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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2.27 19:17 수정 : 2013.12.29 14:47

1998년 새해는 나라의 금고가 텅 비어 무척 추웠다. 텅 빈 금고를 채운 것은 집집마다 장롱 속에 모아둔 작은 금붙이였다. 문경은, 정은순, 신진식, 김세진 등 스포츠 스타들도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⑫ 금 모으기 운동

현재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는 ‘대자보 열풍’의 시작이라 할 고려대생 주현우씨의 대자보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1997~98년도 IMF 이후 영문도 모른 채 맞벌이로 빈집을 지키고” 아마도 맞벌이를 나가야 했던 부모님 대신 빈집을 밤늦게까지 지켜야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 것이리라. 그때는 그렇게 별안간 맞벌이를 해야 했던 집이 많았다.

1997년은 개인적으로 내가 결혼했던 해다. 일복이 터지던 즈음이라 달콤한 신혼 생활은 그다지 기억에 없지만 그래도 세상은 장밋빛이었다. 보너스는 풍성하게 나왔고 월급은 해마다 올라 그해에도 소급분을 현금으로 챙겨 아내 몰래 요긴하게 비상금으로 썼다. 하지만 좋았던 시절은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물론 다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한보, 삼미, 진로 등 유수의 기업들이 연속부절로 나가떨어졌고 회사에서도 ‘비상대책회의’가 열려 제작비 절감을 독려했다. 그 ‘비상대책회의’를 여의도 호텔을 빌려서 했으니 위기감이 턱밑까지 치오르기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내 재계 8위이자 한국 자동차 생산의 양대 산맥이던 기아그룹이 두 손을 들었을 때 ‘충격과 공포’의 파괴력은 대단했다. “이러다가 나라가 망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말한 사람은 내 선배 피디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은행의 하루를 보여준 ‘눈물의 비디오’

겨울의 초입이던 1997년 11월21일 대한민국 경제부총리 임창열은 국제통화기금(IMF·아이엠에프)에 구제금융을 신청했음을 공식적으로 밝힌다. 그 발표를 하던 임창열 부총리의 얼굴은 화석처럼 굳어 있었다. 무언가 큰일이 닥쳤다는 것은 알았지만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음주 방한하는 아이엠에프 대표단이 무엇을 요구하고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예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사람들 위로 아이엠에프의 폭풍은 인정사정 돌보지 않고 밀어닥쳤다. 기업들이 무너지고 은행들이 도산했다. 수많은 주식들이 휴지 조각이 됐고 허다한 가장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IMF가 I’m fired(나 해고됐다)의 약자라거나 I’m a failure(나는 실패작이다)의 약자라고 하는 웃기지도 않은 농담들이 오가는 가운데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의 눈에는 핏발이 섰다.

“회사 창업 이래 사장님 차 몰았던 기사님이 계셔. 연세도 많으시고 부장님, 부장님 그랬는데 해고되셨어. 마지막 인사를 드린다고 사무실을 도시는데 다 울었어. ‘애들이 고등학생 대학생인데 어떡해요?’ 그렇게 물으니까 ‘저만 그런가요’ 하면서 웃으시는데 그게 더 슬프더라고.” 어느 날 저녁을 먹다가 아내가 훌쩍거리며 들려준 이야기였다. 폐쇄되는 어느 은행의 지점의 하루를 담담하게 담은 동영상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어떤 자는 남고 어떤 이는 떠나야 하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영상 속의 은행원들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한 여성 은행원이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이는 대목에서는, 이 영상을 보던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눈물의 비디오’라던가.

“정말 저도 10여년 동안 근무하면서 열심히 일했고요. 남아 계신 여러분들 똘똘 뭉쳐 가지고 진짜 좋은 은행으로 다시 살아나시기 바랍니다. 우리 은행 직원분들은 다들 똑똑하신 분들이니까.”

죄라고는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 많은 사람이 벼랑 끝으로 내몰렸고 가슴 아프게 떨어져 내렸다. 6·25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는 표현이 조금도 과장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압록강을 건넌 지 3일 만에 서울에 이른 병자호란 당시의 청나라 군대처럼, 아이엠에프는 빠르고도 신속하게 대한민국의 일상을 함락했고 중국의 몇천만 인구의 머리를 강제로 깎고 변발을 시켰던 만주족같이 우악스럽고 강력한 손길로 한국인들의 ‘체질’을 개선하려 들었다. 누구도 거기에 저항하지 못했다. 미셸 캉드쉬 아이엠에프 총재가 외교 관례에 어긋나게도 “대통령은 물론 대통령 선거 운동 중인 3당 후보 모두의 이행 각서”를 요구하는 모독적인 언사를 입에 담았음에도 이를 받아들여 재정경제원 차관이 여야 후보들의 사인을 받아 오기 위해 동분서주하기까지 했으니 더 보탤 말이 없겠다.

1997년 11월21일 대한민국은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 신청
기업은 문 닫고 은행은 도산하고
보통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전대미문의 국난 속 국민들은
나라를 구하자며 금을 모았다
돌반지와 목걸이는 쌓여갔지만
부유층의 참여는 조촐했고
경제위기 책임은 묻지 못했다

아이에게 사 준 <만화 조선왕조실록>(박시백 지음)을 훔쳐 읽다 보니 그런 대목이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의 봉기를 설명하면서 저자는 이런 표현을 썼다. “적잖은 이들이 창의의 깃발을 들었고, 나라로부터 받은 은혜도 없으면서 위기가 닥치면 떨쳐 일어나는 독특한 유전자를 가진 민중들이 화답하여 일어나 싸웠다.” 1997년의 아이엠에프 경제 위기라는 이 전대미문의 국난 속에서도 이 ‘독특한 유전자’는 여지없이 발휘됐다. 바로 금모으기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시발에 대해 여러 설이 엇갈린다. 새마을부녀회 중앙연합회는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발표를 하기도 전, ‘애국가락지 모으기 운동’을 선포했던바, 이것이 금모으기 운동의 시발이라는 주장도 있고, 어느 기자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얘기도 있고, 어떤 시민이 새마을운동본부 등에 금모으기를 건의한 것이 시발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누가 먼저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들어올려진 봉화가 대한민국 전체가 일렁이는 불길로 번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장롱 속에서 잠자던 금을 모아 수출하여 외환 위기를 극복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많았다. “환율 폭등으로 가뜩이나 금 들여오기가 어려운데 들어온 금마저 내다 팔면 어떡하냐”는 것이다. 일부 경제 전문가들은 지금이 전시도 아닌데 마지막 지불 수단을 소진하는 것이 옳은가를 물으며, 장차 금 부족 현상으로 금 파동이 올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귀금속 업체들은 도산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울상이었고 은행들도 처음에는 금모으기를 주관하는 일을 꺼렸다. 그러나 일단 불이 댕겨진 한국 사람들의 ‘애국심’은 그야말로 쓰나미처럼 전국을 휩쓸었다.

애들 돌반지를 꺼내 온 예는 너무 흔해서 뉴스거리도 안 됐고 장기근속 기념품인 메달이나 황금 열쇠 같은 것들도 무더기로 쌓였다. 어떤 금은방 주인은 가게에 있던 6천만원어치의 순금을 무더기로 내놔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도 금반지를 내놨고 재외동포들까지도 팔을 걷었다.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에는 충칭(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관리하는 중국인 직원 16명이 중국 일반 근로자들의 1년 연봉에 해당하는 1천달러를 모아 왔다. “한국의 금모으기 운동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대사관 관계자들도 목이 멨다. “거기는 한국 사람들이 별로 가지 않아 입장료 수입도 없는 편인데, 중국 사람들이….” 심지어는 북한 사람들도 가세했다. 러시아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는 한국 방송사에 그의 피땀이 뚝뚝 떨어지는 달러를 보냈다. “북녘 동포들에게 혈육의 동포애적으로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보내 주는 남조선 인민들에게 뜨거운 고마움의 인사를 보냅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그저 앉아서 받기만 하기에는 마음이 부끄럽습니다. 입쌀떡을 얻어먹고 강냉이떡이라도 갚아드려야 마음이 편합니다.” 그렇게 모인 금이 석 달 동안 225톤이었다.

금거북이 내놓고 후다닥 도망간 아저씨

금모으기 운동의 열기가 휩쓸고 간 뒤 나는 뜻밖의 임무를 받았다. ‘새마을금고’에서 전국 지점에서 벌인 금모으기 운동 홍보물을 만들고 싶다 하니 그걸 해 보라는 명령이었다. 평소 같으면 입이 댓발은 나올 일이었지만 ‘때가 어느 때라고’ 그런 무엄한 행동은 상상할 수 없었기에 나는 자료를 모으고 촬영을 나갔다.

새마을금고 쪽에서 제시한 촬영 장소는 인천의 어느 새마을금고였다. 어차피 주요 그림은 자료 화면을 가져다 써야 했고 취재라고 할 것은 그저 직원들의 인터뷰 정도였다. 촬영을 마치고 직원들과 환담을 나누는데 한 신입 여직원이 들뜬 목소리로 자신의 기억을 전해 주었다. 말투로 보아 경북 출신 여직원이었다.

“한번은 노숙자 차림의 아저씨가 오셨어예. 뭐 하러 오셨습니까 계속 물어봐도 머뭇머뭇 말은 안 하고 그냥 서 있더라고예. 그래 내가 짜증을 좀 내면서 ‘뭘 도와 드릴까요’ 물었어예. 그런데 그 아저씨가 나지막하게 말하더라고예. ‘도움을 받으러 온 게 아니고 도와 보려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금거북이 작은 거를 내놓는 기라예. 금값 받아 가시라 하니 안 받으시고 그거는 헌납하는 겁니다 하고는 막 뛰어나가시더라고예. 저는 애국심 같은 거 모르거든예. 그런 말 하고 싶지도 않고예. 근데 그 아저씨 뒷모습 보면서 막 가슴이 뛰고 눈물이 나는 거라예. 뭉클해지고 부끄럽고.”

금모으기에 동참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회사에서 반강제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금을 내놓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교육청에서 금모으기 운동 참가 인증을 요구했다가 취소한 해프닝처럼 ‘강요된 미덕’의 요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다수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몫을 나라에 내놓은 ‘의병’들이었고 자신들이 내놓는 금이 국난 극복에 소용되리라 믿었고 믿고 싶어했다. 금거북이를 내놓고 후다닥 도망가 버린 노숙자 아저씨처럼, 그 뒷모습을 보면서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을 그렁거렸던 새마을금고 여직원처럼.

흔히들 사람들은 이 금모으기 운동을 한 세기 전 벌어졌던 국채보상운동에 비교한다.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 역시 98년 벽두의 금모으기처럼 요원의 불길로 전국을 휩쓸었다. 숯장수들이 나무 팬 돈을 모아 기탁했는가 하면, 갑오경장 이후 사람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사람 취급 못 받던 백정도 고기 판 돈을 보탰다. 장애인이었던 거지가 20전을 내놓아 사람들을 울리기도 했다. 하와이에서 짐승 취급 받으며 일하던 동포들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닥을 쓸고 다니던 한인들도 돈을 모아 보냈다. 금모으기 운동의 판박이였다.

비슷한 점은 더 있었다. 국채보상운동 당시 가장 참여가 미약했던 것은 국난을 자초했던 황제와 그 밑의 신하들이었다. 고종 황제는 ‘금연’으로 운동에 동참하기는 하셨으나 그뿐이었다. 보유하고 있던 막대한 내탕금에는 손대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나마 운동에 동참하기는커녕 “그걸로 빚을 갚을 수 있다고?” 하며 코웃음을 치거나 비난 일색이었던 그 밑의 신하들보다는 낫다고 해야 할까. 아이엠에프 금모으기 운동에서도 그랬다. 평생 덜 먹고 덜 쓰고 덜 자며 먹고살기 위해 애써온 동네 사람들이 다투어 줄을 선 반면 부유한 지역의 참여는 눈에 띄게 조촐했다. 돌반지, 장기근속 메달, 18K 목걸이는 산더미처럼 쌓여갔지만 정작 귀한 분들의 장롱 속에 있었을 ‘골드바’는 가뭄의 콩이었다. 심지어 부유층의 참여를 독려하고자 그 출처를 묻지도 않겠고 탈세 여부를 추궁하지 않겠노라고 정부가 공언까지 했지만 거기에 대한 호응은 미미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공통점은 문제를 해결해 보겠노라고 나선 의기는 하늘을 찌르고 땅을 흔들었으나 그 문제를 불러온 이들에 대한 책임 추궁은 빈약했다는 것이겠다. 국민들은 열띠게 일어서 국난 극복을 위해 매진했으나 누가 국난을 불렀는지에 대한 의문은 철저하게 배제됐던 것이다.

국채보상운동이 일제의 방해와 금품을 둘러싼 잡음으로 허무하게 마무리됐던 것처럼 금모으기 운동의 현실도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나라를 살리겠다는 마음에 제값을 받는 것인지 확인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비싼 값에 금을 수입해 싼값에 외국에 재수출하고 있었다. 최근까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금모으기 운동 과정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재벌그룹 종합상사들이 그 장본인들이다. 이뿐만 아니다. 금모으기 운동 자체에도 작다고 할 수 없는 시행착오가 많았다. 국제 시세를 훨씬 밑도는 헐값에 팔렸는가 하면, 국내 금 유통업 종사자의 절반이 실업자 신세가 됐다.”(<한겨레21>, 1998.5)

“새해 복 많이 쟁취하시라”

우리 역사는 항상 그랬다. 앞서 말했듯 “나라에게 받은 은혜라고는 없는 사람들”이 나라의 위기를 위해 떨쳐 일어섰지만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동참은커녕 그 뒷전에서 딩가딩가 거렸다. 심한 경우는 자신들의 허물을 의로운 사람들에게 뒤집어씌웠으며 국난을 부른 책임은 한 번도 제대로 물어진 적이 없었다. 가까이는 국채보상운동이 그랬고 멀리는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서글픈 최후가, 몽골 침략 때 죽을힘을 다해 성을 지켜 놨더니 피난갔던 양반들에 의해 은그릇 도둑으로 몰렸던 천민들이 그랬다. 그렇다고 해서 대의를 위해 일어서고 정의를 향해 돌진하고 국난에 맞서 용기를 잃지 않았던 이들이 뿜어내는 빛의 크기는 줄어들지 않는다. 오늘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 나라의 정체(政體)라 할 민주공화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외침이 드높은 즈음, 전국을 수놓고 있는 ‘우리는 안녕치 못합니다’의 대자보들은 “도움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도우러 왔습니다”라고 머뭇머뭇 말하던 어느 남루한 남자의 소심한 결의와 얼마나 다르겠는가.

1997년 세밑,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라고 탄식하던 한국인들은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야!”라고 어깨를 으쓱할 수 있는 ‘뜨거운 겨울’을 만들어 냈다. 그러고 보니 요즘도 그 말을 많이 쓰고 있지 않나?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여기에 나는 일간 보았던 영화 <변호인>의 대사로 대답해 보고 싶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는 국민입니다.” 우리가 국가다. 우리가 대한민국이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대한민국’에게 인사를 전한다. 백무산의 시구절이다. “새해 복 많이 쟁취하시라.” 복이든 화든 누군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드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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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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