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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3.07 19:09 수정 : 2014.03.28 20:49

1998년 5월29일 오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앞 광장에 학생 3000여명이 모여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6기 출범식을 지켜봤다. 원래 출범식은 하루 뒤인 30일 한양대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경찰이 봉쇄하자 하루 앞서 열렸다. 윤운식 <한겨레21> 기자 yws@hani.co.kr

[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17) 한총련과 학생운동의 몰락

대한민국 현대사가 후세에 자랑할 만한 역사적 유산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해방 이후 한반도에 연속부절로 등장한 독재정권들에 맞서 싸웠던 학생들의 용기를 들 것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의 아이들은 지금도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고 “아아아 대한 대한 우리 대통령, 길이길이 빛나리라”는 박목월 작사 김성태 작곡의 낯뜨거운 ‘대통령 찬가’를 노래하고 있을지도 모르며 체육관에서 뽑은 대통령을 두고 삐딱한 소리를 입 밖에 냈다가는 모처로 끌려가 죽도록 맞고서야 풀려나는 공포에 익숙할 가능성이 크다.

6·25 전쟁 후에 얼마 동안 저만치 앞서가던 북한을 남한이 끝내 압도할 수 있었던 데에도 민주주의를 향한 끝없는 열정의 역사가 작용했다. 북한 인민들이 “수령님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는 지극히 전근대적인 자세를 강요받을 동안 남한 국민은 ‘건국의 아버지’든 ‘근대화의 기수’든 ‘정의사회 구현자’든 그 누구에게도 머리를 쳐들었고, 멱살을 잡고 그로기 상태로 끝내 몰아가거나 바닥에 눕혀 버렸던 것이다. 그 ‘국민의 힘’의 원투펀치가 바로 학생운동이었다.

‘의장님 옹립’ 등 1인 숭배 지도론
사회에선 이해·수용 어려웠지만
비판 무시하며 현실감 잃더니
1997년 6월 한양대·전남대에서
프락치 혐의자 타살 사건 발생

탄압받는다는 이유만으로
비판 외면하고 또래 젊은이를
고문해 죽이고 거짓말까지 한,
학생운동이 괴물이 된 역사에서
뭔가 교훈 얻어야 하지 않을까

1999년 서울대 ‘비운동권’ 총학생회장의 당선

90년대 초반 학생운동은 해방 이후 최대의 전성기를 맞는다. 1990년 10월 시사주간지 <시사저널>이 창간 1주년을 맞아 행한 여론조사를 보자. ‘한국을 움직이는 단체, 집단 또는 세력을 3개만 들어보라’(복수응답)는 질문에 전문가·일반국민 모두 1~2위로 민자당(57.1%, 56.2%)과 평민당(26.9%, 23.3%)을 꼽았다. 그러나 3위 이하의 순위론 상당히 달리 나타났다. 3~10위 순위에서 전문가 그룹은 전경련(26.1%) 전대협(11.4%) 전민련(10.4%) 전노협(9.7%) 군부(9.0%) 종교단체(5.1%) 언론(5.0%) 행정부(3.7%) 순서로 답했다. 그에 반해 일반국민 그룹은 전대협(9.7%) 종교단체(7.8%) 전경련(5.3%) 전민련(4.4.%) 국회(4.1%) 전노협(3.5%) 대기업(3.1%)의 순위를 보였다. 군부보다도 행정부보다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전대협’이 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 집단과 일반 시민 모두의 평가였다.

그로부터 9년 뒤, 1999년 학생운동의 메카라 할 서울대학교에서 이른바 ‘비운동권’ 총학생회장이 당선됐다. 오늘날 프로야구 독립구단 고양원더스의 구단주인 허민씨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의 당선 소감은 이랬다. “이것은 시대 변화를 외면한 채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운동권에 일반 학생들이 등을 돌린 결과입니다.” 그 후 ‘비운동권’은 일종의 트렌드처럼 전국 대학으로 번져 갔고 툭하면 수천 수만 단위의 학생들을 집결시켜 대한민국 천지를 진동시켰던 학생운동의 위용은 불과 10년도 안 되는 사이 빛바랠 대로 빛바랜 전설의 무더기에 파묻혀 버렸다. 물론 그 과정에는 복잡한 상황과 다양한 사건들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어쨌든 90년대는 대규모 학생운동의 외형적 최전성기이자 퇴조기이자 몰락기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80년대의 연장같이 뜨거웠던 90년대 초반을 거쳐 학생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그것을 가장 크게 상징하는 것은 1993년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이 ‘생활 투쟁 학문의 공동체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으로 바뀐 일이었다. 졸업반으로 세상사에 관심을 끊고 도서관에서 영어 단어 보캐뷸러리와 일반상식 공부에 몰두하고 있던 나에게야 전씨든 한씨든 별 신경을 쓸 일이 아니었지만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한총련 출범식이 우리 학교에서 열린다는 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전국에서 들이닥칠 약 10만명의 학생들의 숙소 등을 마련하려면 강의실은 물론, 중앙도서관 열람실까지 학교를 깡그리 비워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해 5월 한총련 출범식은 전국에서 몰려든 대학생 수만명의 참여 속에 치러진다. 학교에 득시글거리던 5만명의 청춘 가운데에는 도서관 자리를 잃은 것이 불만스러웠지만 다시 보기 힘든 구경거리라 여겨 꾸역꾸역 학교에 나온 나도 끼어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전남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남총련)은 ‘오월대’, ‘녹두대’로 불리는 강고한 전투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소위 ‘지랄탄’ 연기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싸웠고 공권력의 대병력이 돌격해 들어와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던 그들은, 학생들에게 경외와 찬탄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집회 자리에 위풍당당하게 입장하면 기타 지역 여학생들의 환호가 하늘을 찔러 주변 남학생들을 떨떠름하게 했을 정도였다.

이들 중 일부가 한총련에 반대되는 정치적 입장을 게시한 대자보를 찢어 버린 것이다. ‘통일 단결 대오’를 깬다는 이유였다. 물론 요즘 국정원에서 잘 쓰는 말로 ‘일부 조직원의 일탈’이었겠지만, 거칠게 찢겨나가 너덜거리는 대자보는 그때껏 대학 내에서 보지 못했던 황망한 풍경이었다. 적어도 내가 대학 6년 동안 본 바로 대자보 논쟁은 수도 없이 벌어졌지만 상대편 대자보를 찢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작년 세밑을 뜨겁게 달군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열풍 당시 한 ‘일베’ 회원이 자기 학교에 나붙은 대자보를 훼손하자 많은 이들이 격분했고 고발조처까지 거론된 것을 기억해 보라. 그런데 못된 철부지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다고 자부하던 학생운동의 선봉대가 그런 일을 벌였던 것이다.

더 큰 충격은 1994년에 왔다. 어느 날 시사월간지 <말>을 뒤적이던 나는 한 대목에서 기절할 만큼 놀라고 말았다. 한총련 중앙위원회에 제출된 결의안 가운데 한총련 대표자 관련 내용을 두고 격론이 벌어졌고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고 선언한 5개 학교 총학생회장이 퇴장을 했다는 것이 기사 내용의 골자였다. 문제의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았다.

“한총련 대표자는 백만 청춘의 자주적 이해와 요구의 유일한 체현자이며 통일단결의 구심이며, 백만 청춘의 최고 의사표현이며, 학우에게는 자주적 사상의식과 창조적 활동 능력을 키워 주는 백만 청춘의 유일한 정치 지도자입니다. (중략) 대표자를 믿고 삶과 생활, 운명을 의탁하면 삶은 개척됩니다.”

1996년 8월 경찰이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통일대축전에 참여한 학생 1500여명을 연행했다. ‘연대 사태’라 불린 이 사건 이후 한총련 주축세력은 크게 위축된다. <한겨레> 자료사진

왜 그들은 ‘5적’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나

눈앞이 아찔했다. 학생 조직의 대표들에 대한 존중(?)이 과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으나 구속과 수배가 틀림없이 예정돼 있던 시절, 그 희생과 결의에 대한 예우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만 청춘의 공동체” 한총련의 지도 이념(?)으로 이런 1인 숭배적인 지도자론이 제시된다는 것은 상상을 절하는 일이었다. 여기에 반대하고 퇴장한 5개 대학 총학생회장들에게 ‘5적’이라는 격렬한 비난까지 퍼부어진 데에 이르면 더하여 망연자실일 뿐.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북한은 고난의 행군에 돌입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이른바 신세대가 등장하고 피시(PC)통신이 번창하고 사회의 각 분야가 조변석개하던 시대에 학생운동의 주류가 내밀었던 카드가 북한의 수령론에 필적하는 ‘지도 이념’과 학생들이 둘러멘 가마 타고 등장하는 ‘의장님 옹립’의 열광이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피시통신 내에 하나둘씩 있던 진보적 동호회에 한총련 의장의 아이디가 등장했을 때 전국대학생기자연합회 기자 한 명이 올렸던 환영의 인사를 나는 아직 쓴웃음과 함께 떠올린다. “드디어 통신 공간에도 한총련의 ‘지도’가 시작되는군요.”

단결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대자보를 찢어발기던 정의와 그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끼리는 지극히 공감되는지는 몰라도 한 치만 바깥에서 보면 이해와 수용이 불가능했던 ‘지도’를 목도하면서 나는 학생을 면하고 사회인이 됐다. 입사 2년차 여름, 연세대학교에서는 한총련 주도의 격렬한 시위와 점거 농성이 벌어졌다. 1996년 한총련 통일대축전이었다. 어느 날 밤 공무로 연세대학교 근처에 들렀다가 학교 안에 들어갔을 때, 농성 중인 학생들에게 약을 전달해 달라며 일단의 의사들이 시위를 벌이는 것을 보았다. 경찰이 이를 거절하자 한 의사가 절규했다. “당신들 정말 학생들을 말려 죽이려는 거구나.”

그랬다. 정부 당국은 차제에 한총련을 와해시킬 의사가 확고했고 농성자들의 전기, 수도, 식량을 끊었다. 진압 과정에서 경찰관 한 명이 사망한 터라 관용 따위도 기대할 수 없었다. 5일간의 절망적인 농성 끝에 결국 학생 수천명이 연행됐고 수백명이 구속됐다. 이른바 연대 사태. 그러나 그들을 ‘지도’했던 이들은 연행자 안에 없었다. 경찰 진입 전 ‘사수대’의 도움을 받으며 학교 밖으로 탈출했던 것이다. 당시 한겨레신문 정운영 논설위원이 그 특유의 명문으로 이 사태를 다룬 칼럼에는 문장마다 안타까운 한숨이 뚝뚝 묻어난다.

“특히 매듭이 엉망이었다. 저학년과 여학생들이 두름처럼 엮여나가는 가운데 지도부는 슬쩍 피했다. 혹시 지하에 잠적해서 투쟁을 지도한다는 방침인지 모르겠으나, 현재의 학생운동이 그런 ‘혁명가’를 필요로 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어린 학생들 대신 지도부가 의연히 나섰던들, 한총련은 고통을 받아도 학생운동은 미구에 다시 살아날 것이었다.”

학생운동 세력의 주류는 이미 그런 충고를 달게 받을 현실 감각을 상실하고 있었다. 연세대 안에서도 “우리가 농성을 계속하면 우리들의 투쟁에 감동한 애국 시민들이 떨쳐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고, 역사적으로 한총련과 대규모 학생운동의 종말의 기점이 된 이 사건을 ‘빛나는 연대항쟁의 승리’로 선언하는 ‘정신승리’가 감행된 것을 보면 넉넉히 알 수 있지 않은가.

고문기술자들도 신념은 있었다

‘그래도 우리가 옳다’는 신념이 현실과 유리될 때, 종종 그것은 괴물이 된다. 영화 <변호인>에서 보듯 과거 독재정권 시절 학생들을 고문하던 고문 기술자들에게도 신념이 있지 않던가. 유감스럽지만 1997년 6월 벌어진 두 차례의 ‘프락치’ 혐의자에 대한 타살 과정은 ‘괴물의 탄생’과도 같았다. 한양대에서는 이석, 전남대에서는 이종권이라는 시민이 또래 학생들에게 죽음을 당했다. 한양대에서는 구타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물 적신 담요를 두르고 경찰봉으로 때려 죽였고, 전남대에서는 소형 녹음기로 ‘증거’를 확보하는 가운데 술 취한 남총련 간부들이 40분간 두들겨 팬 끝에 먹인 진통제가 기도에 막혀 숨졌다.

두 대학 모두에서 대책회의가 열렸고, “타일러 보냈는데 시체로 발견됐다”거나 “현 정권이 한총련 출범식을 방해하기 위해 대규모 프락치를 투입했고 잡히면 자해 행위를 하거나 복면 프락치가 폭행하도록 했다”는 과거 공안당국급의 거짓말과 강변이 흘러나왔다. 사태 이후 사라진 두 명의 목숨 위에서 처음에는 미룰 것이라던 ‘한총련 출범식’을 강행하는 실로 비범한 신념을 과시하고야 만다. 그날 우뚝 선 한총련 깃발은 한겨레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사진 제목을 뽑은 기자의 심정과 내 마음은 똑같았다. 제목은 이것이었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기사의 한 구절을 나는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이제 학생운동은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섰다.” 유감스럽지만 그 후 학생운동은 오히려 장렬하게 죽지도 못하고 회복의 가능성도 없는 퇴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왜 한총련 측의 잘못만 부각하는가, 당시의 살인적인 경찰의 진압, ‘한총련을 탈퇴하지 않으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비정상적인 탄압, 가공할 프락치 공작에 대해서는 왜 말하지 않는가며 흥분하는 분이 계실 수도 있을 것 같다. 대답하건대 나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한총련이 얼마나 탄압받았는지, 시대적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프락치 공작이 얼마나 자심했는지를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탄압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비판을 외면하고, 옳다고 믿는 ‘시대적 정의’를 위해 현실 감각을 포기하고, ‘자심한 프락치 공작’을 이유로 또래 젊은이들을 물 적신 담요에 말아 두들기고 “맞고 불래? 불고 맞을래?”를 뇌까리며 녹음기를 들이미는 괴물이 되었던, 그 역사에서 우리 모두가 교훈을 얻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최근 수삼년 동안, 나는 한총련 몰락의 데자뷔를 어느 진보정당의 노정에서 발견하고 있다. 자신들이 옳다는 가치를 근거로 당 대회장을 점거하고 거침없이 폭력을 휘두르고, 밖으로는 전파되기 어려운 자신들만의 신념 체계 속에 갇힌 채 정권의 탄압을 자신들의 정당성의 도구로 삼으며 현실 세계와는 점차 멀어지고 있는 이들의 행보는 한총련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총련은 ‘이적단체’가 아니었다. 이번의 이른바 아르오(RO) 사건도 ‘내란 음모 사건’이라고 보지 않는다. 특히 ‘내란 음모’는 시쳇말로 ‘깜’도 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하지만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생각에 대경실색과 망연자실을 오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의장님을 믿고 의지하면 삶은 개척됩니다”라는 지도이념을 읽었을 때처럼 “장군님을 지키는 것이 조국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는데 ○○ 가족들을 지키고, 애들을 지키는 게 우리 ○○ 같아요. 장군님 뜻이 그런 거잖아. 인민을 지키고, 인민의 가족을 지키고.”(녹취록에 등장하는 통합진보당 간부의 말)라면서 북한 영화 감상평을 나누는 말을 들을 때 눈앞이 하얗게 되는 것 또한 같다. 21세기에 등장하는 ‘장군님’이라니. 과연 역사는 반복될 것인가.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그럼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선 먼저 할 일은 1997년 전국연합이 한총련에 보낸 성명서를 다시 읽는 것이겠다. “정권의 폭력성을 탓하기 전에 한총련의 방침과 노선이 얼마나 국민정서에 부합했는가를 먼저 평가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성해야 합니다. 솔직해야 합니다. 이러저러한 상황설명보다는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하며 국민 앞에 새롭게 거듭나겠다는 자세로 이번 사태에 임해줄 것을 당부합니다.” 단어 몇 개만 바꾸면 그대로 오늘의 당부가 된다. 이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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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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