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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2.20 19:21 수정 : 2013.12.22 13:36

1995년 6월29일 저녁 6시, 서울 서초구 삼풍백화점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사고 직후 강남소방서, 서초경찰서 등 관내 행정 관공서의 전화가 시민들의 폭주하는 신고로 불통됐다. 관공서 관계자는 물론 취재기자들조차 이 소식을 믿지 못했다. 이 사고로 502명이 죽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⑪ 대참사의 소용돌이

1993년이 밝았다. 나라는 근 30년 만에 처음 맞는 민간인 출신 대통령의 정부, 즉 ‘문민정부’의 태동으로 정초부터 분주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구성됐고(이른바 ‘인수위’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이전의 노태우 대통령은 간략한 취임위원회로 갈음했다.)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를 지지한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새 정부의 순조로운 출발을 기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다짐과 기원의 마음이 가득한 1월7일 새벽 1시 반쯤, 화재 신고가 충북 청주 소방서에 접수됐다. 화재 장소는 청주시 상당구 우암동 주상복합건물 우암상가였다. 현장에 제일 먼저 도착했던 소방관 김기원은 떨리는 손으로 무전기를 들었다. “전 차량 전 직원 출동 바란다. 반복한다. 전 차량 전 직원 출동 바란다.” 청주 시내 소방관에 총동원령을 내릴 만큼 심각한 화재였다.

2시10분쯤, 소방관들과 옥상의 주민들과 주변의 사람들은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 펑 펑! 건물 안에 있던 액화석유가스(LPG) 가스통이 터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아무리 큰 화재가 일어나도 건물 골조만큼은 이상이 없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건만, 우암상가 아파트는 사람들의 비명을 아귀처럼 삼키면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어떤 어머니는 아들을 꼭 안은 채 콘크리트 더미에 파묻혔고, 어떤 소년은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있다가 창문 밖으로 자신의 부모와 두 형이 울부짖다 건물과 함께 사라지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다. 사망자 28명을 비롯해 사상자는 76명에 이르렀다.

구포역을 떠도는 귀신 소문

이 큰 사고를 사람들은 의외로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 후 대한민국을 연쇄적으로 덮친 대형 사고의 퍼레이드가 사람들의 기억력을 혼미하게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음은 3월26일의 구포역 무궁화호 전복 참사였다. 시속 85킬로미터 속도로 달리던 열차가 갑자기 땅이 꺼지면서 탈선해 레일 밖으로 튕겨 나가 휴지처럼 구겨졌다. 사망자 78명, 부상자 198명에 이르는 대참사였다. 땅이 꺼진 이유는 간단했다. 사고 지점에서 선로를 지하로 통과하는 지하전력구 공사를 했는데, 철로가 지나는 바로 아래에서 발파 작업을 했던 것이다. 즉, 수백톤짜리 기차가 사람 수백명을 싣고 100킬로미터 가까운 속도로 달리는 그 아래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렸다는 얘기다.

“밤차 타고 가는데 기차 창밖에 누군가 얼굴이 보이더라카이. 졸다가 기절초풍을 안했나.” 사고 직후 부산을 다녀온 친구의 말이었다. 그렇게 구포역 사고 지점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은 부산에선 꽤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하기야 78명이 떼죽음을 당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러나 그 슬픈 귀신들도 머지않아 사람들에게서 잊혀질 운명이었다. 이번에는 목포에서 비행기가 떨어진 것이다.

30년 만의 문민정부 출범 첫해에
청주 우암상가 화재로 28명 사망
구포역 열차 전복으로 78명 사망
목포 비행기 추락으로 66명 사망
서해훼리호 침몰로 292명 사망…

성수대교 붕괴·아현동 가스폭발
삼풍백화점이 앗아간 많은 생명
‘불도저’·‘설마’ 정신으로 무장한
고도성장이 만든 비극 속에서도
한줄기 희망의 빛은 살아있었다

7월26일이었다. 당시 전남 목포공항의 기상 상태는 비가 오고 안개가 끼는 등 불량했다. 오후 2시20분 서울을 떠나 목포에 착륙 예정이던 아시아나항공 733편 비행기는 착륙에 애를 먹고 있었다. 1차 시도 실패, 2차 시도 실패. 그쯤이면 다른 곳으로 기수를 돌렸을 수도 있으련만, 세번째 착륙을 시도하던 비행기는 목포공항 레이더망에서 사라졌고 인근 산자락에 추락한 채 발견된다. 66명이 죽고 40명이 다쳤다. 그야말로 겨울, 봄, 여름으로 이어지는 대참사의 연속이었다. 가을이라고 무사했으랴. 하늘과 땅에서 사고가 났으니 바다인들 무탈했으랴. 93년 10월10일 또 하나의 비극이 서해 바다를 덮친다.

그날 기상은 좋지 않았다. 바람은 초속 14미터로 불었고 2~3미터의 파도가 일었다. 그러나 서해훼리호는 뱃고동을 울렸다. 불안하기는 했지만 ‘설마’ 별일이야 있을까 싶었을 것이고 정원(221명)보다 141명을 더 태울 만큼 선착장을 메우던 이들이 내밀던 지폐의 유혹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무리한 운전을 거듭하던 배는 마침내 갑작스러운 키 조작 끝에 송두리째 뒤집어지고 말았다.

배가 뒤집힌 다음 구명조끼를 손에 넣은 승객들은 거의 없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천운으로 스티로폼이나 나무판을 움켜쥔 사람들이 파도에 휩쓸리며 구조를 기다렸다. 경찰 헬기는 30분 뒤, 구조선은 1시간 뒤에나 현장에 도착했다. 무려 292명의 생명이 차가운 바다에서 온기를 잃은 뒤였다. 멀쩡히 웃고 떠들고 낚싯대를 가늠하고 모처럼의 해상 데이트에 들떠 있던 남녀노소 292명이 수중고혼이 돼 버린 것이다. 그나마 70명이 구조된 것은 근처에서 사고를 발견하고 다급히 달려온 어민들의 초인적인 노력 덕분이었다.

춘하추동으로 수십명에서 수백명의 목숨이 사라지는 일이 그야말로 ‘비일비재’하게 벌어졌고 이는 사회적 트라우마를 낳기에 충분했다. “육해공 사고 다 났으니 이제는 지하철인가”라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하던 한 친구는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말이 씨 된다”는 격렬한 성토에 머리를 긁어야 했다. 또 사람들은 구포, 목포, (서해안) 격포에서 사고가 났으니 다음은 영등포 아니면 반포라는 등의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속으로는 섬뜩해했다. 그런 반응은 지극히 당연했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사건 사고들이 거짓말처럼 줄을 이었으니까.

‘꼬르륵’ 소리로 기억하는 그날의 사고

다음해인, 94년 10월에는 멀쩡하던 성수대교의 가운데가 뚝 동강나 강물 위로 떨어져서 32명이 죽었다. 그러더니 서울 주택가 한복판에서 폭음이 치솟았다. 아현동 가스 폭발 사고였다. 이 폭발로 죽어간 12명 중에는 내 지인도 있었다. 한창 활동하고 있던 통신동호회 회원의 오빠가 폭발 현장에서 작업 중이었던 것이다. 창졸간에 병원에 달려갔을 때 나는 매우 어리석은 질문을 하고 말았다. “어떻게… 시신은?” 대답하지 못하고 나를 쳐다보기만 하던 그 눈망울은 지금도 가끔 꿈에 나온다. 그녀의 오빠는 폭발의 진원지에 있었던 것이다.

다시 해가 바뀌어 1995년 여름, 또 하나의 초대형 사고가 한국을 덮친다. 이전의 모든 참사의 참혹함을 잊을 만큼 거대하고 무지막한 참사, 삼풍백화점 붕괴였다. 신입 조연출로서 서툰 손으로 열심히 테이프를 나르던 즈음, 갑자기 한 선배가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전했다. 무너졌다고 하니 그저 백화점 공사 현장에서 골재들이 무너졌나 보다 했다. 다시 업무상 발걸음을 재촉하던 중 티브이에 등장한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 앞에서 나는 그만 얼어붙어버리고 말았다. 그건 당시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사고 직후 강남소방서, 서초경찰서 등 관내 행정 관공서의 전화가 일시에 불통됐다. 시민들의 신고 전화가 폭주했기 때문이다. 관공서 관계자는 물론 취재기자들조차 이 소식을 믿지 못했다. “백화점이 무너지기는! 건물에 금 정도가 갔겠지.” 잠시 후 현장에 도착한 그들 모두는 할 말을 잃는다. 서울시장 선거가 갓 치러진 뒤라 조순 당선자도, 최병렬 서울시장도 현장으로 달려왔으나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넋을 놓고 펼쳐진 지옥도를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현장에 있던 한 여성 네티즌이 이동 단말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피시(PC)통신 게시판에 상황을 상세히 올렸는데 그가 올린 짧은 글 하나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최 시장 울어요. 최병렬 시장 울어요. 너무 기가 막힌가 봐요. 아무 말도 안 하다가 눈물만 흘려요.”

최틀러라는 별명으로,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인상이던 최병렬 서울시장이 속절없이 눈물 바람을 할 만큼 현장은 끔찍했다. 건물 붕괴의 내막은 더 기가 막혔다. 삼풍백화점 이준 회장은 애초에 아파트 단지의 상가로 설계된 시설을 백화점으로 변경할 것을 요구한다. 시공사 우성건설은 붕괴의 위험이 있다며 이를 거절했고, 이 회장은 자신의 회사인 삼풍건설에 이 일을 맡긴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탐욕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공유되는 것이 어디 있으랴. 원래 설계상 기둥의 둘레는 32인치였지만 실제로는 23인치로 줄었다. 그 다이어트(?)의 대가는 다들 알아서 챙겨 드셨다. 이미 그 전에 천장이 내려앉고 바닥이 꺼지고 전기가 나가는 등 위험 징후가 나타났는데도 이준은 “칸막이를 치고 영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준의 말은 아니지만 그때 간부회의에서 나왔다는 말은 치를 떨게 한다. “하루 매상이 얼만데.”

서울 시내 모든 구조인력이 삼풍으로 총집결했다. 일손이 모자란다는 소문에 자원봉사자도 줄을 이었다. 흙 속에 건물 더미 속에 묻힌 사람들을 위해서 땅 위의 사람들은 죽을힘을 다했다. 장비도 경험도 부족했다. 당장 건물 더미 지하에서 불이 나자 이를 끄기 위해 물을 뿌려야 하느냐 마느냐 갈팡질팡했고 사람들은 땅속에서 속속 죽어갔다. 사망자는 무려 502명. 끝내 시신을 찾지 못한 사람이 6명이었다. 이 절벽 같은 현실에서도 기적은 일어났다. 보기만 해도 숨이 멎을 듯한 건물 더미 속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11일 만에 최명석씨가, 사고 13일 후에는 유지환씨가, 장장 16일 뒤에는 박승현씨가 구조됐다. 그들은 모두 지하 1층 매장에서 일하던 젊은이들이었다.

그 기적의 생환자 가운데 한 사람을 나는 어깨너머로 만났던 경험이 있다. 일반인과 함께 외국을 여행하는 형식의 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한 선배가 이스라엘 여행자로 삼풍의 생환자 가운데 한 명을 섭외했던 것이다. 다음은 그 선배의 기억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보통 청년이었어. 그렇게 큰일을 겪은 것 같지도 않았고. 촬영 내내 사고 얘기는 하지 않았어. 나도 구태여 꺼내지 않았고. 그런데 한 이스라엘 청년을 만나게 되는데 이스라엘 청년이 그런 말을 해. ‘자기는 죽음을 항상 곁에 두고 산다’고. 자기 친구 가운데에도 테러로 죽은 사람이 있고 전투하다가 전사한 사람도 있다는 거지. 그런데 그 얘기에 걔가(생존자가) 민감하게 반응하더군. 그 마음이 이해가 간다는 거야. 그날 밤 처음으로 내게 사고 얘기를 했어.

걔는 사고를 청각으로 기억하더라고. 청각! 듣는 거 말이야. 하기야 사고 나고 파묻혔을 때 뭐가 보였겠니. 그런데 처음에는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살아 있었대. 얘기도 나누고 서로서로 힘내라고 응원도 하고. 그런데 점점 그 소리가 줄어갔다는 거지. 언젠가는 갑자기 위에서 물이 쏟아지더래. 건물 더미 지하에서 난 불을 끄려고 지상의 소방차가 물을 뿌린 거지. 그런데 자기보다 아래에 있던 사람이 이렇게 말을 계속하더란다. ‘물이 차올라와요’ ‘허리까지 찼어요’ ‘그쪽은 꼭 살아 나가세요’ 그리고 ‘안녕’까지. 그다음은 꼬르륵, 꼬르륵 물속에서 사람이 숨이 막혀 가는 소리였단다. 자기는 그 소리를 평생 못 잊을 거라고.”

군사정권 끝·문민정부 시작의 신호탄 ‘와우’

그렇게 생과 사는 갈렸다. 장담컨대 1993년에서 1995년까지의 기간 동안, 대형 참사로 죽어간 사람들의 수는 그 위험하다는 이스라엘에서 테러로 죽어간 사람들보다 많을 것이다. 도대체 왜 그 시기에 상상을 뛰어넘는 대형 사고들이 정신을 못 차릴 만큼 빈번하게 대한민국을 덮쳤던 것일까. 그것은 일종의 자업자득의 총결산이었다.

화재 후 몇십분 만에 무너져 내린 우암상가아파트가 있던 우암동의 원래 이름은 와우동이었다. 이름이 바뀌지 않았다면 우암아파트는 ‘와우아파트’였을지도 모른다. 와우아파트? 어디서 많이 들어 봤다 싶을 것이다. 바로 1970년 4월8일 새벽, 곤한 잠을 자고 있던 사람들을 품고 와르르 무너져 내린 서울의 아파트 이름이다.

와우아파트는 한창 고도성장의 드라이브를 걸던 시기, 불도저라는 별명의 서울시장 김현옥이 9만가구를 입주시킨다는 야심찬 계획의 일환으로 지은 아파트들 가운데 하나였다. 불도저 시장의 뜻은 가상했으나 ‘불도저’에 ‘괜찮아 정신’과 ‘설마 정신’, 그리고 ‘사바사바 정신’에, ‘안 되면 되게 하라’ 구호까지 장착된 것이 문제였다.

지질 검사도 하지 않고 철근을 날려먹고 급격한 경사로에 아파트를 세우면서 기둥까지 빼먹은 끝에 와우아파트는 무너졌고 33명의 생목숨을 앗아가고 말았다. 바로 그 ‘와우’의 이름이 군사정권의 끝물과 문민정부의 여명에 대형 사고의 신호탄으로서 다시 출현한 것이다. 우연치고는 기묘하지 않은가.

와우아파트에서 위력을 과시했던 ‘설마’는 달리는 철로 밑으로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게 했고, 공무원들로 하여금 ‘사바사바’를 통해 그를 허가하도록 만들었다. ‘괜찮아’의 여유(?)는 배에다 정원을 141명 초과하는 사람들을 구겨 넣게 했으며,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의 호기는 비행기 조종사로 하여금 안개 속에서 세번의 착륙 시도를 하도록 강요했다. 결정적으로 이 모두는 “하루 매상이 얼만데 영업을 포기해?” 하는 탐욕의 지배 아래 있었고 수백명의 생명을 거둔 마수(魔手)가 되어 우리의 90년대 일부를 무너뜨리고 폭파시키고 깔아뭉갰던 것이다.

돌아보기도 싫지만 나는 그 탐욕의 야만이 불러온 지옥의 진창에서도 오롯이 빛나던 희망들의 기억 또한 간직하고 있다. 서해훼리호가 가라앉을 때 일제히 비상 무전을 타전하며 현장으로 모여들어 70명의 소중한 목숨을 구했던 어민들, 어떻게든 시신이라도 수습해 보겠다며 바다 바닥을 긁고 뒤져 사망자 292명 모두를 건져낸 사람들, 일손이 달린다는 소식에 자기 일을 작파하고 삼풍백화점 현장에 달려와 구조작업을 도왔던 시민들이 그것이다. 언젠가 삼풍 현장에 있었던 소방관을 만났을 때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살았다 살아 있어!’ 이 한마디만 들으면 나도 모르게 짐승같이 소리를 질렀어요. 구해 나올 때는 그냥 엉엉 울었어요. 그냥 미치도록 좋아서. 제발 살아만 있어라 내 목숨 걸고 구하겠다. 그런 마음이었어요.”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렇게 많은 마(魔)가 낀 역사 속에서도 대한민국은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고 버텨 왔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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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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