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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0월28일 휴거론을 주장한 다미선교회의 설립자 이장림 목사가 그로부터 14년 전인 1978년에 번역해 출간했던 어니스트 앵글리 원작 소설 <휴거>의 표지. 이장림은 본래 정통파 개신교 목사였고, 말세와 재림에 대한 거대한 꿈은 한국 대부분의 기독교 교회가 신봉하는 믿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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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3) 1992년 휴거 소동
“형제 여러분, 이스라엘 시간으로 열두십니다!”
1992년은 내가 군대를 제대한 뒤 대학으로 돌아간 해였다. 여느 날처럼 술추렴을 한 뒤 들어선 술집 화장실에서 나는 특이한 낙서를 봤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나 “파쇼 타도” 또는 “누구야 사랑해” 등등의 잡다한 낙서 위에 누군가 스프레이로 쓴 낙서였다. “1992년 10월28일 휴거.” 마치 철거촌의 깡패들이 협박하듯 담장에 써 놓는 시뻘건 글씨로, 대문짝만하게 말이다.
휴거론을 주장하는 단체는 ‘다미선교회’라고 했다. ‘다미’는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라’는 뜻이었다나. 다미선교회를 이끈 사람은 이장림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휴거’의 개념을 처음으로 국내에 도입한 사람이기도 하다. 1978년 어니스트 앵글리의 예수 재림 소설 <랩처드>(Raptured: ‘황홀한, 환희의’라는 뜻)를 번역하면서 처음 사용했는데 이 휴거는 한자어다. ‘휴거(携擧).’
성경에는 이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데살로니가 전서’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라는 말씀이 등장하는데 이때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짐’ 즉 공중 들림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예수 재림의 말세가 되면 선택받은 자는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진다는 것이다. 이장림은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예언했던 것이다. 이 휴거론의 파장은 예상 밖으로 컸다.
문제의 1992년 10월28일 그날 흰옷 차려입은 성도들 집결
자정 가까워져도 아무 일 없자
“우리 시간 아닌 이스라엘 시간”
이스라엘 시간 돼도 아무 일 없자… 같은해 5월7일에도 비슷한 풍경
“타 종교에도 구원 길 있다”는
견해 표명했던 감신대 학장은
재판위에서 최악의 출교 처분
종말·심판론은 주류 기독교의 것 자신은 대상자 아니라는 이장림 목사 멀쩡히 잘 살던 철도원이 휴거에 대비한다며 가족을 데리고 잠적하는가 하면, 종말론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부모를 원망하며 음독자살한 여학생도 있었다. 전 재산을 팔거나 재산의 태반을 매각해 교회에 바치고 10월28일까지만 연명할 재산을 들고 기도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었다. 전국적으로 종말론 신도는 수천명에 이르렀고 해외 지부까지 있었다. 신도들 가운데는 들어올려질 때 몸이 가벼워야 한다는 이유로 낙태를 한 이들도 있었다.(자신의 하나님을 뱃속의 아이 무게도 감당 못할 만큼 약골로 여기다니. 이런 믿음이 부족한 자 같으니라고.) 일시적인 해프닝으로 보기에는 종말론에 빠져든 사람들 수가 심상치 않았다. 그로 인한 피해도 방방곡곡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당국도 손을 놓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 1992년 8월12일 대검찰청은 산하 수사기관에 “시한부 종말론이 확산되면서 일부 신자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가산을 교회에 헌납하거나 일부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학업을 중단한 채 가출하는 등 이른바 종말론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비화함에 따라 이에 대해 본격수사를 벌일 것”을 지시한다. 하지만 신도들이 스스로 헌납했다고 주장하는 이상 손쓸 방법 또한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마침내 검찰은 이장림을 옭아맬 단서를 찾아낸다. 이장림이 1993년에 만기되는 환매조건부 채권(RP)을 구입한 사실을 찾아낸 것이다. 1992년에 휴거될 사람이 왜 환매조건부 채권을 구입한단 말인가. 이외에도 수십억원을 신도들로부터 받아 유용한 사실을 더해 검찰은 1992년 9월24일 이장림 목사를 구속한다. ‘휴거’ 한달 전이었다. 그러나 이장림은 억울하다며 피를 토했다. “저는 이번 휴거(携擧) 대상자가 아니고 ‘환란시대’에 지상에 남아 순교해야 할 운명입니다. 그래서 활동비를 준비해 둔 것뿐입니다. 신앙생활을 충실히 한다는 이유만으로 이 법정에 서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현실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습니다. 선교회를 설립한 이후 단 한 번도 신도들에게 헌금을 강요한 적이 없습니다. 한 신도가 아파트를 팔아 헌금을 낼 때 무작정 사양하는 것은 그의 독실한 믿음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해 임시로 보관만 했을 뿐입니다.” 이장림 목사가 구속됐지만 휴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믿음은 불타오르기만 했다. 자신들의 선지자에 대한 박해는 휴거 이전의 프롤로그로만 보였고 고립된 교회 안의 믿음은 불길처럼 타올랐다. 아예 가족과 집을 팽개친 신도들은 각 교회에 모여 집단생활을 하며 휴거를 기다렸다. 심지어 10월25일 이장림 목사가 사과 성명을 내어 ‘휴거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선언했으나 이미 또 다른 선지자(당시 고등학생이었다고 한다)를 새로이 영입(?)한 종말론 신자들은 아랑곳없었다. 문제의 휴거일 당일이었는지, 직전의 어느 날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서울에 가을비답지 않은 소나기가 쏟아진 날이 있었다. 하늘이 시커멓게 되어 낮인지 저녁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정말 휴거되는 거 아니야?” 내가 중얼거렸을 때 친구가 뒤에서 도발을 걸어왔다. “너는 무거워서 안 들려.” 나도 이렇게 받아쳤다. “너는 죄를 많이 지었으니 나랑 남겠네.” 시커멓게 된 하늘과 ‘우르릉, 쾅쾅’대는 뇌성벽력을 들으며 ‘이거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 아닌가?’ 하는 싱거운 두려움이 설핏 들었음을 고백한다. 아마 신도들은 세차게 쏟아지는 비와 지축을 울리는 천둥소리를 들으며 환호했으리라. 드디어 10월28일이 왔다. 전국 166개 종말론 교회에는 하나님 눈에 잘 띄려는 취지인지 새하얀 옷을 차려입은 성도들이 집결했다. 그뿐만 아니라 종말론 따위를 믿지 않는 시민들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주변에 운집했고 휴거가 안 됐을 경우의 비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경찰도 총출동했다. 신도들의 휴거를 보여주기 위해 대형 텔레비전(TV)을 설치한 교회도 있었고 시엔엔(CNN), 로이터 등 외신들한테 이 역사적인 휴거의 순간을 취재하는 은혜를 베풀어 준 교회도 있었다. 마침내 밤이 오고 자정이 가까웠지만 애석하게도 신도들은 중력을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방 한 마리가 불빛 속을 날아가자 “나방이 휴거된다”고 환호성을 지르며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렸지만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의 머리털 한 오라기도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주시지 않으셨다. 자정이 넘었어도 신도들의 몸은 땅 위에 머물러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일부 교회에서 목사들은 담을 넘어 도망치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책상을 둘러엎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한테서 들은 얘긴데 어느 신도는 흥분하는 동료들 앞에서 이렇게 외치기도 했다고 한다. “형제 여러분! 우리 시간이 아니라 이스라엘 시간으로 열두십니다!” 이스라엘 시간 12시가 돼도 휴거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최고의 코미디는 바다 건너 필리핀에서 벌어진 일일 것이다. 한국 종말론자들의 선교를 통해 200명의 필리핀인들이 집결하여 휴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12시가 넘어도 휴거가 일어나지 않자 설교자가 이렇게 선언했다고 한다. “교통체증 때문에 주님이 늦게 오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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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3월 다미선교회의 한 신자가 서울역 광장에서 ‘세계의 종말’을 알리는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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