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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6.20 18:52 수정 : 2014.06.22 13:49

1980년대의 암울함을 씻어내기라도 하듯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고 연기도 좋고 연출도 빼어난 ‘웰메이드’ 한국 영화들이 1990년부터 쏟아져 나왔다. 1990년대는 한국 영화가 21세기 신흥 영화 강국으로 부상하는 상승가도였다. 사진은 영화 <장군의 아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24) 한국영화의 부활 (상)

가족들과 함께 극장을 찾았다. 병풍처럼 늘어선 영화 포스터를 보면서 무슨 영화를 볼까 가늠을 하다가 한 할리우드 영화를 짚었는데 아내가 대뜸 이런 말을 해 왔다. “누가 요즘 할리우드 영화를 돈 주고 봐?” 오해하지 마시기 바란다. 아내는 ‘어둠의 경로’를 통해 영화를 내려받아 보는 편이 아니며 오히려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지론의 소유자다. 다만 아내의 말뜻은 “요즘 할리우드 영화 재미없다”는 것이었다. 하긴 그렇지 하면서 한국 영화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데 묘한 단상이 떠올라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저 말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단 목적어가 바뀐 채로. “누가 한국 영화를 돈 주고 봐?”

1992년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동아리방에 앉아 있는데 한창 누군가와 열애 중이던 여자 동기가 애인과 함께 보고 온 영화 얘기를 꺼냈다. <결혼 이야기>라는 한국 영화였다. 어쩌고저쩌고 요즘 말로 ‘스포일링’을 한창 해 대던 그녀에게 누군가 툭 쏘아붙였던 것이다. “누가 한국 영화를 돈 주고 보냐?” 특별히 영화에 대한 이해와 안목을 지니고 한 얘기라기보다는 “눈꼴시니까 연애하는 거 그만 자랑해!”의 의미가 컸고 가시가 살짝 튀어나온 핀잔에 여자 동기는 움찔했다. “아니 뭐 시간이 안 맞아서…”라고 말을 흐리던 그녀는 한마디를 군더더기로 붙였다. “근데 되게 야해. 심혜진 너무 대담해.”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한 정보였다. 그로부터 30분 후 나와 동기 한 명은 종로4가 피카디리 극장으로 가는 시내버스 333번을 잡아타고 있었다.

80년대 중반을 질풍노도의 시기로 보냈으되 천성이 겁이 많았던 나는 그다지 일탈을 경험한 적이 없다. 유일한 일탈이라면 거짓말을 하고 자습 땡땡이친 날, 또는 부모님 등산 가신 날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는 것이었는데 그 태반이 한국 영화였다. <무릎과 무릎 사이>를 거니는 <암사슴>이 탐하는 <빨간앵두>와 <산딸기>를 거쳐 <여자가 밤을 두려워하랴>를 부르짖다가 도무지 왜 옷을 벗고 말을 타는지 모르겠던 <애마부인>의 장대한 시리즈까지 섭렵했던 것이 나의 ‘흑역사’였다. 동시에 그건 한국 영화의 시대적 아픔이기도 했다. ‘한국 영화 = 벗는 영화’의 등식이 굳건했고 누가 몇 번을 벗느냐, 베드신이 몇 번 나오느냐는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되고 “한국 영화 누가 돈 주고 보느냐?” 하는 거칠고 난폭한 빈정거림이 일상이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결혼 이야기>를 함께 봤던 동기의 감상평은 이렇게 기억난다. “뭐 한국 영화치곤 봐줄 만하네. 그런데 걔는 뭐 이 정도를 가지고 야하다고 그러냐. 속았어.”

영화 <결혼이야기>. <한겨레> 자료사진
영화 <남부군>. <한겨레> 자료사진
13년 만에 깨진 <겨울여자>의 흥행기록

그렇게 경멸과 저평가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한국 영화가 오늘날 툭하면 천만 관객을 끌어모으고 국제적으로 명성이 있는 거의 모든 영화제를 휩쓸고 심지어 할리우드에서 그 기획을 사들여 리메이크하는 21세기 신흥 영화 강국으로 부상하는 상승가도였던 것이 1990년대였다. 마치 80년대의 암울함을 씻어내기라도 하듯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고 연기도 좋고 연출도 빼어난 ‘웰메이드’ 한국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한국 영화 부활의 신호탄은 뭐니뭐니해도 1990년 개봉된 <장군의 아들>이었다. 베네치아(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씨받이>(1987)를 비롯해 굵직굵직한 한국 영화들을 만들었던 임권택 감독이 일제 때 종로통 협객 김두한을 소재로 만든 이 액션영화는 뜻밖의 대박이 났다. <장군의 아들>의 흥행 기록은 67만8946명. 1977년 김호선 감독의 <겨울 여자>의 기록이 80년대를 건너뛰고 13년 만에 깨진 것이다. 수백만은 넘어야 히트작에 명함을 내밀까 말까 한다는 지금에야 애걔 소리가 나올 수치이지만 그 무렵의 한국 영화계에서 이 숫자는 그대로 하늘이었다. 더구나 당시 공전의 히트를 쳤던 <사랑과 영혼>의 153만에는 못 미쳤어도 그때까지는 머리숱이 많이 남아 있던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다이하드2>의 65만명을 눌렀던 쾌거이기도 했다. 술 한잔 걸친 다음 저마다 ‘긴또깡’(김두한)과 ‘하야시’(신현준이 배역을 맡은 일본 조폭 두목)와 ‘쌍칼’과 ‘신마적’, ‘구마적’이 되어 길거리에서 오두방정을 떨던 추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 많을 것이다. 1572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캐스팅된, 평범한 대학생이던 박상민은 일약 스타가 됐다. 그는 그런 회고를 한 적이 있다. “오디션을 보고 촬영을 하고 개봉되기 전까지만 해도 전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스타’라는 인식이 전혀 없었죠. 그러다가 하루는 밖에 나갔는데 날 보던 한 여학생이 그 자리에서 ‘악’ 하고 기절하는 거예요.”(이데일리 2009. 8.25 인터뷰 중)

<남부군>도 1990년 개봉이다. 미국 영화 직접배급 반대 투쟁에서 극장에 뱀을 푸는 격렬한 방식으로 저항했던 정지영 감독이 당시 재조명되기 시작했던 지리산 빨치산들의 이야기를 담았던 이 영화는 흥행에서도 성공했지만 금기의 소재를 건드렸다는 점에서 더욱 우뚝했던 기억이 난다. 감히 ‘무장공비’들을 다룬다는 사실에 진노한 국방부의 협조를 일절 받지 못해 배우들은 나무총을 들고 연기해야 했고 빨치산들을 미화하기보다는 되레 잘 만든 반전영화쯤으로 보였지만 그래도 한국 영화에서 책 속에서나 봤던 빨치산들의 인간적 면모를 본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다. “민간인을 강간한 빨치산 트위스트 김을 쏴 죽인 뒤 대원들에게 박수를 치라고 요구하는 눈썹 진한 배우”는 한동안 화제가 됐다. 규율에 철저한 공산당원의 고뇌를 보았다는 둥 표정 연기가 죽였다는 둥. 그런데 두어 해 전 어느 만남 자리에서 내가 그 장면을 상기시키자 다들 무릎을 치며 인상 깊었다고 술회했지만 그 배우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기억하지도 연결시키지도 못했다. 그 근엄한 공산당원은 조형기 아저씨였다.

그 의미 있는 1990년에도 한국 영화 흥행 기록을 보면 <짚시애마>와 <애마부인4>가 들어가 있다. 관객 5만명을 동원하면 흥행10걸에 들었다. 그런데 이 흥행 기록 랭킹에는 들지 못했지만 사실상은 거뜬히 들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장군의 아들>이나 <남부군>만큼이나 의미가 있는 영화 하나가 역시 90년에 세상에 나왔다. 그 영화는 <파업전야>다.

‘철의 노동자’라는 노래가 있다. “민주노조 깃발 아래 와서 모여 뭉치세”로 시작하여 “너와 나 너와 나 철의~~~~ 노동자”로 끝나는 노래인데 전혀 민주노조 같은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 노래를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도심의 거리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들이나 철거민들의 이른바 ‘선전전’ 때 스피커를 통해 줄기차게 울려 퍼지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가수 안치환의 작품인 이 노래는 바로 영화 <파업전야>의 주제가였다.

한국영화=벗는 영화 등식 속에
“한국영화를 돈 주고 보냐”는
거친 빈정거림이 떠돌던 시절
‘장군의 아들’을 신호탄으로
웰메이드 영화들이 쏟아지다

소용돌이를 부른 ‘파업전야’
노태우 정권이 사력을 다해
영화상영 막자 곳곳서 충돌
알몸에 필름 감고 대학가 진입
전남대 상공엔 헬기까지 등장

용접공이 필름 숨겼다는 금고 뜯었으나…

영화 내용은 크게 별다른 것은 없었다. 노조 결성을 둘러싼 노동자들의 투쟁과 반목, 그 와중에 일어나는 노조 파괴 전문가들의 개입과 그에 대한 저항 정도가 영화의 골자였다. 구사대 깡패들의 폭력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공장 점거를 시작하자 또다시 깡패들이 들이닥치고 한때 회사 편에 서 있던 노동자까지도 분노하여 공구를 들고 달려나가는 장면에서 영화는 끝났다. 요즘 시각에서 보면 ‘이게 끝이야?’ 허탈한 질문까지 입에 물 공산이 크지만 이 영화는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소용돌이를 불러왔다.

“모든 예술 가운데 영화가 가장 중요하다”는 레닌의 말을 어디서 들은 것일까. 당시 노태우 정권은 이 영화가 상영되면 하늘이 무너질 듯한 기세로 <파업전야>만큼은 막겠다고 선언했다. 이 영화에 대한 트라우마가 얼마나 컸는지 몇 년이 지난 뒤에도 어느 외국 영화제에서 <파업전야>를 초청하자 영화진흥공사가 나서서 영화제 집행위원회 쪽에 상영 중단을 요구하는 ‘추태’를 부릴 정도였다. 정부가 아무리 눈에 불을 켠들 “몇 달간 쉬고 있던 기계를(영화 촬영지는 실제 파업 중인 공장이었다고 한다) 노동자들이 밤새워 보수하고 기름칠을 하여 기계를 돌리고 조연은 물론 엑스트라도 마다하지 않은” 도움으로 완성된 영화가 사장될 리는 만무했다. 마침내 1990년 4월6일 예술극장 한마당에서 영화가 개봉되자 종로구청은 득달같이 대표 김명곤을 고발했고 영화사 장산곶매에는 압수 수색 영장이 떨어졌다. 당국은 한숨을 돌렸겠지만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사이에도,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의지의 한국인’들은 많았다.

무슨 중세 시대 밀사처럼 알몸에 필름을 칭칭 감고 그 위에 천연덕스럽게 옷을 걸친 사람들이 대학가로 스며들었고 16밀리 영사기도 분해해서 대학 내로 반입됐다. 극장에서 보지 못한다면 우리 학교 강당에서 틀겠다는 대학생들 앞에서 공권력은 용서할 수 없다며 군화 끈을 조여 맸고 마침내 당시 한국 사회의 양대 물리력이라 할 학생운동 세력과 공권력 간의 일대 대회전이 전국 각지에서 펼쳐진다. “영화를 보는 것이 곧 투쟁”이었던 시대였다.

대회전의 절정은 전남대학교에서 있었다. 당연히 다른 곳에서처럼 경찰들이 시비를 걸 것이지만 전남대학생들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왕년의 빨치산들처럼 지리산에서 합숙 훈련도 하며 무술까지 익혔다는 전설이 무성한 학생운동 집단의 최정예 오월대 등이 버티는데 별일이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1990년 4월13일 영화 상영 시간이 다가오면서 광주의 후예들은 그만 입을 딱 벌리게 된다. 헬리콥터가 굉음을 내며 전남대 상공을 비행하는 가운데 1천명이 넘는 전경들이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고 포클레인으로 정문을 뜯어버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작전을 전개한 것이다. 아마 영화 한 편에 그 정도의 병력과 장비가 동원된 일은 세계 역사에 전무후무하게 빛날 것이다.

고려대학교에서는 개그콘서트 같은 일이 벌어졌다. 2008년 8월 중앙일보에 실린 <파업전야> 장동홍 감독의 회고다. “상영 당일 (봉쇄로) 필름이 못 갈 것 같아서 미리 갖다 놨다. 총학에서 필름과 영사기를 보관해놓고, 상영 당일에 영화를 틀 수 있게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 담당자가 갑자기 어디를 간 거다. 금고에 필름을 보관했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급해서 용접공을 불러서 금고를 뜯었다. 근데 옆에서 지켜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든 거다. 저걸 뜯었는데, 안에 필름이 없으면 어떡하지라는. 그런데 정말 없는 거다. 큰일났다 싶을 때 어떻게 그 담당자가 우여곡절 끝에 도착했다. 나중에 하는 말이 사람들한테 혼란을 주려고 말을 한 게 금고에 넣는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다른 곳에 감춰 놓은 것이다.”

영화 <파업전야>, <한겨레> 자료사진
박상민, 신현준, 김승우, 정두홍, 임창정…

지금 이 얘기를 10대, 20대에게 들려주면 아마 그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와 쩐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데요.” 그랬다. 한국 영화가 다시 기지개를 펴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던 1990년은 그런 ‘영화 같은’ 시절이었다. 모든 나라의 역사가 그렇겠지만 한국의 역사는 영화의 소재로 쓰이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사건사고들이 그득했고 한 영화를 둘러싸고도 ‘영화 같은’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 경험들은 이후 한국 영화의 풍요로운(?) 자산이 된다.

영화 <장군의 아들>에 비친 젊은 배우들, 박상민, 신현준, 김승우 등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영화의 동량들로 남아 있고, 최고의 무술감독 정두홍도 이 영화를 통해 데뷔했다. 영화 <남부군>에는 터프가이 최민수가 소심한 문학청년으로 등장하고 톱스타 최진실이 단역 같은 배역으로 반짝이고 있었으며 만능 엔터테이너 임창정이 잠깐 나오는 소년병 빨치산으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파업전야>에도 한국 영화의 뒷날을 장식할 이름이 내걸려 있었다. <파업전야>를 감독한 장동홍은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을 만들었고 한국 영화의 또 하나의 분수령이라 할
<파업전야> 상영을 막겠다는 공권력과 “반드시 우리 학교에서 영화를 틀고 말겠다”는 학생들의 굳은 의지가 곳곳에서 충돌을 불렀다. <파업전야>의 대학 상영 포스터. <한겨레> 자료사진
<접속>의 장윤현, 빨치산 소년병 임창정의 매력을 한껏 발산한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의 이은, <알 포인트>의 공수창 등 쟁쟁한 이름들이 그때 <파업전야>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영화사가 영화를 직접 배급한다는 소식에 필사적인 반대 시위에 나서야 했고 극장에 뱀을 푸는 극단적인 저항까지 마다하지 않아야 했던 한국 영화는 1990년 ‘영화 같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됐다.

<장군의 아들>의 임권택 감독은 사실상 그 영화를 ‘쉬어가는 페이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길소뜸> <씨받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등 연속적인 화제작을 만들었던 그는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이 <장군의 아들>을 권했을 때 섭섭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내 작품 만들 참인데 다시 액션영화-60년대 임권택 감독이 기억도 못할 만큼 찍었던-라니’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이태원 사장은 회고한다. 그래서 ‘쉬어간다고 생각하고 만들자’고 했던 영화였는데 그것이 대박을 쳤다. 이태원 사장은 다시 임권택 감독에게 말한다. “이제는 예술영화 한 편 만드시죠.” 이는 또 하나의 기적의 씨앗이 된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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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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