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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9.26 18:44 수정 : 2014.09.28 09:50

휴대전화가 본격적으로 상용화되기 전인 1997년 12월의 휴대전화 이용자 모습. 오른손으로 무선호출기(삐삐)를 들고 통화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30) 통신 혁명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정말 구닥다리 시대의 인물로 보일 수도 있겠다. 내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문서 작성은 당연히 타자기였다. 타자 좀 칠 줄 아는 이들은 수업도 못 들어가고 타자를 두들기며 ‘선전전’에 동원되는 일이 많았는데, 어느 날 선배 하나가 환호작약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건 혁명이야!” 무얼 가지고 저러나 했더니 그건 전동타자기였다. “이렇게 오타가 났지? 그럼 이렇게 하면 지울 수가 있어!”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수정액 기능이 내재된 모양이었다. 이것으로 오타가 나도 눈 질끈 감고 넘어가거나 애써 타자 친 종이를 통째로 뜯어버려야 하는 고충이 끝장났다는 기쁨이 그 선배에게는 그렇게 컸나 보다. 그러나 그 ‘혁명’은 몇달도 못 가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말았다. 워드프로세서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잠깐 사이에 전동이건 수동이건 모든 타자기는 학교 안에서 사라졌다.

1990년대에는 이렇게 기술의 급속한 발전 속에 잠깐 반짝했다가 스러져 간 비운의 기계(?)나 물건들이 비일비재했다. 전동타자기의 ‘혁명’을 잔인하게 진압했던 워드프로세서도 두어 해 뒤에는 고물상으로 부지런히 팔려나갔고 386컴퓨터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지만 1년이 무섭게 구닥다리 딱지가 붙었다. ‘이렇게 편리한 것이 있다니!’라며 감탄했던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도 1990년대 후반이 되면 그걸 넣을 수 있는 컴퓨터를 찾기조차 어려워졌다.

1993년 광주대 휴대전화 커닝사건

이런 비운의 기계 목록 가운데 시티폰이라는 이름의 기계도 있었다. 삐삐와 찰떡궁합인 이 기계는 전화를 걸 수는 있지만 받을 수는 없었던 전화기였다. 보통 휴대전화보다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었지만 공중전화 부스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먹통이 되어 버리는 ‘개인용 공중전화’라는 악평을 듣기도 했다. 결국 시티폰은 서비스 실시 후 단 2년 만에 역사 속으로 퇴장해 버렸다. 휴대전화가 퍼져나가던 흐름 속에서 살포시 생겨났다가 꼬르륵거리며 사라져 버린 작은 섬이었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보았던 <소년 중앙>이니 <새소년>이니 하는 어린이 잡지의 단골 기사들 중에 “21세기, 이렇게 변한다” 부류의 기획이 많았다. 지나고 보니 그 예언들은 거의 모두 맞아떨어졌다. 얼굴을 보며 하는 화상전화, 한국말을 하면 영어로 번역해 주는 번역기, 2시간 만에 서울·부산을 왕복하는 기차 등등. 그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가지고 다니는 전화기’였다. 언제 어디서든 차 안에서든 소풍 가서든 전화를 걸고 받을 수 있는 전화기는 꽤 오래된 꿈이었던 셈이다.

정부 고위층과 기업 사장님쯤 되면 차 안에 두고 쓰는 ‘카폰’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가격은 어마어마했다. 1984년 기준으로 포니차 두 대 값인 400만원이었으니, 당연히 그림의 떡이었고 쇼윈도 안의 명품이었다. 1988년 모토롤라가 한국에 상륙하여 휴대전화 시장을 개척했지만 전화기 가격은 240만원이었다. 삼성이 이에 대응하여 휴대전화를 생산했지만 그 가격도 180만원이었다.(그즈음의 대학 등록금이 70만원이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휴대전화는 부의 상징이었고, 1990년대 초반 대한민국 밤거리를 누비던 오렌지족임을 증명하는 필수 보유품 중의 하나가 휴대전화였다.

타자기에서 전동타자기로
워드프로세서로, 386컴퓨터로
차 두대 값 400만원짜리 카폰,
240만원짜리 휴대전화에서
2000년 휴대전화 2682만대 시대로

유선전화-공중전화와 달리
발신지 추적 안되던 휴대전화
이 점 악용한 범죄자들은
휴대전화 들고 산지사방 누벼
경찰은 사비로라도 살 수밖에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이지만 보급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언제 어디서나 전화를 걸고 받을 수 있는 휴대전화는 그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점차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상사로부터 ‘828282’가 찍히는 호출 전화를 받았지만 공중전화 줄은 길고 버스는 오고, 울며 겨자 먹기로 삐삐를 씹었다가 상사에게 “너 삐삐 안 받고 뭐 했어?” 박살난 직장인이 어찌 “내 보너스 받으면 휴대전화 하나 사고 만다!”를 부르짖지 않았을 것이며, 고향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사귄 지 며칠 안 된 애인의 삐삐를 받고 발을 동동 구르던 대학생이 앞자리에서 여유작작 통화하는 휴대전화 사용자를 어떤 눈길로 바라보았겠는가.

1992년 8월24일 <경향신문> 기사는 휴대전화 가입 대수가 14만대로서 비약적인 성장을 하고 있음을 보도하는 가운데 인구 1000명당 3.37대로서 대만의 7.4대나 말레이시아의 6.8대에 미치지 못함을 지적하며 2000년대에는 440만대의 휴대전화가 사용될 것을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예상은 대대적으로 빗나가고 말았다. 2000년 휴대전화 가입자 수는 무려 2682만명이었으나 8년 동안 무려 2만%에 가까운 성장세를 보인 것이다. 물론 그 안에는 나와 아내, 그리고 모든 가족과 친구와 동료들이 포함돼 있었다. 과거 제작 수첩을 들춰 보면 1997년을 기점으로 조연출로서 기록해 놨던 스태프들, 출연자들의 거의 모든 연락처가 삐삐에서 핸드폰으로 바뀌고 있다.

<주부대항퀴즈> 조연출을 할 때의 일이다. 퀴즈를 맞힌 주부들께 푸짐한 선물을 소개하는 차에 휴대전화 차례가 됐을 때 자리하고 있던 주부 4명의 입에서는 동시에 ‘오우!’ 소리가 튀어나왔다. 휴대전화가 걸린 문제만은 내가 맞히리라 눈에 불을 켜시는 것도 보였고 방망이를 쥔 손에 힘도 잔뜩 들어갔다. 한 주부가 휴대전화를 획득했는데 녹화 후 스튜디오 밖에서 나는 재미있는 흥정을 보았다.

“저기요, 제가 냉장고하고 티브이(TV) 드릴게요, 그 휴대전화하고 바꿔 주시면 안 돼요?”

“저도 필요한 거라….”

“제가 장사를 해서 꼭 필요해서 그래요. 미싱까지 얹어 드릴게요.”

잠시 후 원래 휴대전화를 탔던 주부는 만족스런 거래 끝에 냉장고와 티브이와 미싱을 낑낑대며 용달에 싣고 떠났고 한 주부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가슴에 품고 의기양양 집으로 돌아갔다. 휴대전화는 그 정도의 위력을 지닌 물건이었다.

그러나 문명의 이기란 쓰는 사람들에 의해 곧잘 흉기 내지는 무기로 돌변하는 법이다. 휴대전화가 등장하자마자 그 편리함은 범죄에 악용되기 시작했다. 1993년 광주대학교에서 일어난 휴대전화 및 삐삐를 이용한 커닝 사건은 그 이후 유구한 역사적 선례가 된다. 후기 입시를 치르고 일찍 빠져나온 수험생으로부터 답안지를 입수하고 승용차 안에서 휴대전화로 교실 안의 수험생의 삐삐로 답을 전송하다가 발각된 사건이었다. 이처럼 휴대전화 사용 초기에 시사고발 프로그램 조연출이던 나는 휴대전화를 이용한 범죄 행각들과 자주 조우할 수 있었다. 심지어 내 두번째 휴대전화는 사기 범죄의 소산이었다.

2014년 소방용 장갑에 비견되는 이야기

신혼 시절 아내와 함께 어느 백화점에 들렀는데 당시 막 나오기 시작했던 피시에스(PCS)폰 특가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너무나 파격적인 조건이었기에 ‘011’을 쓰던 나는 아내의 채근에 못 이겨 ‘019’로 바꾸는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계약금을 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집으로 보내 준다는 전화기가 오지 않아 판매자에게 전화해 보니 묵묵부답이었다. 백화점으로 전화했더니 백화점 담당자는 더듬거리면서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저희가… 사기를 당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엘지(LG)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고요. 고객님을 비롯해서 1000여 분한테 계약금을 받아서 튀었습니다.”

“아니 연락처 같은 것도 없이 부스를 설치해 주신 겁니까?”

“저희가 가진 게 휴대전화 연락처밖에 없는데 그걸로는 추적이 아무것도 안 되더라고요. 고객님 잠시 기다려 주시면 저희가 엘지 측과 얘기해서 전화기를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99년 2월3일 <매일경제신문>의 독자 투고에는 한 경찰관의 호소가 실렸다. 내용인즉슨 휴대전화는 일반 유선전화와 공중전화번호와는 달리 발신지 추적이 거의 불가능하므로 이를 보완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범죄자들은 이 점을 악용해 휴대전화를 들고 산지사방을 누비며 범죄를 벌였고 경찰들 역시 이들을 잡기 위해 골머리를 앓으며 동분서주했다. 시사 프로그램 조연출을 맡아 각지의 경찰서를 제집처럼 드나들던 시절, 형사들은 100퍼센트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비싼 통화비 때문에 휴대전화의 유혹을 억지로 참고 있던 나로서는 감탄이 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경찰들은 휴대전화를 다 지급받았군요.” 그때 돌아온 어이없는 대답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나라에서 준 거 아니에요. 범인들이 죄다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면서 서로서로 연락하면서 도망 다니는데 어떻게 합니까. 우리도 사야지. 이거 다 우리 개인 돈으로 샀어요. 통화비도 개인이 내요.” 소방용 장갑을 ‘아마존’ 사이트에서 구입한다는 2014년의 소방관들의 슬픈 사연은 1990년대 경찰들의 기억에도 깃들어 있다. 왜 나쁜 일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지.

1996년의 겨울, 나는 휴대전화를 사이에 두고 악에 받쳐 뒤쫓는 경찰과 여유작작한 도망자 간에 벌어지는 대화를 목격할 일이 있었다. 서울 남쪽의 한 동네에서 제보 하나가 들어왔다. “한 동네 전체가 쑥밭이 됐다”는 것이었는데 막상 가서 자초지종을 들으니, 그렇게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기극이었다. 한 남자가 동네에서 돈놀이를 해 오다가 야반도주를 했다는 것이 사건의 골자.

화려한 수법으로 수백억원을 감쪽같이 챙겨 종적을 감추는 사기꾼들도 수두룩한데 이 정도의 가벼운(?) 사기를 방송 아이템으로 삼기는 어려웠다. 그때 우리 시야에 한 사람이 혜성과 같이 나타났다. 그는 그 동네 파출소 순경이었다. 그와 함께 피해 동네를 다시 한번 찾았을 때, 우리는 문제의 사기꾼이 정말이지 못할 짓을 하고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형편의 분들, 독거노인들, 노점상들, 행상 등등으로 구성된 그 동네 주민들은 은행 이자보다 훨씬 높게 이자를 쳐 주는 범인에게 돈을 맡겼고, 범인은 “귀신보다 더 정확히” 이자를 미리 건네면서 신용을 쌓아 갔다. “국회의원 나와도 그 사람은 될 거다”라는 신망 속에 쌈짓돈들을 긁어낼 대로 긁어낸 다음 그는 어느 날 새벽, 온데간데없이 증발해 버린 것이다.

성이 박씨라서 옛날 드라마의 제목처럼 촬영 내내 ‘박 순경’이라 불린 우리의 박 순경은 참으로 악착같이 범인의 뒤를 추적하고 다녔다. 하루는 파출소에서 밤새우며 취객들과 싸우고, 하루는 경기도 일대를 장돌뱅이처럼 돌아다니며 범인의 뒤를 쫓는 추적 과정에서 하나 얻어낸 성과는 범인의 핸드폰 번호였다. 위치 추적이 불가능하던 시절인지라 그 번호가 별반 도움이 될 일이 없었지만 어쨌든 그 번호는 꽁꽁 숨어 버린 범인과 선이 닿을 수 있는 가느다란 실이었다.

벨소리 확인하고 덮쳐라

박 순경의 전화에 마이크를 달고 통화를 시도했다. 몇 번 대기음이 들린 후 딸칵 소리가 났을 때 우리 모두의 귀는 팽팽한 긴장으로 바짝 당겨졌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진귀한 대화였다. “여보세요.” 느물느물한 남자의 목소리에 박 순경이 침착하게 대응을 했다.

“×××씨? 나는 ×××씨 쫓아다니는 경찰관입니다.”

일순 당황스런 침묵을 예상했건만 휴대전화 저편의 상대는 보통을 넘어선 인물이었다. “아이고, 수고하시네요.”

수고? 박 순경의 목소리는 더 낮아졌지만 더 단호해졌다. “그런 짓을 할 때 양심이 허락을 하던가요?” 그러자 수화기 속의 목소리는 두 배로 높아졌다. “시건방진 소리 하고 있어,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 당신 직분이 뭐야?” 그리고 전화는 딸칵 소리를 내며 끊겼다. 전화가 끊긴 뒤에도 박 순경은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고 휴대전화로 통화까지 했으나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대방을 향해 다짐 같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 직분이 있으니까 당신을 잡으려는 거 아니오.” 그는 오래도록 휴대전화를 놓지 못했다.

사기범 공개수배 방송이 나갔고 그 가증스런 사기 행각에 분노한 시청자들의 제보가 쇄도한 끝에 다른 경찰서 형사들에 의해 체포됐다. 체포한 형사에게 들은 바로는 그가 묵고 있는 방 밖에서 휴대전화를 걸었고 벨소리가 나는 걸 확인하고 덮쳤다고 했다. 언제 어디서나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를 확인하고서. 그런데 우리 회사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방송 후 첫 출근날 담당 피디(PD)들이 땡땡이를 치는 것은 일종의 관례였다. 선배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가족들과 놀러 가기로 했으니까 부장님 찾으시면 박 순경 만나러 갔다고 해라”고 지시한 참이었는데 덜컥 놀러 가는 날 오전 사기범 체포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선배를 대신해서 부장님께 보고하자 부장님은 크게 기뻐하시며 당장 후속 취재를 지시했다. “아, ○○는 박 순경 만나러 갔다 했지? 카메라팀하고 출동해서 만나라. ○○는 나한테 연락하라 하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나는 선배의 휴대전화로 득달같이 전화했다. “형, 어디세요? 뭐 수원 톨게이트? 당장 차 돌려요! 사기범 체포됐어요!”

김형민 방송 피디
‘언제 어디서나 전화를 걸고 전화를 받을 수 있는’ 휴대전화 덕에 선배 가족의 모처럼의 나들이는 파장이 났지만 부장님의 불호령은 면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2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이 어려웠던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용하던 무지막지한 무게의 ‘벽돌폰’들, 허리에 권총집처럼 차고 다니며 존재감을 과시하던 휴대전화도 어느새 시티폰과 맞먹는 구시대의 유물로 변화했음을 생각하면 또 한번 헛웃음이 난다. 세월은 빠르고 변화는 더 빠르다. 빠르고 또 빠르니 이 또한 어지럽지 아니한가.

김형민 방송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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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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