었다. 1991년의 단일팀의 추억은 강렬한 달콤함으로 시작했다가 쓰디쓴 소태로 끝난다. 오늘날 우리는 1991년에 다시 이르기도 쉽지 않은 세월을 살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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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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