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4.01.03 18:43 수정 : 2014.01.03 21:22

일본식 가라오케는 영상, 음악, 가사까지 동시에 나오는 한국의 노래방으로 변이했다. 노래방이 처음 등장한 1991년 한 해에 1만여개의 노래방이 생겨났다. 91년 이후 한국에 머문 사람 가운데 노래방에서의 에피소드 하나 없는 사람 있을까. 1996년 서울의 어느 노래방.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⑬ 노래방의 부흥

1991년 가을이었나. 부산 고향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날 밤 아버지와 어머니가 머리를 맞대고 긴한 상의를 하고 계셨다. 사업을 접을 준비를 하시던 아버지는 뭔가 좋은 새 아이템이 나타난 듯 말씀에 열기가 묻어났다. “될 것 같다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그런데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셨다. “나는 싫어요. 유흥업 같아서. 그런 장사에서 술이 안 따라갈 수 있어요? 결국 술장사가 될 건데.” 한방울도 입에 못 대시는 아버지와 달리 술이라면 귀가 번쩍 뜨이는 아들이 조심스레 무슨 일인지를 여쭈었으나 “들어가서 잠이나 자!” 소리만 들어야 했다. 끝내 아버지는 어머니를 이기지 못하셨고 새 사업 아이템은 남의 얘기가 됐다. 아버지가 조심스레 들고 오셨던 아이템은 ‘노래연습장’이었다.

노래방 1호는 부산의 ‘하와이비치 노래연습장’

부산은 한국 제2의 도시다. 문화적인 면에서도 그 정도의 위상을 지니고 있느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할 듯싶다. 적어도 90년대에는 확실히 그랬다. 영화만 해도 서울에서 꽤 문제작 소리를 듣는 영화들이 부산에서는 개봉도 못하거나 파리만 날리다가 내려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부산의 극장 간판은 싸구려 홍콩 액션영화들로 채워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볼 때 부산은 문화적 선진(?) 도시였다.

일본이 가까워 안테나 하나만 달면 일본 방송을 쉽게 접할 수 있었고, 관광객들은 물론 학교들끼리의 자매결연 등과 같은 다양한 교류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70년대 이래 방송 개편 철만 되면 서울의 방송사 피디들이 일본 방송 포맷을 보기 위해 출장을 와서 들입다 텔레비전만 보다가 돌아가기도 했던 곳이 부산이었고 바다 건너 벌어지는 일본 프로야구를 보며 야구의 눈높이를 키운 것이 부산이었다. 그렇게 흘러들어온 문물 중에 ‘가라오케’가 있었다. 일본말로 ‘공’(空)인 ‘가라’와 오케스트라의 준말인 ‘오케’의 합성어다. 가수의 노래를 빼고 합성된 기계음 반주를 틀어 노래 부르는 이를 도와주는 시스템을 말한다.

과거 술 한잔 한 뒤 노래를 부르려면 ‘밴드’를 불러야 했지만 밴드는 비용 부담이 컸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선술집에서 젓가락 두들기며 두만강 푸른 물에서 노를 젓거나 소양강 처녀를 부르짖는 것으로 노래에 대한 욕구를 해소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그럴듯한 반주를 흘려주는 ‘가라오케’가 등장했다. 1980년대 부산에만 2000곳이 넘는 업소가 들어섰고 이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밴드보다 저렴할 뿐 접대와 술판이 따르는 가라오케도 그 부담이 만만치 않았고, 영상, 음악, 가사가 동시에 지원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던 중 1991년 4월 부산에 살던 한 화교에 의해서 가라오케의 한국적 변이가 이룩된다.

부산 동아대학교 앞에서 로얄 전자오락실을 운영했고 컴퓨터에 일가견이 있던 형충당씨는 아싸전자의 가라오케 기계를 개조해 번호를 눌러 자신이 원하는 노래를 선택하고 화면에 흐르는 자막을 보며 노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형씨는 오락실 한켠에 1.6평짜리 공간을 조성하고 그곳에 들어가 기계에 300원을 넣으면 노래 한곡을 부를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이 한국형 노래방의 시초라고 한다. 1.6평의 관 같은 노래방. 그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눈이 부실 만큼 창대하게 된다. 아싸전자가 형충당씨의 기술을 도입했고 음악과 함께 새까만 화면에 가사 자막만 또르르 흐르는 형태의 원시적인(?) 노래반주기가 등장한다.

한국 최초로 첫 등록업체가 된 노래방은 부산 광안리의 ‘하와이비치 노래 연습장’이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 신종 여흥 기계의 유행은 케이티엑스(KTX)보다도 빨리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년 사이에 1만여곳의 노래방이 생겼다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초기 노래방에 투자했던 사람들은 이른바 대박을 맞았다. 내 부모님이 노래연습장 사업을 두고 옥신각신하시던 것이 91년 가을이었으니 그 사업을 시작하셨다면 필시 나는 대박집 아들이 되어 취직 걱정은커녕 유유자적 한세월 즐기는 한량으로 ‘이대로!’를 외치고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지금 40대라면 누구나 노래방에 처음 갔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 들어가서 “이거 어떻게 하는 거냐?”고 조심스런 손길로 노래 안내 책장을 넘기고 동전을 딸깍 넣고(초기는 다 코인제 노래방이었다) 더듬더듬 번호를 누른 뒤 흘러나오는 단조로운 반주에 맞춰 어색하게 노래 부르고, 마이크에 실린 자신의 목소리에 감탄 또는 좌절하던 그날의 풍경을. 그런데 새로움에는 반드시 저항이 있게 마련이다. 열풍처럼 번지는 노래방의 유행에 반기를 든 세력들도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그때까지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하던 학생운동권이었다.

“노래방 갔다 왔다고 반성문도 썼다”

1991년 부산대학교 총학생회가 학교 근처의 노래연습장 등 ‘왜색문화’를 고발하는 사진전을 개최했고 다른 대학의 학생들도 대학가에 홍수처럼 밀어닥치는 노래방에 각을 세웠다. “노래방은 왜색 풍조이며 소비 향락을 조장할 뿐만 아니라 건강한 학생들의 예술적 감수성을 열린 공간에서 발산하는 대신 한평반짜리 폐쇄적인 공간에 가둠으로써….” 당시 학생회에서 배포한 문건의 한 대목이다. “93학번 동기들끼리 노래방 갔다 온 걸 걸렸는데 선배들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책상을 치고 난리가 났다.” “노래방 갔다 왔다고 반성문도 썼다.” 거짓말 같지만 이번 송년회 시즌에 주워들은 실제 경험담들이다.

돌이켜보면 당시 학생운동권은 끊임없이 금지곡을 양산하고, 자신에게 거슬리는 문화를 차단하려던 군부독재와 닮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군부독재 정권이 ‘왜색가요 금지와 건전가요 육성’ 정책을 펼쳤던 것처럼 운동권 역시 노래방, 록카페 등 왜색 향락 문화를 극복하자는 ‘새생활운동’을 벌였고 노래방 가서 노래를 부르는 후배들에게 눈을 부릅떴다. 변화를 수용하기보다는 과거의 논리에 갇혀 일종의 문화 지체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어쨌든 그런 외로운 저항(?)은 머지않아 무력화됐고 노래방 열풍은 거침없이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어른들은 말할 것도 없고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노래방 청소년 출입금지 조처를 해제하자 청소년들과 어린아이들까지도 대거 노래방으로 몰려들었다.

노래방의 진화도 눈부셨다. 시커먼 화면에 자막만 흐르던 모니터에는 아름다운 풍경 사진이 등장했다가 금세 화려한 영상으로 바뀌었다. 반주 역시 단조로운 멜로디의 차원을 넘어 실제 연주에 가까운 음원들이 업그레이드됐으며, 노래하는 사람 스스로를 가수로 착각하게 만드는 우아한 코러스의 향연이 펼쳐졌다. 버튼 몇 개가 전부이던 초기 노래방은 컴퓨터 자판 수준의 형형색색의 버튼들이 수놓인 리모컨으로 진화했고, 없는 노래투성이였던 빈약한 노래 목록은 ‘그날이 오면’이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유의 민중가요까지도 망라하는 괴력을 발휘하며 사전처럼 두꺼워졌다. 작고한 이규태 선생이 “한국인의 보편적 기질로 정착, 좁아지는 글로벌 사회에 한국인의 개성으로 부각되고 있다. 중국 음식집 없는 고을은 많아도 노래방 없는 고을은 없으며 세계 구석구석 수십명의 한국인만 있으면 맨 먼저 생기는 것이 노래방이라고 들었다”고 말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선술집에서 젓가락 두들기며
소양강 처녀 부르던 한국에
그럴듯한 반주 흘려주던
일본 가라오케가 나타났고
노래방이란 이름으로 인기 얻어

학생운동권은 ‘왜색문화’라며
눈을 부릅뜨고 비판했지만
거친 주정과 기묘한 탈선 아니라
기쁨 나누고 슬픔 씻어주는
수백만곡의 노래가 터져나왔다

회사 1차 회식이 끝난 뒤 당연히 가게 된 곳도, 명절날 차례를 끝낸 저녁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유치원 다니는 손자까지 함께 찾는 곳도, 시작하는 연인들이 첫 키스를 나누는 가장 일반적인 장소도, 시험 끝난 청소년들이 고래고래 악쓰며 스트레스 푸는 공간도, 실연당한 젊은이들이 노래 부르다가 펑펑 울어 버리는 곳도, 그룹미팅 한 대학생들이 어색함을 떨쳐 버리는 놀이터도 모두 노래방이었다. 그것은 슈퍼스타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이 시대의 가왕 조용필은 1994년 결혼한 아내와 함께 즐겨 동네 노래방을 찾았고 몇 년 후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터질 것 같은 슬픔을 노래방에서 토해냈다고 한다. 처제 안진영씨의 증언이다. “언니가 좋아했던 노래라면서 ‘그 겨울의 찻집’ ‘산장의 여인’ ‘언체인드 멜로디’를 부르면서 형부가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모두 눈물바다를 이뤘어요.”

오래전 나는 이제는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진 서울 구파발 진관내동에 있던 한 낡은 만두집을 촬영한 적이 있다. 인근 초등학교 수업 끝날 때가 되자 아이들이 몰려든 가게는 떠나갈 듯 시끄러웠다. 재잘재잘 참새 떼처럼 지저귀는 수다를 간신히 끊고 초등학교 4학년이라는 한 아이에게 이곳을 언제 알았냐고 물었을 때 녀석의 답이 지극히 맹랑했다. “옛날부터 알았어요!” 출생신고에 잉크도 마르지 않았을 법한 녀석이 ‘옛날’을 운운하는 것이 하도 어이가 없어 “옛날 언제?”라고 다그쳤더니 이 아이 또 한번 당돌한 멘트를 날려 왔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왔어요.”

여기에 그만 말문이 막혀 버벅거리는 나를 보고 킬킬 웃으시던 주인아저씨가 말을 받았다.

“걔 엄마가 고등학교 때부터 우리 집에 다녔으니까 옛날이 맞네요. 우리 집 창단 멤버거든 쟤 엄마가. 저기 거울에 붙은 사진 있지? 그거 쟤네 엄마 패거리들이 붙여 놓은 거야.”

22년 전 한 평론가의 비관적인 예언

아저씨가 가리킨 거울에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남자 셋의 빛바랜 작은 사진들이 무더기로 붙어 있었다. 누굴까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아저씨가 정체를 밝혀 줬다.

“소방차야 소방차!”

그러고 보니 아이돌 댄스그룹의 원조라 할 3인조 댄스그룹 ‘소방차’가 맞았다. 그 빛바랜 사진들이 나붙은 거울 속에는 80년대 말의 어느 날, 만두 접시 주위에 둘러앉아 수다를 떨다가 자신의 우상을 오려붙이려 다가서는 여고생의 모습이 마술처럼 떠올라 왔다. 그런 감상에 젖어 있던 나를 깨운 것은 그 딸의 쨍쨍거리는 목소리였다.

“(소방차) 지이~인짜로 못생겼다!”로 시작하는 타박을 한참 한 뒤 아이는 엉뚱한 소리를 꺼냈다. “우리 엄마가 가끔 노래방에서 대걸레 잡고 그녀에게 보내주오 어쩌고 하는 그 소방차?” 나는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꽤 날래게 몸을 움직이면서 마이크 대를 쓰러뜨렸다가 들어올렸다 했던 소방차의 춤을 아이의 엄마는 노래방에서 대걸레 자루로 재연했던 모양이다. 이윽고 아이들은 가방을 뒤지더니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그룹 ‘지오디’의 사진이었다.

엄마의 우상인 소방차의 사진들 위에 딸의 우상인 ‘대니 오빠’의 사진이 큼직하게 나붙었다. 스타들의 세대교체가 조금은 뒤늦게, 얼룩 그득한 만두집의 거울에서 이루어진 셈이었다. 아이에게 지오디의 어떤 노래를 제일 좋아하느냐고 물으니 ‘어머님께’란다. 한번 불러 보라고 거듭 부추기는 나에게 아이는 또랑하고 야무지게 한방을 날렸다. “노래는 노래방에서 부르는 거예요. 가사도 없는데 무슨 노래를 불러요? 이상한 아저씨야.” 나는 또 한번 껄껄 웃고 말았다.

그해 4학년이었다면 녀석은 91년생이었다. 아마도 녀석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만두집뿐 아니라 노래방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 딸처럼 당돌하고 끼 넘쳤을 엄마는 대걸레 자루를 들고 스테이지를 뛰어다녔을 것이고 그로부터 10여년 후 그 딸은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 남들 다 하는 외식 몇 번 한 적이 없었고…”(지오디의 ‘어머님께’ 중)를 읊으며 마이크를 부여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날 거울에 나붙었던 소방차와 대니의 간격만큼이나 긴 세월이 그 뒤로 또 흘렀다. 이미 만두집은 부서져 없어졌고 그 거울도 아마 산산이 깨졌겠지만 그때 맹랑했던 4학년은 이제 20대 중반의 여성이 되어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그 엄마는 여전히 대걸레 흔들며 소방차를 부르고 있을지도 궁금하고.

노래방이 이 땅에 등장한 지 어언 23년째다. 새해에도 매일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수만곳의 노래방에 들러 수백만곡의 노래를 토해낼 것이다. 그곳이 거친 주정과 기묘한 탈선과 음울한 배설의 현장이 아니라 뭇사람들이 노래를 통해 기쁨을 나누고 슬픔을 씻고 어깨를 펴고 가슴을 위로하는 공간이 되기를. 그래서 1992년 평론가 이재현이 했던 신랄한 예언이 빗나가기를 바란다. 이재현은 그의 글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노래방 터를 발굴할 미래의 우주 전사들은 이렇게 보고할 것이다. ‘칸칸의 관에 문화적 생체 반응 있음. 몇백년 전의 지구인은 관 속에서 노래 반주곡을 뽑아먹고 살았던 것 같음: 거미줄 같은 전깃줄들, 레이저 디스크 몇 장, 동전 몇 닢, 감전사고 난 시체 몇 구, 무엇보다 알코올에 젖은 쉰 목소리와 핏발 선 눈에 비친 싸구려 수선화. 배설물 처리반을 보내주기 바람.’”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