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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29 18:30 수정 : 2014.08.29 20:44

1998년 7월7일 유에스 오픈 결승전에서 물웅덩이에 떨어진 공을 치기 위해 신발과 양말을 벗던 박세리 선수.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28) 박세리와 박찬호

1998년 아이엠에프(IMF)의 칼바람이 한국인들의 살갗을 에고, 찢고, 심지어 얼려 죽이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렇게 됐지?” 바로 몇 해 전만 해도 대한민국은 선진국의 환상에 들떠 있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고 국민소득은 1996년 이전까지 연평균 7.5% 이상 고속 성장을 거듭했으며 온 세계의 ‘명품’들이 한국에 상륙해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그러나 1997년 1월 한보그룹 부도는 파멸의 봉홧불처럼 불길하게 타올랐고 이후 ‘대마불사’, 즉 대기업은 쓰러지지 않는다는 신화가 무색하게, 그때껏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오르고 땅 넓은 줄 모르고 사업을 확장하던 대기업들이 힘없이 고꾸라지기 시작했으며, 환율은 날마다 벼룩처럼 뛰어올랐다.

얼마 전까지 누릴 것 누리고 즐길 것 즐기고 살던 사람들의 삶이 일시에 나락으로 굴러떨어졌으며, 후일 ‘아이엠에프 세대’라 불리는 젊은이들은 취직 길이 막혔다. 많은 사람들이 더이상 막막할 수 없는 방황을 거듭해야 했으며 그때껏 당연한 권리이자 상식이었던 것들이 순식간에 닿을 수 없는 무지개로 멀어져 버렸다. 그 암울했던 1998년 한국 사람들에게도 낙은 있었다. 그 낙이란 충청도 공주 출신의 박씨 성을 가진 젊은이들이었다. 골프의 박세리, 그리고 야구의 박찬호.

양말 벗고 물에 들어간 박세리
연못 기슭의 공을 성공적으로
밖으로 쳐내던 순간의 그 환호
LPGA 이어 US오픈에서도 우승
IMF로 멍든 가슴에 뚫어뻥!

메이저리그를 호령한 박찬호
97년 10승 넘어 98년 두자리 승수
에인절스 투수의 인종차별 발언에
이단옆차기와 함께 최악 난투극
그러나 대리만족을 불렀으니…

어느 아빠의 ‘골프 칩샷’ 도전

나는 그제나 지금이나 골프를 못 친다. 골프 반대론에 동조해서라기보다는, 우선 운동신경이 슬플 만큼 둔하기 때문이다. 즐길 만한 경제적 여유도 없다. 지금도 그럴진대 하물며 당시에는 골프의 ‘이글’이 무엇이며 ‘보기’가 무엇이며 ‘칩샷’은 어떤 것이며 ‘벙커’는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니 엘피지에이(LPGA, 미국 여자 프로골프협회) 대회가 어떤 대회인지도 전혀 관심 밖이었다. 1998년 5월 박세리라는 선수가 역대 최연소로 엘피지에이 대회에서 우승했다고 온 매스컴이 떠들썩할 때도 나는 시큰둥했다. 더듬더듬 스포츠에 일가견이 있는 선배와 나눈 대화는 이랬다. “그거 대단한 건가요?” “대단한 거지 인마. 피디랍시고 그것도 모르는 네가 더 대단하다.”

그러나 그로부터 두달 뒤 박세리가 유에스(US) 오픈에 도전했을 때의 경기는 내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았다. 회사에서 밤샘 작업을 하다가 어찌어찌 보게 된 유에스 오픈 결승전. 박세리의 공이 물웅덩이 근처에 떨어졌다. 아무리 골프에 어두운 사람이라도 공이 골프장 안에 있는 모래밭이나 물속에 빠지면 곤란한 것이야 어찌 모르랴. 상대 선수의 여유만만한 웃음과 웅덩이 기슭의 공을 주시하며 내려갔다 올라갔다를 반복하는 박세리의 심각한 표정은 극명하게 대조됐다. “저럴 때 어떡하는 거예요?” “벌타를 받고 드롭 하느냐 어떻게든 쳐 보느냐지.”

마침내 결심을 한 듯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박세리가 물에 발을 담갔다. 그가 연못 기슭의 공을 성공적으로 밖으로 쳐내던 순간 한국 사람들은 우레와 같이 환호했다. 해냈구나! 박세리는 그 난관을 딛고 또 한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후일 미국 스포츠 전문 케이블 채널 <이에스피엔>(ESPN)에 의해 미국 여자 골프 오픈 사상 역대 명장면 5에 뽑힌 이 맨발의 칩샷은 한편의 공익광고로 한국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게 된다. 과거에는 방송 금지곡이었던 운동권 가요였던 노래, 가수 양희은의 유장한 목소리에 실린 ‘상록수’를 배경음악으로 하는 박세리의 맨발의 투혼 장면을 편집한 공익광고가 그것이다. 그 광고는 한동안 툭하면 티브이를 쩌렁쩌렁 울렸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그로부터 얼마 뒤 나는 <특명 아빠의 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게 됐다. 프로그램 참여 신청을 한 아빠에게 어떤 과제를 전달하고 1주일가량의 연습 시간을 준 뒤 스튜디오에서 도전하여 성공과 실패를 가리는 프로그램이었다. 어느 날 동네에서 용달업을 하는 분이 도전을 했고 면접 과정에서 이런 대화가 오갔다. “혹시 골프채 잡아 보셨어요?” “이, 이삿짐 나를 때 날라는 봤습니다만.”

바로 이 대화 때문에 그분은 ‘골프 칩샷’이라는 과제를 부여받는다. 25㎝ 높이의 장애물을 넘어 5m 앞의 홀에 홀인을 시켜야 하는 엽기적이도록 야박한 과제였다. 프로골퍼조차도 훌륭히 시범을 보여주지는 못했던 (합판 위에 얇게 인조 잔디를 두른 세트 특성상) 어려운 과제였다. 그걸 1주일 만에 해내라고 윽박질렀으니 담당 작가와 나는 아마도 천국에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골프 칩샷 과제를 한창 촬영하다가 박세리 선수 이야기가 나왔다. 딸들은 아빠도 박세리처럼 한번 해보라고, 그러면 잘할 수 있을 것이라며 눙치며 까르르 웃었고 곧 중년 아저씨판 맨발의 칩샷 장면이 코믹하게 연출됐다. 아빠는 양말을 벗고 딸들이 날라 온 대얏물에 발을 담그고 골프채를 휘두른 것이다. 딸들은 ‘상록수’의 일부를 목청껏 부르다가 데굴데굴 굴렀고 나 역시 촬영하다가 카메라를 끄고 배를 쥐고 웃고 말았다.

그런데 다음 날, 아버지는 정말로 일취월장해 있었다. 실제로 몇 번씩이나 홀에 공을 집어넣었고 도대체 골프채 잡은 지 하루 된 사람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실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때를 못 만난 비운의 골프 천재인가? 내가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그 부인이 한숨 섞인 답을 해 왔다. “저 양반 어제 오늘 골프공을 3천번쯤 쳤을 거예요. 잠을 거의 안 잤으니까.”

아버지가 밤늦도록 골프채를 놓지 않자, 어머니는 이제 그만 자자고 잔소리를 했다. 그때 아버지가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고 한다. “피아노만 생각하면 잠이 안 오네.” 원래 이 집에는 음악을 좋아하는 딸을 위해 무리해서 샀던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역시 아이엠에프 때 경제적 위기를 맞으면서 딸의 피아노는 중고 딱지가 붙은 채 집에서 들려 나가야 했다. 아버지는 그때 딸의 모습을 두고두고 잊지 못했다.

“너무 미안했어요. 딸애한테…. 오래 있던 살림살이 들어내면 그 아래 먼지가 깔려 있잖아요. 그 먼지를 닦아내면서 아이가 소리 없이 울고 있더라고요.” 아버지는 이 말을 하면서도 골프채를 휘둘렀다. 아마도 그는 피아노가 사라진 날을 떠올리면 결코 골프채를 놓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이엠에프 때 소중했던 것들을 순식간에 잃어버리며 피눈물을 흘렸던 한국의 수많은 가장들처럼, 아버지들처럼. 그 골프채를 휘두르는 와중에 아버지가 처연한 표정을 애써 지우며 얘기를 꺼낸 사람이 박세리였다.

1999년 6월6일 인종차별적 발언을 한 상대팀 애너하임 에인절스 투수 팀 벨처에게 이단옆차기를 날리던 엘에이(LA)다저스의 박찬호 선수. 메이저리그(MLB) 누리집 갈무리
두발당성, 그 가장 통쾌한 순간

“어제 대야에 발 담그고 이거 치는데 말입니다. 박세리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때 박세리 선수가 신발 벗을 때는 ‘야, 저런 상황에서 쳐볼 생각을 하는구나!’ 하고 놀랐고요. 또 얼굴이랑 팔다리는 새까만데 발은 양말을 신은 것처럼 새하얗지 않았습니까. 저도 참 힘들 때였는데 그 모습 보면서 나는 아직 멀었다 싶었습니다. 스물한살 여자애도 뭔가 해보겠다고 온몸이 새까매지도록 골프채를 휘두르고 다니는데, 나는 그만큼 했나 싶고.”

아저씨의 말을 들으면서 나 역시 그날 구릿빛 팔뚝과 종아리와는 달리 ‘양말을 신은 듯’ 너무도 새하얗게 빛나던 박세리의 발을 보며 느낀 전율이 생생하게 되살아왔다. 그렇게 골프를 전혀 모르는 중년의 사내와 청년 피디에게 박힌 기억 하나만으로 박세리 선수는 1998년 험악한 세월을 살던 한국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선물을 선사했던 것이다.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려던” 한국 사람들에게.

박세리 선수만이 아니었다. 바야흐로 충청남도 공주 청년들의 전성시대였다. 공주 처녀 박세리가 골프채를 휘둘러 천하를 자신의 손안에 홀인원 시켰다면 공주 총각 박찬호는 불같은 강속구로 메이저리그를 호령했다. 아이엠에프를 맞던 1997년 박찬호는 10승을 넘어섰고 1998년에도 두자리 승수를 거뒀다. 등번호 61번의 박찬호가 등판한 날이면 직원 전부가 티브이 앞에 모여들어 박찬호의 공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했다. 태평양 너머 전설로만 듣던 메이저리그 타자들이 박찬호의 공에 헛스윙을 하다 모자가 벗겨지고, 배트를 땅에 집어던지고 씩씩거리고 나가는 정경이 어찌나 속 시원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게 가장 인상 깊은 기억으로 남은 순간은 따로 있었다.

1999년 6월6일 박찬호는 애너하임 에인절스와의 경기 5회 말 타자로 등장하여 희생번트를 대고 1루에서 아웃됐다. 그런데 태그 와중에 에인절스 투수 팀 벨처와 언쟁이 붙었고 뭐라 뭐라 말이 오가는가 싶더니 박찬호의 손이 벨처의 얼굴을 밀었다. 순간 발끈해서 앞으로 나오는 벨처를 향해 박찬호의 단단한 몸뚱이가 허공을 날았다. 이단옆차기. 속칭 두발당성. 양 팀의 벤치는 1초 안에 깨끗이 비워졌다. 이 장면은 메이저리그 사상 ‘최악의 난투극’ 6위로 올랐지만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까닭 없이 그리고 약간은 비논리적으로 열광했다. “저 벨처인지 뭔지 하는 넘이 틀림없이 무슨 말을 했어! 자알 했다 박찬호! 잘했어!”

박찬호의 회고에 따르면 나의 지레짐작이 맞았다. 벨처가 인종차별적인 언사를 입에 담았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 어떤 삼진 장면보다 그 장면에 더 열광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나만의 감정이 아니었다. 박찬호의 회고록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를 보면 많은 한국인들이 그 장면을 ‘가장 통쾌한 순간’으로 꼽았다고 돼 있다. 왜였을까.

그건 아마도 형편없이 위축돼 있던 수많은 한국인들의 대리만족이었을지도 모른다. 연봉은 자기 몇십 배인 스타들 사이에서, 더구나 엘에이(LA) 다저스의 한때 영웅이었던 팀 벨처(그는 몇 년 전 엘에이 다저스 월드시리즈 우승의 주역이었다)에게 이단옆차기를 사정없이 들이댄 박찬호. 그는 “당신이 월급 주면 주는 거지 사람한테 이러면 안 되지!”라고 사장에게 소리치고 싶어도 꿈에도 그러지 못하는 소심한 직딩들에게 속을 비우는 ‘뚫어뻥’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즉 ‘정정당당한 승부’로 이긴 것도 통쾌하지만 부당한 모욕을 당했을 때는 물리적 응징을 가차없이 해 버린 용자(勇者)에 대한 경의가 발동했던 게 아니었을까.

박찬호에게도 1999년은 끔찍한 한 해였다. 두발당성의 해이기도 했지만 ‘한만두’의 해이기도 했다. ‘한만두’가 무슨 뜻인지 아시는가? ‘한 이닝 만루홈런 두 방’의 준말이다. 나는 그 경기도 기억한다. 상대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였다. 어쨌든 박찬호는 무사 만루에서 타티스라는 타자에게 홈런을 두들겨 맞는다. 그 뒤 솔로홈런을 또 맞았고 무슨 엉성한 야구 만화의 한 장면처럼 또 만루 찬스를 허용했다. 그때 또 타석에 등장한 타티스. 무슨 만화처럼 공은 또 펜스를 넘어갔다. 한 타자에게 한 이닝에 두 번의 만루홈런. 메이저리그의 그 긴 역사에도 유일무이한 기록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타티스의 헬멧은 당당히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다고 한다.

치욕적 ‘한만두’를 딛고 이듬해 18승

경기를 지켜보던 사람들도 넋을 잃었고 다들 자기가 홈런을 맞은 듯 얼굴들이 벌게 있었다. 공중파 방송 황금시간대에 제작비 100억원짜리 드라마를 틀어서 시청률 0.5%가 나올 때의 피디가 그런 심경일까. ‘한만두’의 날, 박찬호 경기를 지켜보던 우리 모두는 얼이 빠졌고 자신들이 만루홈런 두 방을 얻어맞은 듯 망연자실했다. 그래서 나는 박찬호에게 1999년은 최악의 해였다고 기억했고, 박찬호 또한 그러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박찬호는 아니었던 것 같다.

“결과는 언제나 과거다. 반대로 과정은 현재다. 진심으로 생각해보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정말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진심으로 내가 창피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돌이켜보면, 사람들의 평가나 숫자적인 결과와는 다를 것이다.” 그리고 1999년의 악몽을 딛고 박찬호 선수는 바로 다음해인 2000년 메이저리그 18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한다.

충청도 공주 출신의 양박(兩朴) 선수에게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 수 있다. 암담했던 시절의 약소국 콤플렉스와 사대주의가 겹쳐진 비정상적인 열광이라는 비판 또한 수긍할 만하다. 현실 속 자신들의 무력함을 두 선수의 활약에 대신 투영하여 자족감을 구했던 일종의 마취제였다는 견해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게다가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하는 다소 밑도 끝도 없는 국책 광고의 주제가 된 다음에야.

김형민 방송 피디.
그러나 나는 그 시절을 빛냈던 두 박 선수에게 감사한다. 분명히 그들은 그 시절 한껏 처져 있던 사람들의 어깨를 다독이는 손바닥이었고 두드려주는 주먹이었고 꾹꾹 눌러주는 손가락이었기 때문이다. 엄동의 시기에 희망이라는 모닥불을 조그맣게나마 피워 올릴 수 있게 해준 불쏘시개의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대체 그 희망의 내용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희망이란 원래 가늠되거나 합리적으로 설명되는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다만 분명한 것은 그 두 사람이 “결과는 항상 과거고, 과정은 항상 현재”로서 결국 깨치고 나아가야 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하얀 양말 신은 것 같은 발’처럼 온몸으로 보여주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일 게다.

김형민 방송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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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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