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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2.21 19:05 수정 : 2014.02.23 20:32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일본군 학병으로 징발된 대치(최재성 분)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온 여옥(채시라 분)은 극적으로 재회하지만, 곧 이별을 고해야 하는 운명이었다. 김종학 피디는 이 드라마에서 일본의 전쟁범죄와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 제주4·3사건을 정면으로 다뤘다. 문화방송 화면 갈무리

[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16) 김종학 피디

조금 앞으로 거슬러 가보자. 80년대 초반 분위기는 매우 험했다. 광주항쟁을 거친 한국 사회 내부도 그랬거니와 남북관계도 그랬다. 남한의 대통령을 노린 북한의 폭탄테러가 터지고 무시로 간첩이 출몰하고 간첩선이 침몰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티브이도 반공물을 여럿 방송했다. 탤런트 김병기의 출세작이라 할 <지금 평양에선>을 필두로 <전우>니 <3840 유격대>니 하는 반공드라마가 판을 쳤다. 그 가운데 <동토의 왕국>이라는 이름의 5부작 드라마가 장안의 큰 화제가 되었다.

총련계 재일동포가 북한을 방문한 뒤 쓴 기행문인 <동토의 공화국>을 드라마로 옮긴 것이었는데 기존의 반공드라마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우선 이 드라마는 곳곳에 북한의 실제 장면을 삽입했다. 이를테면 주인공들이 차창으로 밖을 내다보는 장면에서 실제 북한의 모습을 끼워 넣거나, 산에 오르는 배우들의 모습 다음에 실제 금강산의 풍경을 집어넣는 식이었다. 또 낯익은 탤런트들이 아니라 낯선 연극배우들을 기용하여 사람들로부터 드라마가 아닌 실제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로 “사실에 입각한 반공드라마를 시작”하고 싶었다고 얘기했던 담당 피디의 욕심은 그에 그치지 않았다. 방송국 내 세트 촬영이 아니라 남한의 일부를 북한으로 바꿔 버리는 파격을 연출한 것이다.

사실에 입각한 반공드라마

북한 특유의 뻘겋고 누런 글씨로 새겨진 플래카드가 남한 건물에 내걸렸고 인공기가 논바닥에 나부꼈다. 심지어 장충동 국립극장이 북한의 대극장으로 둔갑을 했고 김일성 생가 만경대는 경상북도 경주에 차려졌다. 방송을 보는 사람들도 놀랄 일이었지만 방송을 만드는 현장을 우연히 목격한 한국 사람들은 거의 패닉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촬영 현장을 보는 사람마다 신고를 하고 다급히 경찰이 출동했다가 혀를 차며 돌아서기도 다반사. 그렇게 뻔질나게 신고해 대는 시민들의 방해(?)를 무릅쓰고 북한을 재현했던 ‘독한’ 연출자. 그의 이름은 김종학이었다.

<동토의 왕국> 이후 1987년에 나온 <퇴역전선> 역시 파격이었다. 우선 이 작품은 국내 최초로 만화를 드라마로 만들었다는 큰 의미를 지닌다. 요즘과 달리 당시에는 만화를 드라마화한다는 것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고3 시절 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 몰래 틀어박혔던 만화방의 티브이에서 드라마 <퇴역전선>을 보면서 만화 내용과 견줘 보던 기억은 꽤 신선한 문화적 충격으로 남아 있다.

제작비 72억 대작 ‘여명의 눈동자’
일본군 학병으로 끌려간 대치와
위안부로 끌려온 여옥의
철조망 키스신은 관례를 깨고
10초간 클로즈업돼 보여졌다

인간의 얼굴을 한 ‘빨갱이’에
제주4·3, 광주항쟁 묘사까지
김종학 피디의 금기깨기는
신선하고 충격적이었지만
모래시계를 끝으로 독기를 잃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해, 1988년에 방송된 <인간시장> 또한 파격이다. 온갖 사회악에 맞서고 현란한 무술로 악의 인물들을 때려눕히는 홍길동 같은 대학생 ‘장총찬’이 주인공인 이 드라마는 허구한 날 사랑타령 아니면 행복한 우리집을 부르짖던 기존 드라마의 문법을 과감하게 깼다. 숫제 드라마 타이틀은 전경과 학생들의 치열한 전투 장면으로 장식했고 국립극단 무용수 출신의 신인 탤런트 박상원은 철거촌 깡패들과 또 인신매매범들과 맞서 그들을 때려눕히며 새로운 별로 등극한다. 이즈음 술을 마시고 만용을 부리거나 시위 도중 가끔 오버를 부리는 녀석들은 종종 이런 호통을 들었다. “네가 장총찬인 줄 알아 인마?”

장총찬만큼 현란하게 싸우지는 못했지만 실제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학생들이 철거깡패와 맞서고 전직 대통령을 체포하겠다고 경찰의 방패벽으로 달려들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김종학은 그즈음 이런 포부를 밝혀 앞으로의 진로를 예감하게 했다. “티브이 드라마도 동시대 정치·사회 현실을 그려야 한다. 앞으로 70~80년대 학생운동권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

그리고 1990년대가 밝았다. 80년대 말 90년대 초 세계적으로 엄청난 일들이 많이 벌어졌지만 방송가에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리고 있었다.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 조처 이후 태평성대를 구가해온 한국방송(KBS)과 문화방송(MBC) 쌍두마차의 시대 또한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1990년 10월31일 정부는 민방설립추진위원회 회의를 열어 새로운 민방의 최대 주주로 태영건설을 선정한다고 발표했다. 10년 만의 ‘민방’(民放)의 부활이었고, 동시에 ‘형님 먼저 아우 먼저’의 사이 좋은 양강체제의 종식이었으며, 피가 튀는 진검승부를 예고하는 방송 삼국지 시대의 서막이었다.

바야흐로 ‘고시’ 자가 붙기 시작했던 ‘언론고시’ 준비생들은 시험 볼 곳이 늘었다며 반색했지만, 기존의 방송사에는 비상등이 켜졌다. 숱한 인력이 빠져나갔고 연예인들의 몸값은 고삐가 풀렸다. 당연히 공격적으로 나올 신생 방송사에 대한 견제책도 마련해야 했다. 그 가운데 엠비시는 신생 방송사로서는 도저히 따라올 엄두를 내지 못할 대작 드라마로 ‘선빵’을 날릴 생각을 한다. 이것이 제작비 72억, 기획 제작 기간 2년4개월의 어마어마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배경이었다.

1991년 가을 <여명의 눈동자>가 방송되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 몇 회분을 외면했다. 언젠가 원작 소설을 집어들었다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한 기억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 술집에서 목격한 <여명의 눈동자>의 한 장면에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일본군 학병으로 끌려간 조선인 대치(최재성 분)와 위안부로 끌려온 여옥(채시라 분)이 위태로운 사랑을 나누던 중 갑작스런 대치의 전출로 이별을 고해야 하는 장면이었다.

“나 내일 떠나.” “나는요?” “살아 있어. 살아 있으라구. 알겠지? 그 말 하려고 왔어. 살아서 내 애를 낳아 줘. (극중 여옥은 대치의 아이를 임신중이었다.) 그렇게 해줄 수 있겠어?” 곧이어 연인들의 이별은 철조망을 사이에 둔 열렬한 키스신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설왕설래’의 딥키스 말이다. 그때 술집 안의 모든 이들이 넋을 잃었다. 명화극장이나 주말의 명화에서 금발의 푸른 눈들이 키스하는 것이야 누차 보아왔지만 티브이에서 한국 사람들끼리 키스하는 모습을 대놓고 보여주기는 실로 처음이었다.

“드라마 덕에 누명 풀렸다”던 제주도 노인

방송을 지켜보던 술집 안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그 흔한 휘파람이나 “와아” 하는 한마디 없었다. 에로틱하기는커녕 너무나 서글프고, 아름답기는 하나 참담한 키스신이었기 때문이다. 나이 스물의 피 끓는 청춘이었지만 그 후 수십 번 되풀이 방송된 문제의 키스신을 보고 ‘느낌’을 가졌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느낀’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키스 등 러브신을 상징적으로 처리하던 관례를 깨고 극중 대치와 여옥이 키스하는 모습을 10초 동안 클로즈업하여 내보내는 등” 드라마에 등장하는 선정적인 장면을 이유로 방송위원회가 <여명의 눈동자>에 시비를 걸었다. 제작진은 “지금까지의 표현의 한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일 뿐”이며 “키스신은 말초적 자극보다는 극한 상황에서 사랑을 나누는 의도”였다고 해명했다. 결국 방송위는 “작품성은 인정하지만” 선정적인 장면을 반복하지 말라는 ‘주의성 경고’를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한국 드라마 최초의 리얼 키스신은 그렇게 힘겹게 인정을 받았고 김종학 피디는 또 한번의 금기를 깬다. 오늘날 한국 드라마에서 무진장 펼쳐지는 아름답고 짜릿한 키스신들을 볼 때마다 나는 김종학 감독에게 감사하게 된다.

그의 ‘금기 깨기’는 계속 이어졌다. 이후 드라마에 완전히 몰입한 나에게 <여명의 눈동자>는 가히 ‘쇼크’였다. 대학에 와서 새롭게 배웠던 역사의 이면들, 한국 현대사를 칭칭 감고 있던 비극의 사슬들이 심장을 찌르는 대사와 완벽한 영상미, 그리고 대치, 여옥, 하림 주인공 세 사람의 혼신의 연기에 실려 안방극장에 연속부절로 배달된 것이다. 그중 한 장면의 기억을 살려 본다.

일제강점기 자신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스즈끼 형사가 해방 후 최두일이라는 이름으로 경찰 간부로 들어앉아 있는 것을 본 주인공 하림(박상원 분)은 걷잡을 수 없이 흥분한다. 그때 하림은 펄펄 뛰며 이 말을 되풀이한다. “해방이 되었어 스즈끼. 네가 왜 여기 있어. 네가 왜 여기 있어. 해방이 됐어 스즈끼.” 그러나 그의 분노는 스즈끼의 부하 형사들에게 쉽게 진압된다. 해방 정국에서의 친일파의 득세와 그에 대한 대중의 분노와 좌절은 이 한마디에 응축되고 표현된다. “해방이 됐는데 왜 네가, 당신들이 여기에 있느냐.”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제주4·3에 대한 묘사였다. 그때껏 ‘폭동’ 아니면 기껏해야 ‘사건’으로 불리던 한국 현대사 초유의 비극을 <여명의 눈동자>는 낱낱이 그리고 명징하게 담아냈다. 당연히 드라마 사상 최초였다. 공비라고 불리던 사람들 대부분이 사실은 겁에 질린 민간인들이었다는 사실, 국방경비대와 무장대의 협상을 깨려는 경찰의 방해공작, 미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초토화 작전’, 심지어 순박한 제주도민들이 6·25 당시 정부의 예비검속과 보도연맹 학살 와중에 희생되었다는 정황까지도 드라마는 거침없이 언급한다.

하숙방에서 모여 드라마를 보던 나와 친구들이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제주도의 노인들이 “드라마 덕분에 우리 누명이 풀렸다”고 눈물을 흘릴 만큼, 어떤 이들에게는 ‘좌경 드라마의 효시’로 불릴 만큼 <여명의 눈동자>가 고삐를 푼 현대사는 거친 호흡을 내뿜으며 브라운관 위를 종횡무진 내달렸고, 그 발굽 아래 수십년 묵은 금기와 한계가 너덜거리며 널브러졌다.

그리고 <여명의 눈동자>에는 판에 박힌 선과 악, 이념과 인간의 대결로만 치부되던 2차원적 대립을 넘어, 입체감을 불어넣은 풍부한 인물들이 가득했다. 북한에 스파이로 침투한 하림을 돕는 명지(고현정 분)와 같이 “그냥 그 주의가 싫어요. 무슨 말인지 알아요? 공산주의, 무슨 사상, 무슨 주의. 사람 빼고 사상만 있는 게 난 싫어요”라며 이념에 대한 환멸을 토로하는 인물도 있었고, 주인공 대치의 사상적 스승이라 할 김기문(이정길 분)처럼 인간적인 공산주의자도 있었다. 남한 사람들은 처음으로 드라마 속에서 ‘다양한’ 면모의 빨갱이들을 목격하게 된다. 기존의 악의 화신 같은 캐릭터에서, 동지를 위해 희생할 줄도 알고, 인간에 대한 애정도 지닌, 그러나 단단한 신념을 고수했던 ‘착한 빨갱이’들까지 말이다. 드라마 종영 이후에도 즐겨 대학가 술자리에서 암송됐던 김기문의 대사가 있다.

“때로는 질문이 생길 수도 있을 거야. 과연 역사는 발전하는 것일까? 나와 이 역사는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후회를 해서는 안 돼. 자네도 나도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나.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역사는 발전하는 거야. 그럼, 후회할 게 뭐가 있어. 질문 같은 건 몇십년 뒤에 편안한 세대에 사는 후세들이 하면 되는 거야.”

<여명의 눈동자>에서 철조망을 사이에 둔 대치(최재성 분)와 여옥(채시라 분)의 입맞춤은 한국 드라마 사상 최초이자 최고의 키스신으로 남아 있다. 문화방송 화면 갈무리

그는 죽었지만 하림의 대사는 살아있다

시간이 흘러 <여명의 눈동자>에 감격하던 대학생은 방송 제작을 업무로 하는 회사원이 됐다. 청운의 꿈에 젖어 있던 신입사원 연수 과정에 어느 날 간부들이 방문했다. 그분들은 짤막한 동영상을 틀어주었다. 에스비에스(SBS)가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드라마 <모래시계>의 일부 장면이었다. 그 연출자는 김종학이었다. 조직폭력배들의 집단 격투 장면이었는데 그 액션신의 화려함은 역시 김종학다웠다. 김종학 감독은 이 <모래시계>로 자신의 가치를 확실히 입증한다. 역시 드라마 사상 최초로 주 4회, 즉 월화수목을 ‘깔고’ 방송된 <모래시계>는 ‘귀가시계’의 별명을 얻으며 공전의 히트를 쳤다. 김종학 감독의 예전 소원처럼 ‘70~80년대 운동권 이야기’를 일부 포함한 한국 현대사의 실타래를 가지런히 풀어낸 <모래시계>는 에스비에스의 위상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고, 극중 등장하는 동해안의 한적한 해안 정동진을 국민적 명소로 만들었으며, 역시 방송사 최초로 광주항쟁을 정면으로 다룸으로써 또 하나의 금기의 벽을 무너뜨렸다.

회사에서 밤을 새우던 어느 날 진한 전라도 사투리로 “정말 열심히 감사히 보고 있다”며 “왜 같은 고향 사람인데 주인공들은 완벽한 서울말을 구사하고 깡패는 전라도 말을 쓰느냐?”고 문의하던 시청자에게 진땀을 뺐던 추억도 따라 떠오른다.

뭐든 끝이 중요할 것이다. 드라마도 엔딩의 여운이 가장 크다. <여명의 눈동자>도 그랬고 <모래시계>도 다르지 않았다. <여명의 눈동자>의 마지막 장면에서 숨이 끊어진 여옥 옆에서 죽어가는 대치는 단신으로 자신을 찾아온 하림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네가 안됐군. 앞으로도 많이 살아야 할 텐데. 제대로 산다는 게 아주 힘들 텐데.” 죽어가는 사람이 산 사람을 걱정하던 그 순간에 나는 울컥했었다. ‘제대로 산다는 것’이 죽기보다 힘겨웠던 이후의 역사가 겹쳐서 그랬을까. <모래시계>의 마지막 내레이션도 역시 그랬다. “먼저 간 친구는 말했다. 그다음이 문제야. 그러고 난 다음에 어떻게 사는지. 그걸 잊지 말라고.” 그리고 이 말들은 김종학 감독 개인에게도 적용됐다.

<모래시계> 이후 김종학 감독은 드라마를 통해 그의 ‘독기’를 보여주지 못했다. 제작자로서 성공을 거둔 드라마도 간간이 있긴 했으나 한국 현대사를 내달렸던 그의 호방하면서도 섬세한 연출은 발휘되지 않았고 우리 사회를 얽매던 금기를 내팽개치던 그의 드라마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전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며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오로지 나는 그를 90년대를 아스라하게 펼쳐지는 기억의 무대로 만든 두 기둥, <여명의 눈동자>와 <모래시계>의 연출자로 간직할 뿐이다. 그가 절망 속에 돌아갔지만 그가 우리에게 남겨준 하림의 대사는 살아 있다. “그들은 가고 나는 남았다. 남은 자에겐 남겨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희망이라 이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만이 이 무거운 세월을 이겨낼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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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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