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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1.15 19:30 수정 : 2013.11.17 20:06

1990년에 개봉한 한국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의 제목은 냉소적이다. 성폭행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피해 여성의 행동을 정당방위로 인정하지 않았던 법원을 조소하는 것 같다. 그만큼 여성이 살기 어려운 시대임을 드러내주는 제목이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⑧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상)

1990년도 11회 청룡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그 다음해 제29회 대종상에서는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 우수작품상, 각본상을 휩쓴 영화가 있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제목은 소설가 박완서의 동명 소설 제목에서 따왔지만 내용은 전혀 달랐다. 영화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30대 주부(원미경)가 밤늦게 귀가하다가 두 청년에게 성폭행 위기에 내몰린다. 그때 여자는 방어본능을 발휘해 자신의 입속으로 비집고 들어온 청년의 혀를 깨문다.(여담으로 이때 혀를 깨물리는 청년 역은 미남 배우 김민종이 맡았다.) 그런데 이 혀를 다친 청년이 적반하장으로 주부를 상해 혐의로 고발한다.

치한 쪽 변호사(젊은 날의 이경영이 이 야비한 변호사 역을 맡는데)는 각종 인격적 모욕과 독설을 통해 여자를 문제 있는 여자로 몰면서 궁지로 몰아간다. 주변의 의심 섞인 시선과 폭력에 가까운 수군거림은 주부를 참혹한 나락으로 밀어넣는다. 남편조차도 외면하는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한 여성 변호사가 “모든 여성의 인격 회복을 위해서라도 항소하라”고 그녀를 설득해 법정 투쟁에 나서고 끝내 승리한다는 내용의 영화였다.

‘술김에’ ‘호기심으로’ 키스했다는 가해자들

문제는 이 영화가 실화의 뼈와 살을 그대로 옮겨 온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사단은 1988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그해 경북 안동에 사는 한 주부가 어두운 길을 걷다가 두 명의 젊은 남자에게 끌려간다. 어두운 골목으로 끌고 간 남자들은 성폭행을 시도했고 여자는 자신의 입안에 들어온 남자의 혀를 깨물어 버렸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고 나뒹굴었다. 혀가 뜯겨 나간 것이다.

다음날 피해자를 자처한 것은 남자였다. 주부를 찾아 잘린 혀에 대한 보상금을 요구한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귀가하던 도중 술에 취한 주부가 매달리며 어떤 식당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여 그녀를 부축하여 골목길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부축하면서 몸이 밀착하여 뺨이 맞닿게 되자 ‘술김에’ ‘호기심으로’ 주부에게 키스를 했다는 것이다.(후에 번복하기는 하지만 그는 심지어 주부가 먼저 키스를 시도했다고 우겨대기도 한다.)

1988년 경북 안동의 한 주부가
성폭행 시도한 남자 혀를 깨물었다
가해자들이 보상금을 요구하자
검사는 ‘과잉방어’로 기소했고
판사는 징역 5개월을 선고했다

21년 전 성폭행 악몽 시달리다
가해자 찾아가 살해한 피해자
‘행실이 안 좋아서 그런 일 당하는’
저주스러운 신화가 판치는 땅에서
피해자는 침묵을 강요당했다

가해자들의 변호사는 당시에는 더욱 일반적이었고 지금도 가끔 통용되는 논리로 여자를 공격한다. “밤에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면서 다녔고 집안 문제로 불화를 일으키는” 부도덕한 여성으로 몰아붙이고 그 여성의 마수(?)에 걸린 전도양양한 청년들의 상처를 부각시킨 것이다. 덩달아 ‘과잉방어’로 주부를 기소한 검사는 여자에게 징역 1년을 구형하고 판사는 주부에게 징역 5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한다. “정당방어라 인정될 수 없는 지나친 행위”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이랬다. “상가가 밀집돼 있고 흉기를 소지하지 않았으니 피해자가 공포에 질려 혀를 깨물었다고 보기 어렵다.”

영화에서는 한 여성 변호사가 나서지만 현실에서는 좀 더 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떨쳐나선다. ‘여성의 전화’에서는 기자회견을 통해 강간범을 옹호하는 판결에 항의하며 변호인단을 구성했다. 주부의 무죄 판결을 위한 범시민 가두서명을 전개했고 항소심 법원 앞에서 여성 100여명이 무죄를 목이 터져라 외친다. 이 야단법석이 있고서야 피해자 주부는 지극히 당연했지만 험난했던 ‘무죄’ 선고를 받아들게 된다. ‘술을 먹었다거나 식당을 경영한다거나 밤늦게 혼자 돌아다녔다거나’ 하는 등의 사정이 정당방위의 성립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기초 중의 기초가 법적인 판례로 남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들어 보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부르짖은 외침, “여기가 무슨 강간의 왕국이냐?”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다.

“제 사건이 일어난 뒤에도 우리 동네에서 세 건의 강간 사건이 일어났는데 저를 위문하러 왔다가 돌아가던 여자분이 그만 당했어요.”

성숙한 여자라면, 범죄의 중함이 덜어지는가

실화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어처구니없던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가 개봉된 다음해, 1991년 벽두 대한민국은 또 한 여성의 절규 앞에 말문을 닫게 된다. 그 절규는 지리산 자락, 전라북도 남원의 어느 집에서 들려왔다. 쉰다섯의 남자가 칼에 찔려 살해됐고 가해자는 나이 서른의 주부였다. 치정 관계라고 하기엔 나이 차이가 났고 돈 문제가 얽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원한 관계였다. 그런데 그 원한은 무척이나 오랜 것이었다. 무려 21년 전 우물가에 물 길으러 갔던 아홉 살의 소녀는 잠깐 이리 와 보라는 아저씨의 말에 아무 의심 없이 따라갔고, 성폭행을 당했다.

아홉 살 소녀의 고통을 어찌 말로 표현하겠냐마는, 그 말문을 막아버린 것은 공포였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막막한 공포, 말해 본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캄캄함의 공포, 누구에게든 말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옭아맴의 공포. 그로부터 21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찌어찌 키는 자라고 가슴은 나와 성인이 됐고 결혼도 했지만 그녀는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괴로움에 시달렸고, 누군가와 아이를 낳고 살면서도 화들짝화들짝 고슴도치가 되어 버리는 스스로에 절망해야 했다. 그녀는 스물한 해 전의 악몽을 떠올려 냈다. 자기 안에 흐르는 악몽의 근원이 그날이었음을 기억해 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인 자의 공소시효도 15년이면 끝나던 나라에서 주부가 당한 범죄의 가해자를 응징할 방도는 없었다. 마음씨 좋은 파출소 순경이었으면 “아주머니. 정말 미치게 억울하지만 방법이 없어요. 그냥 잊고 사세요”라고 나직하게 타일렀을 것이고, 좀 까칠한 순경이었으면 “진작 신고 안 하고 뭐 했어요, 아줌마. 이제는 대통령이 와도 안 돼”라고 돌아앉았을 것이다. 많은 번민과 주저 끝에 여자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망친 가해자를 응징하기로 결심한다. 1991년 1월30일 여자는 21년 전의 그 남자를 찾아가 칼을 휘두르고 현장에서 체포된다. 그리고 공판 중 그녀가 한 말은 역사에 남는다. “나는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짐승을 죽였습니다.” 이른바 김부남 살인 사건이었다.

“나는 짐승을 죽였습니다”라는 말은 장안의 화제가 됐다. 그래도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영화가 나올 수 있었던 사회라 그랬는지 “그래도 사람을 죽이면 돼?”라는 식으로 김부남 여인을 공격하는 여론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이 뉴스를 술에 취한 채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가던 차 안에서 들었다. 그때 비분강개하던 택시 기사 아저씨의 멘트는 그 취중에서도 꽤 선연하게 남아 있다. “그런 개새끼는 죽어도 싸지. 미친놈. 어른도 아니고 아홉 살짜리한테 어떻게.” 나도 그 말에 동의하면서 함께 욕지거리를 했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 논리는 좀 이상하다.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더 큰 문제일 수는 있겠으나 성숙한 여자라고 해서 그 범죄의 중함이 덜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택시 기사 아저씨의 말이야 물론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 것이나, 이런 찜찜한 생각이 남는 것은 이런 것이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불한당이 옴짝달싹 못하게 해 놓고 들이미는 혀를 깨물었던 여자에게 유죄가 선고(1심이었을망정)되었던 나라에서, ‘행실이 안 좋아서 그런 일을 당하고 다니는’ 저주스러운 신화가 판치던 땅에서 사는 남자들이 은연중에 드러낸 무심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자격지심 같은 것이다. 그리고 어린 김부남도 어디 가서 자신의 피해를 드러내지 못했던 것은 그녀가 ‘어려서’가 아니라 혹여 엄마한테 혼날까봐, 무슨 나쁜 일이라도 생길까봐, 그 끔찍함을 목구멍 속으로 꾸역꾸역 밀어넣었기 때문이 아닌가. 김부남 사건이 있은 지 1년 뒤 나는 그 자격지심을 뼈아프게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된다.

‘네가 꼬리친 거 아니냐’고 말한 가해자 어머니

복학한 지 얼마 안 되었을 즈음 안면이 있던 여자 후배가 찾아왔다. 부들부들 떤다는 말이 적합할 정도로 그녀는 심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가끔 목이 메어 말을 잇지도 못했다. 우리도 얼굴과 이름을 아는 자신의 과 후배가 기숙사에 올라가는 길에 만취한 한 남자가 덮쳤고 성폭행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누군가 올라오던 남학생이 뛰어들어 이를 제지하고 성폭행은 미수에 그쳤지만 심하게 구타를 당했고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다.

“범인이 누구냐 하면요! 우리 학교 1학년이에요. 그런데 그 가족들이 걔 병원에 와서 난리를 치고 있다고요. ○○이(피해자) 가족들은 다 지방에 있고 피해자가 반대를 해서 알리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누워 있는 애 앞에서….” 후배가 이를 악물고 하는 말인즉슨 그렇게 ‘난리를 치고 있는’ 가해자들을 좀 상대해 달라는 것이었다. 경찰에 왜 신고를 하지 않느냐고 했을 때 후배는 거의 울부짖었다. “부모님이 알게 될까봐 그런다니까요.”

가해자의 가족들이 하는 양을 들으니 가관이었다. 병원에 들러서는 합의를 종용하며 “여자애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걸 보고 우리 아무개가 훈계하려다가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는 둥(피해자는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다) “네가 먼저 꼬리를 친 게 아니냐”는 둥 실로 허파가 뒤집히는, 바로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에 등장했던 악질 변호사의 억지를 시연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 모두는 격노했다. “뭐 그런 집구석이 다 있어!” 그런데 매우 불길한 우연이 겹치고 있었다. 유일한 증인이라 할 학생, 즉 현장에서 가해자를 만류했던 남학생이 하필이면 범인의 과 동기였다는 것이다. “목격자는 폭행하는 건 봤지만 성폭행 시도 여부는 잘 모르겠다고 발을 뺀다더라고요.”

이쯤 되었을 때는 신중이고 뭐고 없다. 병원으로 달음박질치는 게 신중이다. 주먹에 독기를 품은 나를 비롯한 서너 명의 선후배는 한덩이가 되어 병원으로 들이닥쳤다. 마침 가해자 가족들이 병원을 또 찾아왔다. 가해자 녀석도 함께였다. 피해자 애인 행세를 하기로 했던 87학번 형이 주먹을 쳐들고 어설픈 연기를 펼쳐 봤지만 가해자의 형이라는 이의 싸늘한 한마디에 그만 머쓱하게 주먹을 내려야 했다.

21년전 자신을 성폭행한 남자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부남씨가 1991년 8월 16일 전주지법 제1호 법정에서 열린 결심공판을 마치고 법정을 나서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당신들 깡패야?”

가해자 가족들은 돈봉투를 들고 와 있었다. 빨리 합의를 보자는 것이었다. 가해자는 그때까지도 자신은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이놈의 ‘주취로 인한 심신미약’의 변명은 어찌 이토록 유구한지.) <단지 그대가…> 영화 속 가해자들처럼 먼저 남자에게 여자가 접근해 왔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두들겨 맞아 입술은 터져 있고 멍 자국도 역력한 피해자의 침대 앞에서 가해자의 가족은 이렇게 얘기했다. “때린 건 미안하다고 얘기했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성의도 보이는 거잖아.”

우리는 극도로 흥분했다. 한 친구는 자신이 감방에 가더라도 저 일가족을 곤죽을 만들겠다고 치를 떨었고 나 역시 그 심경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우리를 주저앉힌 것은 침대에 누워 있던 여자 후배의 눈이었다. 그렇게 해 달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러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병실 안의 누구보다도 분노해야 하면서도 그 분노를 욕지거리 한마디로라도 뱉어내지 못하고 고르지 못한 숨소리로만 그 속을 조율하던 후배의 눈망울이었다. 그날 우리가 가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또 거의 혼자서 그들을 감당해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공포감마저 솟았다. 그녀는 곧 건장한 두 남자에게 끌려가 남자의 혓바닥을 강요당했던, 그러고도 먼저 남자에게 ‘꼬리를 쳤다’고 행실을 의심받아야 했던 안동의 주부였다. 행여 이 사실을 부모님이 알까 경찰 신고까지 미루며 자신이 당한 고통을 홀로 삭이려고 기를 쓰고 있던 젊은 김부남이었다.

망연해진 우리는 피해자인 후배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만약 그래 달라고 한다면 문제의 가해자 녀석의 뒤를 밟아서라도 으슥한 골목길에서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패 줄 참이었다. 콩밥을 먹이겠다면 고교 동문이건 유치원 선배건 법조계 선배들을 찾아가 어떻게든 좀 혼내 달라고 드러눕기라도 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후배의 답은 쉽고도 어려운 문제였다. “사과요. 쟤가 자기 행동 인정하고 어제 저한테 와서 ‘네가 꼬리친 거 아니냐?’고 말한 그 어머니까지 제게 사과하는 거요. 그것만 하면 돼요. 그것만 하면 괜, 찮, 아, 요.” 나는 마치 칼로 무를 썰듯 딱딱 끊어서 씹어내듯 말하던 후배의 음성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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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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