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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2.06 19:18 수정 : 2013.12.08 17:09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94학번 새내기에게 ‘김일성 주석 사망’ 소식은 충격과 공포였다. 해태는 뉴스를 보다 고속버스를 놓칠 뻔했고, 빙그레도 학교에서 주워든 <한겨레> 호외를 보며 휴학 고민을 잠시 접어두었다. 그러나 충격은 짧았고 조문 문제를 둘러싼 공안 정국은 길었다. tvN <응답하라 1994> 화면 갈무리

[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⑨ 한여름의 전쟁 위기 (하)

1986년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등교 시간을 맞추기 위해 부리나케 문을 열고 달려 나가다 얼어붙은 듯 멈췄다. 집 앞에 떨어져 있던 호외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주먹만한 글씨로 이렇게 휘갈겨져 있었다. “김일성 총 맞아 피살” 죽었다? 김일성이 죽었다? 공산당은 무찔러야 하고, 의심나면 다시 보고, 수상하면 신고해야 하고, 반공 포스터, 반공 표어, 반공 글짓기, 반공 연설대회 등 반공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시대에 김일성이 총을 맞아 죽었다는 뉴스는 그야말로 머리를 꿰뚫는 충격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정작 평양 방송에서는 아무 언급이 없었다. 그리고 북한을 방문할 예정이던 몽골의 국가원수가 일정을 중지한다는 소식도 없었다. 구름 속을 걷는 듯 종잡을 수 없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몽골 국가원수가 방북하는 날이 왔다. 몽골의 국가원수에 한국 사람들의 시선이 그토록 집중된 일은 저 옛날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칸 이래 없었으리라.

그런데 김일성 주석은 멀쩡하게 나타났다. 사망설과 그와 관련된 모든 스토리들은 일순간에 봄볕 받은 눈처럼 사라졌다. 언론에서는 도대체 그 말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누가 그런 거짓말을 지어냈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해명도 없었다. 되레 조선일보는 “그들 수령의 죽음까지 고의적으로 유포하면서 그 무엇을 노리는 북괴의 작태”에 분노하며 “정상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집단”에다 오보의 책임을 돌렸다. 그리고 끝이었다.

서정원의 동점골과 남북정상회담의 겹경사 그로부터 8년 뒤 1994년, 가마솥더위가 온 나라를 덮고 있을 무렵, 우리가 월드컵에 열광하고 있던 그 뒤에서 월드컵 개최국 미국이 제 맘대로 전쟁을 결심했던, 그래서 미국인 소개령을 내리겠다고 한국 정부에 통보하던 즈음, 김일성은 또 한 번 대문짝만하게 지면을 장식한다. “미국 정부가 유엔에서 추진하고 있는 대북 제재를 중단한다면 북한도 핵개발을 동결하겠다는 제의를 받았다”는 카터의 전언이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머리 위에서 전쟁의 귀신이 떠돌고 있다는 것은 몰랐지만, 뭔가 불길한 상황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국면이 바뀌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북한을 단칼에 날려버리겠다고 결심하고 있던 클린턴 행정부는 카터가 자신의 합의 내용을 <시엔엔>(CNN)에 전격 공개해 버린 것을 계기로 그 합의를 받아들였다. 거기에 더해진 또 하나의 낭보, “김일성 주석이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김일성 주석은 “언제 어디서나 조건 없이”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고 했고 대한민국 정부는 즉각 이를 수락한다. 연일 지속되던 전설적인 94년 더위를 녹이는 시원한 소식이었다.

전쟁위기 고조되던 1994년 6월
남북정상회담 제의한 김일성
정부는 이를 즉각 수락했고
분단 뒤 첫 남북 정상의 만남에
7천만 겨레의 마음이 설레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김일성 사망과
조문 의사 묻는 민주당 의원 말에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환호는
좌경·빨갱이 규탄으로 바뀌었다

이날 각 신문의 1면은 이 놀랍고도 반가운 소식과 함께 미국 월드컵 첫 경기에서 강호 스페인을 상대로 막판 동점골을 넣고 환호하는 서정원 선수의 사진으로 장식됐다. 더 이상 기쁠 수 없다는 듯 눈 감고 입 크게 벌린 서정원 선수의 얼굴은 남북 정상회담 성사의 기쁨과 묘하게 중첩됐다. 드디어 분단 이후 수십년 만에 남북의 정상이 마주하게 된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남한의 김영삼 ‘대통령’이 만난다! 그간 ‘김일성’과 ‘김일성 주석’이 혼용되던 호칭들은 그즈음 신문에서 ‘김일성 주석’으로 대개 정리되었다. 전쟁의 기운은 멀리멀리 날아갔고 남북의 정상회담은 날짜까지 못박아 7천만 겨레를 설레게 했다.

아마도 김일성 주석에게 그 여름이 무척 힘들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세계 최강대국이 자신이 평생 다스린 나라를 없애겠다고 이미 칼을 뺀 상황. 해볼 테면 해보라고 방패를 쳐들긴 했지만 얼마나 긴장을 했을 것인가. 44년 전 전쟁에서 그 나름대로 ‘승리’했다고 자처했을지 모르나 미국의 위력을 처절하게 경험했던 그에게 또 한 번의 전쟁이란 죽도록 들이켜기 싫은 쓴잔이었을 것이다. 또 자신이 제안한 남북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한 고민도 많았을 것이다. 그즈음 그가 수령으로 좌정했던 공화국은 ‘고난의 행군’에 접어들고 있었다. 당시 진보적 시사월간지 <말>에 실린 기사 중에 김일성 주석이 남겼다는 절규가 기억에 남는다. “내가 다스리는 공화국이 어떻게 이렇게 됐단 말이냐.”

한반도가 찜통이던 7월 초, 김일성 주석은 묘향산 초대소로 향한다. 일부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그는 김영삼 대통령이 묵게 될 숙소를 일일이 점검했다 한다. 냉장고부터 에어컨까지. 그때 그의 나이가 여든셋이었다.

1994년 7월9일 나는 치사량의 술을 먹고 친구들과 의정부에 있는 선배 집에서 엎어져 자고 있었다. 겨우 눈을 뜬 게 정오 무렵이었다. 그 눈을 뜨게 했던 건 피시(PC)통신으로 뉴스를 보던 친구가 집 안이 울리게 쩌렁쩌렁 외친 한마디였다. “김일성이 죽었다!” 그 소리에 잠을 깬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앞서 말한 86년의 기억이었다. “장난하냐?” 하지만 친구는 단호했다. “북한이 발표했어. 김일성이 죽었어.” 여기저기서 시체처럼 자고 있던 사람들이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 컴퓨터 앞으로 오거나 텔레비전을 켰다. 사실이었다. 뉴스 속보가 난무했고 김일성 주석이 하루 전 7월8일 사망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죽었다. 김일성이 죽었다. 김일성 주석이 죽었다. 김일성 주석께서 돌아가셨다. 왜 이렇게 표현하냐고? 그때 내 주위 반응들이 그랬기 때문이다.

미국은 애도 성명 발표했지만…

1994년 7월8일 김일성 주석이 숨을 거둔 후, 이 소식을 받아들이는 남쪽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했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연일 예행연습에 여념이 없었던 김영삼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그 혹독한 94년 더위에 군화도 벗지 못한 채 며칠 동안이나 비상대기하며 “김일성 이놈은 끝까지 도움이 안 돼” 하며 이를 갈던 병사들까지. 수십년 동안 ‘괴수 김일성’으로서 그가 발산하는 사악한 카리스마에 짓눌려 있던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들의 기묘한 허탈함과 “흠 마침내 저 양반도 죽었군. 그럼 정상회담은 어떻게 되지?” 하는 어떤 이들의 심드렁함과 그리고 “주석님이 돌아가셨다”고 엉엉 울던 몇몇 대학생들의 애도까지. 모두가 그 크기가 달랐을 뿐이지 저마다의 ‘멘붕’을 경험하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한겨레> 독자 중에는 그런 분이 적겠지만, ‘김일성 주석에 대한 경의’에 대해 눈초리가 올라가는 분이 없기를 바란다. 일찍이 김수영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나는 1960년대에 김수영 시인이 쓴 절창에 동의한다. 언론자유란 그런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 시를 발표한다면 대번에 ‘종북’으로 몰려 경을 쳐도 대문짝만한 경을 이마에 칠 것이라 짐작되니, 53년이 지나도록 시인이 꿈꾸는 나라는 오지 않은 것 같다.

급작스런 김일성 주석 사망 소식이 전해진 후 미국 정부의 행보는 오히려 한국 정부보다 빨랐다. 클린턴 행정부는 김일성 사망 직후 “미국 국민을 대신해 북한 주민들에게 심심한 애도를 전한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북한 협상단과 대면하고 있던 로버트 갈루치 차관보는 북한 대사관을 찾았다. 그런데 정작 사망한 사람과 정상회담을 하고 손도 맞잡고 공동성명도 발표할 꿈에 부풀어 있던 한국 대통령의 정부는 그러지 못했다. 매우 ‘신중한’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이 어색한 상황에서 누군가 입을 열었다. 민주당의 이부영 의원이었다. 북한이 정상회담의 ‘연기’(취소가 아닌)를 통보해 왔다는 통일원 장관의 보고에 그는 이렇게 되묻는다. “이미 결정된 남북 정상회담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면…… 혹시 조문할 의사가 있는가?” 이 질문은 대한민국을 휩쓴 폭풍의 씨앗이 된다.

“수백만명을 죽인 전범은 조문해야 한다면서, 광주 사태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라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김일성은 실정법상 여전히 반국가단체의 수괴이다.” 이와 같은 여당 대변인의 반박에 이어 대한민국의 분위기는 무슨 변해라 뚝딱 도깨비방망이라도 맞은 듯이 표변했다. 상이군경들이 목발을 휘두르며 이부영 의원의 사무실을 습격했고, 국회는 물 끓듯 시끄러웠다. 그 가운데 기억나는 한 국회의원의 발언이다. “조문단 파견 주장에 다리 잘린 상이군인은 훈장을 반납하겠다고 하고 남편을 여읜 미망인은 국립묘지 비석을 붙잡고 울고 있다.”

아니, 훈장을 반납하겠다는 상이군인과 전몰군경 남편을 여읜 미망인은 남북 정상회담이 발표됐을 때는 어디 해외여행이라도 가 있었던가. 그렇게 상이군인과 미망인을 들먹이며 분통을 터뜨리던 의원의 손가락질은 또 한번 엉뚱한 데로 향했다. “국무총리는 어제 김일성더러 일곱번씩이나 ‘주석’이라고 했어요! 여기가 서울이야 평양이야.” 그 국회의원이 만약 방북단의 일원으로 참석하여 정상회담에 배석했더라면 “김일성!”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도대체 이 나라가 며칠 전의 그 나라였나.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을 하고 일관성 없는 말을 하며 까닭 없이 난폭해지는 것을 ‘광기’라고 부를 수 있다면, 당시의 분위기는 일종의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사노맹이건 주사파건 같은 독사들이다”

조문 파동은 대학가에도 밀어닥쳤다. 7월16일 “수배자를 검거하기 위해” 전남대학교를 압수수색한 경찰은 ‘김일성 분향소’를 발견했다. 대학가에서 대학생들이 김일성이 죽었다고 향불을 피우고 명복을 빌고 있었다? 이 사건은 가뜩이나 활활 타오르던 광기의 여름에 기름을 부었다. 그때 학생들은 사건 자체가 조작이라며 심지어 경찰이 “있지도 않은 분향소를 세웠다”고 경찰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학생들은 그 ‘고발’이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적인 예로 어느 대학 총학생회 간부였던 내 친구는 “제발 분향소 같은 것 만들지 마라. 다 털린다”고 ‘자주파’들에게 애걸복걸하고 있었는데 “그런 일 없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그들의 솔직하지 못함보다는 그들의 목을 겨눈 광기의 서슬이었다고 여긴다. 결국 그들을 낳았던 것은 조금만 자신과 다른 생각을 내보이면 용공에 좌경에 빨갱이로 몰았던 나라가 아니었겠는가. 정상회담을 한다고 환호해 놓고는 그를 조문하자고 하거나 조문한 이들을 하루아침에 천하의 죽일 놈으로 몰아 버리는 광기가 도리어 그들을 길렀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이 사실을 처절하게 증명한 이가 바로 서강대학교 박홍 총장이었다.

그분이 눈물까지 훔쳐 가며 ‘주사파의 준동’을 텔레비전을 통해 고발하던 날 역시 무더운 날이었다. 그분은 그 자리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많은 주장을 했다. 88년부터 94년까지의 모든 대학 총학생회장이 주사파였다. 전국에 주사파가 3만명이 넘는다. 심지어 운동의 족보가 달라도 많이 다른 남한의 사노맹(社勞盟)과 북한의 사로청(社勞靑)이 똑같은 족속이라고 선언했다.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기자에게 박홍 신부는 이렇게 외친다.

“사노맹이건 주사파건 살모사와 코브라의 차이다. 같은 독사들이다.” 대학가에 주사파가 많다는 박홍 총장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나 역시 그들을 격렬하게 성토했으니까.) 다만 그들이 ‘독사’가 아니라 사상의 자유 속에서 그들의 논리를 펴고 공박당할 권리가 있는 공화국의 시민이었다는 사실을 그가 망각했을 뿐이었다. 또 사람의 머릿속에 든 사상이란 박멸한다고 박멸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무엇보다 제 눈에 엇비슷한 사람들을 묶어세워 그 이마에 낙인을 찍는 행동이 얼마나 무서운 행동인지를 그는 알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그 후로도 끔찍한 ‘94년 더위’는 한참을 갔다. 많은 군인들이 한달 넘게 이어진 비상대기에 비지땀을 흘렸고 수많은 학생들이 ‘독사’로 몰려 곱징역이라는 여름 징역을 살았다. 그리고 ‘정상회담’까지 다가섰던 남과 북은 다시 불구대천의 원수로 돌아갔다. 죽은 김일성이 산 남한을 뒤흔들었다고나 할까.

94년 여름은 여러모로 기억하기 싫은 여름이다. 그 기록적인 무더위와 열대야의 행진과 그 사이를 관통했지만 거의 모든 대한민국 국민이 모르고 지나친 전쟁의 서슬, 그리고 정상회담이라는 반짝 기쁨과 김일성 주석의 죽음 이후 발동한 해묵은 광기와 증오의 폭발까지. 아들 녀석이 넋을 잃고 보는 <응답하라 1994>에서 상큼한 여학생이 경찰서 앞에서 운동가요 ‘바위처럼’을 부르며 신나게 율동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마침내 올 해방세상 주춧돌이 될? 해방세상? 뭘 해방시켜?” 그토록 귀엽고 앙증맞은 그녀도 박홍 총장의 눈에는 새끼 코브라로 보이지 않았을까. 20년 전 여름은 그렇게 독살스러웠다. 그런데 2013년의 겨울, 나는 왜 자꾸 그 더위가 기억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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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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