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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4.11 19:09 수정 : 2014.04.13 15:16

1996년 10월4일 강릉 칠성산에서 북한 잠수함 승조원 수색작전에 나선 한 병사가 안전을 기원하며 기도를 하고 있다. 김봉규 사진집 <분단|한국>

[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19) 마지막 공비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직후 어깨와 가슴에 묵직한 견장과 기장이 부착된 군복을 입은 인민군 상장 한 명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물을 들고 왔다. 인민군 총정치국 부총국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그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1968년 1월21일 ‘청와대를 까러’ 왔다가 생포돼 이후 남한에서 살아온 옛 인민군 124군 부대원 김신조씨였다. “참으로 어이없지 않습니까. 청와대를 치러 왔던 사람이 버젓이 찾아왔으니…. 나를 좀 만나게 해주지, 왜 그냥 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신동아 2009. 7) 청와대 턱밑까지 치달았던 31명의 북한 특공대 가운데 생사를 확인할 수 없던 1인이 바로 박재경 상장이라는 증언이었다. 혹독한 훈련을 함께 받은 특공대의 일원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김신조씨의 증언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는 1968년의 서울과 경기도 일원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뒤 한국 군경의 포위망을 끝끝내 뚫고 휴전선을 돌파해 북으로 돌아간 ‘무장공비’였던 셈이다.

1996년 9월 동해안 어선 그물에
스크루 엉켜 북한 잠수함 좌초
갑자기 수십명의 무장간첩이
이땅에 대규모로 출현한 상황
평화적 해결 기대는 물건너갔다

라펠로 내려오던 공수부대원도,
육군 대령도 조준사격 당하고
민간인들도 참혹히 살해당했다
‘공비’들도 하나둘 죽음 맞았다
트라우마는 오래도록 남았다

다큐 찍으러 간 소방서에서 생긴 일

국방부 장관과의 면담도 제안받았지만 거절하고 서둘러 북으로 올라갔다는 박재경 상장. 그는 서울 시내를 다시 밟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때 “박정희의 모가지를 떼고 수하들을 총살하러” 왔던 그가 남한 대통령에게 줄 선물을 들고 왔을 때, 어떤 심경이었을까. 하나 더 궁금한 것은 도대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무슨 생각으로 선물 배달자로 박재경 상장을 보냈던 것일까. “동무들 이 사람 알아보갔소?” 하는 허세였을까. “남조선은 두 번째지요? 이번엔 좀 편히 갔다 오시라요” 하는 엉뚱한 배려였을까. 그가 주고 간 선물도 묘했다. 북한 특산 칠보산 송이버섯이었다. 송이버섯은 남쪽에도 난다. 텔레비전에 비치는 탐스러운 송이버섯을 보면서 나는 1968년이 아닌, 1996년 가을 한국을 뒤흔들었던 49일을 떠올렸다.

당시 나는 시사 프로그램 조연출을 맡고 있었는데 갑자기 부장님의 호출을 받았다. 하명하시는 말씀은 “너에게 입봉(일본식 방송 용어로서 연출을 맡는다는 뜻)할 기회를 주겠다”였다. 이어진 말씀인즉슨 6밀리 카메라 한 대를 들고 사건·사고가 가장 많이 벌어지는 소방서에 가서 숙식을 함께하며 거기서 벌어지는 일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당장 다음날부터 나는 카메라 한 대와 테이프를 챙겨들고 모 소방서로 출근을 했다. 그로부터 한 달 반 동안 퇴근은 없었다.

소방관들과 숙식을 함께하면서 느낀 것은 참 많다. 그중 하나는 소방관들은 정말로 못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화재 진압만 그들의 업무가 아니었다. 지금은 출동 안 하는 것으로 알지만, 깜박 잊고 열쇠를 집 안에 두고 나온 사람들이 툭하면 불러대는 ‘시건장치 개방’ 출동 건은 지천이었다. 놀다가 유아용 변기를 뒤집어쓴 것이 빠지지 않아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아기를 달래며 변기를 뜯어내는 일을 하기도 했다.

하루는 경찰에서 연락이 왔다. “절도 신고가 들어왔는데 방법이 없네요.” 얘기인즉 해외 연수를 떠나 비어 있는 윗집에서 별안간 쿵쿵 소리가 나고 인기척이 심하게 난다는 아랫집의 신고였다. 열쇠를 따고 들어가 보면 되지 않나 했는데 그게 무슨 이유에선가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 고가 사다리차를 타고 집 안에 들어가 확인을 해야 했다. 경찰관이 그 일을 할 수는 없었으니 소방서에 도움을 청한 것이다. 현장에서 소방관 한 명이 올라갈 채비를 하는데 휘적휘적 맨몸으로 올라가기에 누가 있을지 모르니 몽둥이라도 하나 챙기시라고 하자 코웃음을 쳤다. “내가 특공대 출신이에요. 걱정 말아요.”

아닌 게 아니라 소방관, 특히 구조대원들은 특수부대 출신들이 꽤 많았다. 체력과 용기를 기본으로 갖춰야 할 직업이기 때문일까. 요샛말 ‘식스팩’은 기본으로 장착하고 계셨고 떡 벌어진 어깨에 알통들도 화려했다. 쉬는 시간이면 그분들의 군대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입을 벌렸다. 그중 나이 지긋한 분의 입에서 ‘무장공비의 추억’이 흘러나왔다(공비는 중국 국민당 시대에 공산당의 지도 아래 활동하던 게릴라를 공산 비적(匪賊)이라고 욕하며 부르던 데서 유래했다). 1978년 일어났던 광천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었다.

무장간첩들이 미군 레이더 기지를 정찰하러 왔다가 시골 아주머니 3명에게 발각되자 그중 2명을 살해한 다음 육로로 북상해, 민간인 5명을 살해한 뒤 김포 지역의 한강을 도하해서 북으로 멀쩡히 살아 돌아갔던 사건이었다. 고의인지 우연인지 자신들의 행적들을 소상히 적은 일지를 놔 두고 가서 각 지역 경비책임자 사이에서는 곡소리가 났다고 한다. 이 얘기를 꺼낸 소방관은 당시 책임 소재가 컸다는 1공수여단 소속이었다. “어깨를 맞닿다시피 하고 탐침봉으로 산을 쑤시고 다녔는데…. 공비들은 무슨 투명인간 같았어. 북으로 올라갔다는 말 듣고 얼마나 허탈하던지. 걔들이 병원에서 식량을 구하다 그랬나. 애 낳은 산모를 죽였다는 말을 듣고 반드시 잡아 죽이겠다고 다짐 다짐을 했는데.”

그로부터 며칠 뒤 여느 날처럼 일과를 시작할 무렵 한 소방관이 휴게실로 들어와 외쳤다. “티브이 켜 봐. 북한 잠수함이 강릉에 나타났대.” 1996년 9월18일 이른바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의 시작이었다. 파도에 힘없이 흔들리는 북한의 상어급 잠수함이 계속 시야를 어지럽혔고 긴장된 어조의 기자들의 리포트가 끝없이 이어졌다. 몇 명인지 모를 ‘무장공비’들이 해안에 상륙한 것으로 파악됐고 강릉과 강원도 북부 일대는 전시 상황을 방불케 하는 비상경계가 펼쳐졌다.

박재경의 송이버섯, 남한 할머니의 송이버섯

출동 신호가 울리지 않으면 구조대원들은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으리라. 수십에 달할지 모르는 대규모의 ‘공비’가 급작스레 이 땅에 출현한 상황이었으니. 영해 침범과 스파이 혐의는 분명했지만 꽁치잡이 그물에 잠수함 스크루가 엉키면서 좌초한 사고가 원인인 것 같았기에(북한도 그렇게 주장했다) “잠수함 승무원들이 손들고 나오면 문제 해결되는 거 아닌가?” 하는 섣부른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집단 자살한(또는 처형당한) 잠수함 승조원들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평화로운 해결의 기대는 물 건너가고 말았다.

공수부대원들이 투입됐다는 뉴스가 들려오고 그들이 헬리콥터에서 라펠을 타고 내려오는 자료 화면이 연속부절로 등장할 때 앞서 말한, 누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텅 빈 아파트 베란다에 혈혈단신 맨몸으로 뛰어들던 소방관이 나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었다. 어떤 목적으로 저기에 투입되며 저렇게 투입된 뒤엔 어떻게 행동한다는 것 등등. “일단 산 정상에 저렇게 내린 다음 아래로 훑어 내리는 거지. 하지만 겁나죠. 적은 우리 위치를 알고 행동을 예측하는데 우린 까맣게 모르는 곳을 훑어야 하니까.” 바로 몇 시간 뒤 라펠 타고 투입된 공수부대 하사관 한 명이 무장간첩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는 뉴스가 떴다. 얼어붙은 듯 텔레비전만 지켜보던 소방관에게 나는 말도 붙이지 못했다.

강원도 북부 일원은 전쟁 상태였다. 도망갔다고 추정되는 14명(추산)의 무장간첩들을 소탕하기 위해 수만명의 병력이 동원됐고 통행금지가 실시됐다. 어선들은 바다에 나가지 못했고 마음 놓고 산에도 오르지 못했다. 무장간첩들도 하나둘 죽어갔지만 이쪽의 생때같은 젊은 군인들도 목숨을 잃었다. 경계하는 병사들의 눈에는 핏발이 섰고 생사를 넘나드는 공포 속에 아군이나 민간인을 쏘아 죽이는 오발사고도 수차례 발생했다.

그해 9월27일은 추석이었다. 전국적으로 귀성 정체가 이어졌지만 강원도는 사정이 달랐다. 어느 지역까지 허용해야 하고, 무장간첩이 성묘객 틈 속에 끼어드는 일은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골칫거리였다. 명절을 맞아 성묘 가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준비물이 공지됐다. 태극기와 주민등록증을 소지하라는 것. 강원도 북부 작전지역의 주민들은 태극기를 들고 성묘하러 가는 진풍경을 연출해야 했다.

추석 전에 작전을 끝내겠다는 각오는 물거품이 됐다. 무장간첩 토벌 작전은 계속됐고 강원도의 시련은 계속됐다. 서울은 평소 분위기와 다름이 전혀 없었다. 휘황하게 흥청거리는 강남 유흥가에 발생한 화재 현장을 다녀오면 나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젊은 군인들의 전사 소식이 주먹처럼 박혔고, 자기 아파트 잠긴 문 열어 달라고 119를 부른 뒤 왜 이렇게 늦게 오느냐고 짜증을 내는 고급 아파트 주민 덕에 치밀어 오른 울화를 다스리고 있는데 무장간첩 토벌 현장에서 육군 대령이 무장간첩의 조준 사격에 전사했다는 뉴스가 터져 아연실색하기도 했다. 일상은 일상대로 전투는 전투대로 진행되던 기묘한 나날.

그 가운데 슬펐던 소식은 무장간첩들에게 참혹하게 살해당한 민간인들의 소식이었다. 그들이 작전지역에 들어가는 위험을 감수했던 이유는 송이버섯이었다. 가을이 제철인 송이버섯은 지역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이었고 송이를 따러 갔다가 무장간첩과 마주친 것이다. 2명은 달아나다가 총을 맞았고 걸음이 느린 할머니는 목이 졸렸다. 송이버섯과 바꾼 3명의 목숨.

소방서 근무를 끝내기 며칠 전, 마지막 무장간첩 2명이 사살됐다. 이들의 죽음으로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도 막을 내린다. 기가 막힌 일은 아직 남아 있었다. 사살된 무장간첩들을 조사한 결과 이들은 엉뚱한 사람의 옷과 유류품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세세히 기록한 활동 일지에는 포위망을 넘나들면서 스키장 전자오락실에서 밤을 보내거나 식당에서 매운탕을 태연히 시켜 먹은 사실, 그리고 국군 병사 1명을 죽이고 옷을 빼앗은 사실 등등이 기록돼 있었다. 부랴부랴 조사해 보니 노도부대 소속 표종욱 일병. 그는 싸리나무 채취 작업 중 사라졌고 군은 제대로 조사하지도 않고 탈영 처리를 해 버렸다. 소지품에서 연애편지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여자 문제가 복잡했다”고 단정했던 것이다.

탈영병 가족이 돼 헌병대의 닦달을 받던 표종욱 일병의 가족은 무장간첩 사살 뉴스를 보던 중 소스라치고 말았다. 그들이 지닌 시계 중 하나는 표 일병의 누나가 동생에게 준 선물이었던 것이다. 표종욱 일병의 사망 소식이 뉴스로 전해지는 상황에서도 헌병대는 누나에게 전화 추궁을 하고 있었다. 하도 기가 막힌 누나가 뉴스도 안 보냐, 텔레비전도 안 보냐고 반문했을 때 헌병대의 답은 “뉴스가 장땡이냐?”였다고 한다. 이 뉴스를 보면서 분통을 터뜨리는 와중에 과거 광천 무장공비 사건 때를 경험했던 소방관이 말을 받았다.

“그때도 한 군인이 실종됐는데 도무지 탈영 이유가 없었지만 탈영으로 처리했었지. 시신도 발견하지 못했으니 진짜 탈영일 수도 있었겠지만.”

무장간첩 26명을 태우고 침투했다가 1996년 9월18일 강릉 앞바다에서 좌초한 북한 잠수함을 남쪽 군인들이 수색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고작 ‘안보의식 강화’가 교훈일 수 있나

1996년 가을 강원도를 뒤흔들었던 무장간첩 침투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됐다. 이 사건에서 떠올리는 단어가 있다면 ‘반복’이다. 분단 시대의 남과 북은 지겨울 정도로 비슷한 패턴을 유지 반복해 왔다. 그것은 이른바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96년 송이버섯을 캐러 들어간 민간인들이 죽음을 당한 곳은 1968년 이승복 어린이 가족이 죽음을 당했던 곳에서 몇 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30년을 사이에 두고 똑같은 상황과 루트에서 사람이 죽어나간 것이다.

수만명이 총동원돼서 눈에 불을 켜고 수색하는 와중에 그 이전이나 강릉 때나 무장간첩들은 꼼꼼한 활동 일지를 작성하고 있었고 자신들의 행동에 저해되는 이들은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가리지 않고 죽였으며 그 와중에 많은 희생자를,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원한을 만들어 냈다. 강릉 작전에서 유일하게 생포된 무장간첩 이광수가 전향한 뒤 어느 행사에서 작전 중 희생된 대령의 아들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고인의 아들은 그 손을 차마 잡지 못했다고 들었다. 몸에 고문당한 흔적이 역력한 채 팬티만 남기고 발가벗겨진 채 버려진 표종욱 일병의 가족들 마음은 또 어땠을까.

1996년 가을, 우리가 경험한 사건은 일종의 작은 전쟁이었다. 단 26명 때문에 5만 대군의 발이 묶이고 피차 수십명의 목숨이 생으로 날아가고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서로가 서로의 생명을 앗으려 들었던 살벌한 전쟁의 축소판이었다. 수십년 동안 지겹도록 행해졌던 끔찍한 리바이벌 시리즈였다. 송이버섯철, 관광철, 고기잡이철에 맞춰 발생한 이 사건으로 강원도 지역 경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고 그 트라우마는 오래도록 남았다. 그런데 이 사건은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남겨 주고 있을까.

안보의식의 강화? 그러나 가장 안보의식(?)이 투철하던 시절에 무장간첩은 오히려 더 많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오히려 일부 우익 세력이 안보의식이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졌다고 주장하던 그 시기에 오히려 ‘공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했으면 좋겠다. 진정한 안보란 ‘공비’를 완벽하게 막는 일이 아니라, 해안선에 철조망 다시 둘러치고 포상금 강화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비’가 출몰할 근거를 없애는 평화 체제의 구축을 통해 완성되는 것임을 새삼 말해야 할까. 그해의 강원도를 돌이키며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빌어 본다. 죽어간 인민군들이 정녕 ‘마지막 공비’가 되고 마지막 공비 희생자가 되기를, 다시는 그런 일이 생겨 아픔과 원한을 쌓는 일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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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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