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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7.18 18:36 수정 : 2014.07.20 14:48

이제는 인터넷 제국의 거대한 영토 아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피시통신의 파란 화면.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과 모임과 정보와 뉴스들이 있었다. ‘하이텔’과 ‘천리안’의 이름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25) 피시통신

신입사원 때다.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지는 몰라도 적어도 내 앞길만큼은 희망과 화사함으로 넘치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무렵, 어느 날 갑자기 신입사원 전체가 호출됐다. 어리둥절 회의실에 둘러앉아 있던 우리에게 한편의 영화 시놉시스와 대본이 주어졌다. 읽어보고 영화가 괜찮을지, 흥행에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예측해보라는 것이 윗분들의 말씀이었다.

본부장님이 좌중의 소감을 물었을 때 흘러나온 소리들은 무척이나 삐딱하고 까탈스러웠다. 나는 “그렇게 큰 울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피시(PC)통신 문화에 편승해 보려는 시도 정도로 보입니다”라고 얘기했고 다른 동기들의 평도 신랄했다. 어떤 동기는 “대중이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라며 “이 영화에 투자하는 것에 적극 반대합니다”까지 나아갔다. 영화의 내용은 전혀 모르는 남녀가 피시통신 채팅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서로 모르는 상태로 지나치기도 하고 어찌어찌 지내다가 서로를 발견하고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줄거리를 풀어놓으면 “혹시, 그거 영화 <접속> 아니에요?”라며 조심스레 묻는 분이 계실 것이다. 맞다. 그날 우리가 잔인하게 씹고 차갑게 내던진 시놉시스는 영화 <접속>의 그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신인급이었던 전도연을 한국을 대표하는 여배우로 부상시키고, 서울 관객 80만, 전국적 140만명(이 수치는 당시 한국 영화계에서 만만한 수치가 아니었다)을 끌어모은 히트작을 나와 내 동기들은 철저하게 몰라봤던 것이다.

한총련 회원게시판 개설되자
시위정보 입수한 컴맹 경찰은
기세등등하게 나우누리 사무실
들이닥쳐 압수수색 영장 제시
그 컴맹들 후예가 좌익효수?

벚꽃과도 같이 만개하였다가
삽시간에 사라져간 피시통신
자유로운 개인들이 연대의 망
형성하고 강한 힘을 냈던
기억들이야말로 소중한 유산

컴퓨터를 켠다, 10초 기다린다…

변명하자면 우리만 감이 떨어졌던 건 아니었다. 1997년 개봉 당시 이 영화는 극장주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당시 극장들은 이 영화를 흔쾌히 걸려고 하지 않았다. 스크린쿼터를 지키기 위해 극장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내건 셈이었다.” <접속>을 만든 명필름 대표 심재명씨의 말이다. 극장주들도 흥행 요소가 없는 평범한 멜로물로 봤다는 말이고 스크린쿼터 때문에 할 수 없이 걸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박이 났다.

이 영화가 개봉되던 1997년에 나는 결혼을 했다. 그런데 영화가 히트를 친 이후 부작용이 있었다. 나와 아내는 피시통신 동호회에서 만나 오래 알고 지내다가 결혼을 한 경우였는데 “어떻게 결혼하시게 됐어요?”라는 질문에 무심코 “피시통신 통해서요”라고 대답을 하면 거개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어머나, <접속>!”이라고 부르짖는 통에 난처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내는 ‘여인2’ 아이디를 가졌던 전도연이 아니었고 나 역시 한석규와는 천양지차가 있다. 더욱이 우리는 대화하면서도 몰라서 지나치고 그러다 다시 온라인으로 만나는 만남을 상상한 적도 없었다. 아내는 지금도 무색무취했던 연애 기간을 탓하건만 ‘피시통신’이라는 한마디에 우리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되곤 했던 것이다.

<접속>이 흥행한 이유는 많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199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그러나 이제는 인터넷 제국의 거대한 영토 아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피시통신 문화였을 것이다. 영화 <접속>에 주로 소개된 피시통신은 ‘유니텔’이었는데 당시에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천리안’인지 ‘하이텔’을 쓰는지, 또는 ‘유니텔’ 회원인지 ‘나우누리’인지를 묻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1999년에 방송되었던 어떤 프로그램을 다시 보아도 유니텔 등 피시통신을 통해 시청자들의 제보를 요청하고 있으니, 1990년대의 피시통신은 마치 벚꽃과도 같이 우리 곁으로 갑자기 왔다가 삽시간에 사라져 갔다.

피시통신이란 개인용 컴퓨터(PC)를 다른 컴퓨터와 통신 회선으로 연결하여 자료를 교환하거나 통신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말한다. 개개인의 연결보다는 정보 서비스 제공을 위한 호스트 컴퓨터 시스템에 가입된 사람들이 ‘접속’하여 소통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이 호스트 컴퓨터 시스템을 구축하고 사람들을 끌어들인 것이 ‘하이텔’이니 ‘천리안’이니 하는 이름들이었다. 나는 친구들 사이에 유명한 컴맹이었다. 플로피 디스크를 ‘바지’에 넣고 다니지 않으면 대기 중의 ‘컴퓨터 바이러스’에 오염된다고 실제로 믿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피시통신 입문은 조금 빠른 편이었다.

인터넷을 처음으로 사용한 날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피시통신을 처음 접하던 날은 분명하게 기억한다. 새로 장만한 컴퓨터에 모뎀이라는 것을 깔긴 했는데 사용법을 제대로 몰랐던 나는 컴퓨터를 팔았던 용산전자상가 직원으로 하여금 퇴근길에 우리 집에 들르게 만든 진상손님이었다. 컴맹 손님에 질려 버린 직원이 꼼꼼히 적어 준 매뉴얼, “1. 컴퓨터를 켠다. 2. 10초 기다린다……” 등등 유치원 원아들에게나 합당한 ‘매뉴얼’을 들고서 나는 처음으로 피시통신에 ‘접속’했었다. ‘atdt 157’ 이 암호 같은 숫자를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01410은 그 뒤에 나왔다) 그걸 누른 뒤 숱한 ‘통화중’ 신호 이후 기적같이 ‘띠~~ 라 라~~치지지직’ 하는 묘한 접속음에 환호해 본 경험도 지니고 있으실 것이다. 그리고 경북대학교 전자공학과 동아리 하늘소가 만들었다는 ‘이야기’ 프로그램의 파란 화면은 곧 마술처럼 나를 수많은 아이디가 범람하는 피시통신의 호수로 나를 인도했다.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모임이 있었고 정보가 있었고 뉴스들이 있었다.

신문과 방송은 나 혼자 보고 흘려보내면 그만이었지만 통신 공간 안에서는 개인들이 모여들어 치열하게 토론하며 의견들을 교환하고 있었다. 듣도 보도 못한, 하지만 재능은 풍부한 것 같은 아이디들이 주옥같은 시와 그럴싸한 소설들을 올려 두고 있었고(물론 반대의 경우는 더 많았고) 돈도 없고 갈 곳도 없고 불러낼 사람도 애매한 야밤에도 피시통신에만 접속하면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사람들은 그 와중에 또 ‘잠수’하며 연애질을 했고 누군가 자신에게 ‘접속’하기를 기대하며 외로운 채팅방을 열기도 했다. 노인들도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어 소통의 즐거움을 누렸고 이른바 ‘초딩’들도 부지기수였다. 하이텔 ‘플라자’(아무나 의견을 올릴 수 있었던 토론장)에서 실컷 싸우다가 알고 보니 초딩이더라며 기가 막혀 하는 일도 흔했다.

이제는 인터넷 제국의 거대한 영토 아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피시통신의 파란 화면.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과 모임과 정보와 뉴스들이 있었다. ‘하이텔’과 ‘천리안’의 이름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온라인에서 ‘님’이란 호칭 시작된 사연

당연했다. 한국 사회에서 이름 석자조차 밝히지 않고 장유유서를 벗어나서 어울릴 통로가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 결과 나온 것이 ‘님’이라는 호칭일 것이다. 들은 얘기로 피시통신의 초창기 소규모 비비에스(BBS) 서비스에서 활약했던 한국 피시통신의 선구자(?)들 간에 큰 싸움이 일어났다고 한다. 한명은 중년이었고 한명은 어렸다. 결국 “너 몇 살이야?”라는 싸움이 되는 것을 본 회원들이 온라인상에서는 서로를 ‘선생님’으로 부르자고 했다가 그건 좀 아니라는 의견을 거쳐 다시 ‘님’으로 조정된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한 소규모 집단 내부의 약속이, 통신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호칭으로 퍼져 나간 것이다. ‘님’자가 붙으면 만사가 편했고 이는 오프라인으로 번져 은행이나 서비스센터 같은 공간에서도 ‘아무개씨’보다는 아무개 ‘님’이 즐겨 사용되기 시작했다.

채팅방에서 ‘형민 님’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의 그 산뜻한 느낌, 나아가 선진적인 문화를 영위하고 있으며 ‘통신인’으로서 살게 됐다는 자부심 비슷한 착각은 꽤 오래 지속됐다. 하지만 컴맹의 피시통신 적응은 부단히 힘든 일이었다. 어느 날 채팅방에서 한창 이야기꽃이 피는데 누군가 나에게 귓속말을 걸어왔다. “[귓속말] 혹시 아무개 아세요? 제 친구인데.” 귓속말은 어떤 키를 눌러서 모두가 사용하는 채팅방에서 특정한 사람에게만 전달되는 기능인데 나는 그걸 몰랐다. 그래서 ‘아, [귓속말]이라는 걸 앞에 붙이면 그 방의 다른 사람들은 사적인 대화로 생각하는구나’라고 짐작했던 나는 열심히 타자를 쳤다. 즉 괄호 열고 귓속말 치고 괄호 닫고…. “[귓속말] 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다 보이는 귓속말. 누군가가 지금 뭐하는 거냐고 물어왔고 더듬더듬 나의 진의를 밝혔을 때 나는 순식간에 그 동호회의 유명인사가 되고 말았다.

당시 나는 10개가 넘는 동호회에 가입돼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랬다. 그만큼 사람들의 관심과 기호, 열정과 참여의 크기에 따라 수많은 연결들이 종횡으로 이어졌고 시와 도의 경계를 넘어 교차됐다. 혈연·지연·학연으로 구성되던 우리 사회의 관계가 확장되는 공간. 내가 제주도 대학생과 친구가 되거나, 울릉도 총각과 목포 아가씨가 피시통신상에서 만나 연애를 하는 곳이,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피시통신은 스타도 만들어냈다. 피시통신이 아니었으면 <퇴마록>의 작가 이우혁은 지금쯤 전공을 살려 자동차 부품과 씨름하고 있을지 모르며, 종종 술도 함께 먹었던 동호회 선배가 한국 문단의 젊은 작가군 중 대표주자로 떠오르는 일도 쉽지는 않았으리라. 피시통신이 아니었던들 하이텔 유머동, 횡수동(횡설수설동)에서 활약한 그 사람이 저 유명한 ‘디시인사이드’를 이끄는 그분이 어찌 될 수 있었겠으며 오늘날의 난다 긴다 하는 인터넷 ‘논객’들의 칼날이 어디서 벼려졌겠는가. ‘혹 무슨 불순한 일이라도 벌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전통적인 피해망상의 한국 정부도 이 새로운 공간에 무심하지 않았다.

1993년 9월7일 피시통신 천리안 내 ‘현대철학동호회’에 당시 반국가단체로 규정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옹호하는 글이 올라오고 천리안의 운영자는 이를 빌미로 동호회 운영을 폐쇄하고 수사기관에 알린다. 회원 수백명 규모의 동호회에 정부가 내민 칼은 자그마치 ‘대검찰청 공안부’였다. 1993년 12월, 결국 현대철학동호회 회장 김형렬이 구속된다. 이후 몇 명의 통신인이 구속되는데 그들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공산당 선언’을 게시판에 올린 것도 있었다. 오늘날 서울대학교 선정 인문 고전 시리즈에 선정돼 있는 ‘공산당 선언’ 말이다.

가장 웃지 못할 이야기는 지금까지 정보인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장여경의 기억에서 나온다. “1990년대 중반 피시통신 나우누리에 한총련 CUG(회원 전용 게시판)가 개설됐습니다. 그런데 한총련의 불법시위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압수수색영장을 들고 나우누리 사무실에 들이닥쳤습니다. ‘한총련 방이 몇호실이야?’ 하면서요.” 나우누리 직원은 갑자기 들이닥친 이 기세등등한 컴맹들 앞에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압수수색 영장을 마패 삼은 이 가련한 어사들을 위해 게시판에 올린 글을 복사해주었다고 한다. 이 컴맹들의 후예가 지금은 어느 골방에 틀어앉아 “좌익효수”니 “전라도 홍어”니 하고 악성 댓글을 달고 있는 비겁자들이라고 생각하니, 그래도 이제는 접속해서 댓글이라도 달 줄 아니, 역사는 발전한다고 해야 하는 건가.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에서의 활약

그러나 이런 일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새로운 공간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찾았고,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외쳤고,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일을 계속했다. 역시 피시통신 세대이자 전(前) 민주노총 정보통신부장 최세진의 말을 들어 보자.

“1995년 4월 대구에서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로 횡단보도 위에서 신호대기 중이던 101명이 사망하고 202명이 부상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케이비에스(KBS)는 속보를 내보내지 않고 야구중계만 했다. 방송에서 그 속보를 알리지 않자 현장 근처에 살던 학생이 피시통신에 올려 전국에 알렸는데, 당시 한국에서 처음으로 ‘온라인 시위’가 진행되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은 두 달 남긴 ‘지자체 선거’를 염려한 청와대의 지시로 인한 보도 통제였다.”

온라인 시위를 넘어서 사람들은 오프라인에서도 크게 활약하게 된다. 바로 그 두 달 뒤 삼풍백화점이 붕괴됐을 때 하이텔 자원봉사 동아리 ‘누비누리’에는 회원들에게 삼풍백화점 앞으로 모이자는 글이 올랐고 이후 각종 동호회와 토론방 등에서 자발적인 자원봉사 움직임이 조직돼 수많은 회원들이 현장에 모여들었다. 그들 중 일부는 각 병원 영안실에 컴퓨터를 설치하고 무시로 실려오는 주검들의 특징과 유품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단일 게시판에 올려 속수무책으로 울고 있던 유족들에게 절실한 도움을 제공하는 한편, 긴급한 헌혈 요청이나 부족한 지원 품목을 게시하여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것은 한국에서 ‘자원봉사’라는 개념의 효시였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 우리 곁에 다가왔다가 순식간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피시통신이 남긴 가장 소중한 유산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방송에 따라, 당국의 지시에 따라 동원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인 참여의 공간이 더 큰 연대의 망을 형성하고 더욱 강한 힘을 낼 수 있었던 기억들. 피시통신은 사라졌으나, 그런 연대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일은 그 이후로도 계속돼 왔고 앞으로 이어질 것이기에. 그런 힘들이야말로, 통신 동호회 게시판에 ‘공산당 선언’이 올랐다고 칼을 빼들기에 바쁘거나, 자원봉사자들이 희생자들 시신을 살피고 기록하는 동안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기만 하는 ‘적폐’들을 사라지게 하는 힘이 될 수 있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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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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