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0.10 18:41
수정 : 2014.10.12 12:38
|
1997년 5월 김포국제공항 제2청사 출국장 앞에서 한 기독교 시민단체 회원들이 호화사치 해외여행을 근절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폭증하던 해외여행이 과소비의 주범으로 찍히던 때였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
[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31) ‘역마살’의 시대
▶ 김형민 방송 피디. 에스비에스(SBS) <리얼코리아> <긴급출동 SOS 24> 등을 연출했고, 현재는 에스비에스 시엔비시(SBS CNBC) 소속으로
를 제작하고 있다. 교양 피디로서 사람들의 일상과 삶의 총합이라 할 역사에 관심을 기울여왔으며, 오늘의 역사를 연재한 글들을 모아 <그들이 살았던 오늘>(2012년)을 내기도 했다. 한겨레 토요판에서 20세기 마지막 격변기였던 1990년대를 탐험한다.
얼마 전 국내 굴지의 여행사 회장님을 뵌 적이 있다. 그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 듣는데 이런 사연이 귀에 들어왔다. “원래 저분은 ○○투어 팀장이셨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관광 산업으로 승부를 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던 거야. 그래서 몇 명이 의기투합을 해서 사표 쓰고 나와서 사무실 낸 거야. 덕수궁 건너편에 올망졸망한 여행사들 지금도 많잖아? 그중의 하나로 시작했던 거지.”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그 회사의 창립은 1993년이었다. 오늘날 관광업계 선두를 다투는 기업의 창립 일화를 들으면서 든 생각 중 하나는 90년대가 ‘여행’이라는 개념이 정립되고 그 수요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던 시대였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14조에는 “모든 국민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돼 있다. 그러나 90년대 이전까지 한국인의 ‘이전의 자유’는 매우 제한돼 있었다. 요즘이야 해외여행 한 번도 다녀오지 못했다면 불쌍한 시선을 면하지 못할 것이나 80년대만 해도 해외여행이란 ‘가문의 영광’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공적인 업무나 유학, 취업 등을 제외한 순수 여행 목적으로는 여권이 거의 발급되지 않았다.(50대 이상에 한해 제한적으로 허용한 게 1983년이었다.) 그러니 한 번 ‘물 건너’ 갔다 돌아올 때는 사돈의 팔촌에 직장 상사에 부서원들까지 나눠 줄 선물을 바리바리 챙기는 것이 미덕이었고 ‘일본산 코끼리 밥솥’ 같은 건 대단한 인기 품목이었다.
결혼식장 첫 질문 “신혼여행은 어디로?”
이 위헌적(?) 상황이 해제된 것이 1989년, 80년대의 끝자락이었다. 해외여행이 완전 자유화된 것이다. 수십년 동안 그림의 떡에 불과했던 해외여행이 모락모락 김을 내며 꿀까지 듬뿍 묻힌 채 눈앞에 내밀어지자 한국인들은 적잖이 평정을 잃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어떻게 수십년간 해외여행 금지를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나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해 1989년 출국자 수는 단숨에 100만명을 돌파했고 1991년에는 관광수지가 적자로 돌아선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기’의 영향인지 모르나 돈 씀씀이도 초보치고는 엄청났다. 글쎄 한국인들의 해외여행객 1인당 관광 비용은 미국이나 독일의 두 배에 달했던 것이다.(<연합뉴스> 2009년 6일15일 ‘해외여행 자유화 20년’ 보도 중)
이 폭발적인 수요를 감당하고자 또 그 덕에 돈을 벌고자 여행사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각양각색의 상품으로 대한민국의 남녀노소를 유혹했다. 1990년 1월15일 대한여행사가 출시한 적립식 해외여행권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 여행사의 카피는 이것이었다. “하루 1000원의 투자로 시작됩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글랑플랜’이란 이름의 적립식 해외여행권을 출시한다. 월 납입액 3만원을 일정 기간 적립하면 대망의 해외 신혼여행을 갈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월 3만원씩의 계약이 폭주하면서 단 두 달 만에 계약고가 10억원 가까이 쌓였다. 신혼부부 지갑 최대의 적인 “평생에 한 번인데”라는 슬로건은 관광업계에서부터 기승을 부렸다. 결혼식장 가서 “신랑은(또는 신부는) 뭐 하는 사람이냐?”보다 “신혼여행 어디로 간다니?”가 첫 질문이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괌이니 사이판이니 하는 곳들은 일찌감치 식상해졌고 하와이와 발리, 푸껫(푸켓), 심지어 몰디브 등 지구본에서나 보고 뉴스에서나 듣던 지명들에 한국인들의 발길이 홍수처럼 밀어닥쳤다. 어디 신혼여행뿐이랴.
언젠가 명절, 고향 집 식탁에 둘러앉아 정담을 나누는데 아버지가 천만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배낭여행이 한창 유행일 때 말이야. 내가 너한테 돈 좀 보태 줄 테니 유럽 배낭여행이나 갔다 오라고 했더니 너 그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냐?” 잠시 머리를 쥐어짜 봤지만 유감스럽게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이게 웬 떡이냐 했을 것 같고, 그렇다면 배낭 하나 들고 유럽을 가서 젊음을 발산하고 왔어야 하는데 나는 배낭여행을 떠난 적이 없지 않은가. 더듬거리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지금 생각해도 기막히다는 듯 말씀을 이으셨다. “아주 비분강개해서는 내가 내 나라 땅도 아직 제대로 못 봤는데 외국 나가서 뭘 보고 오겠냐며 정색을 하더라. 나도 기가 막혀서 더 말도 안 했지.”
악. 내가 그런 망발을 했단 말인가. ‘내가 언제 그랬습니까’ 발끈하려는데 스멀스멀 옛 기억이 되살아나 왔다. 아마도 발트해를 왕복하는 유람선 뷔페 식당에서 한국 배낭여행객들이 뷔페 음식을 싸가지고 나오다가 적발돼 한국 남자 승선 금지령이 떨어졌을 때였던 것 같다. 또 연봉 1500만원이면 괜찮은 직장 얻었다는 평을 듣던 시기에 아무리 저렴하다고 해도 300만원 깨져나가는 건 기본으로 각오해야 했던 유럽 배낭여행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도 많았던 무렵이었다.
1993년 6월9일치 <동아일보>에는 한 연세대학교 89학번 학생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우리 과 우리 학번의 경우 ‘운동권과 지방 학생을 제외한’ 50% 이상이 배낭여행을 다녀왔다”는 것이었다. 복학한 뒤엔 소위 운동권은 면했지만 그 정서에 익숙했고 ‘지방 학생’이었던 나는 하늘이 내려주신 배낭여행의 기회를 얼토당토않은 ‘내 나라도 아직 다 안 봤거늘!’ 하는 논리로 박차 버렸던 셈이다. 만약 그때 유럽 각지를 누비며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보고 런던 빅벤 시계탑 따라 시계를 맞춰 보고 라인강변에서 맥주 맛을 음미하면서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과 어울려 게스트하우스에서 고스톱 룰이라도 가르쳐 줄 수 있었더라면 아마도 내 인생과 세계관은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겠다. 이즈음을 돌이켜 보매 떠오르는 것이 한 여자 후배의 또랑또랑한 배낭여행 출사표다. 여행 비용은 이모가 상당 부분 도와주셨다고 했다. ‘너희 이모 돈 많으시구나’ 하며 심드렁하게 넘기려는데 녀석이 내 말의 허리를 야무지게 자르고 돌아왔었다.
“아니에요, 형. 저희 이모 부자 아니에요. 제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이모가 저희 자매들한테 관심을 많이 갖긴 하시지만요. 어느 날 언니랑 저를 불러놓고 그러시는 거예요. 너희들 결혼할 때 주려고 적금을 부어온 게 있다. 그런데 너희들이 배낭여행을 가겠다면 그걸 지금 주마. 넓은 세상을 보는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니. 두 자매가 벌떡 일어나서 똑같이 소리를 친 거 알아요? 이모, 저희 결혼 안할 거예요!”
80년대 해외여행은 ‘가문 영광’
1983년에 50대 이상에 허용
1989년 여행규제 해제되자
그해 출국자수 100만명 돌파
돈 씀씀이도 미국·독일 두배
90년대 초반은 제대로 몰랐던
우리 안의 재발견 이뤄진 시기
1등공신은 전국적인 마이카 붐
자동차업계 최대 호황기이자
라이프스타일이 바뀌던 때
“차의 소유는 문화의 탄생”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불어닥친 배낭여행 열풍을 타고 매 여름과 겨울 방학이면 1개 사단 규모의 대학생들이 유럽으로 인도로 일본으로 동남아로 떠났다. 물론 유복한 집안의 학생들이 ‘에프엠(FM) 장학금’(부모-father, mother-의 도움)으로 귀족형 배낭여행을 떠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아르바이트한 돈을 끌어모아 “보다 넓은 세상”을 향해 무작정 뛰어든 학생들은 더 많았다. 그때 배낭여행에 합류했던 한 선배의 경험담은 한동안 친구들 사이에서 화제였다.
“나는 한국 사람이 없는 곳을 가보고 싶었어. 그래서 스페인에서 모로코로 건너갔고 또 거기서 다른 나라로 건너갔어.(그 이름은 떠오르지 않을 만큼 하여간 생소한 국명이었다.) 공항이래야 시외버스터미널 같고 영어도 안 통하는 나라. 기분이 뿌듯하더라고. 이 나라에는 한국 사람이라고는 나뿐일 거다 싶은 마음에. 그런데 딱 일어서는데 갑자기 뒤에서 경상도 사투리가 들려오지 뭐야. ‘아이고 더버라(더워라).’”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해외여행 기회가 원천봉쇄돼 있었던 섬 아닌 섬나라 (동서남북 모두 바다와 휴전선으로 차단된) 대한민국 젊은이들은 그렇게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하다못해 ‘전대협’(전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이 북한에 파견한 밀사들조차도 배낭여행객으로 위장하고 유럽행 비행기를 탔었으니까.
그런데 어찌 해외여행만을 여행이라 하랴. 90년대는 새롭고 생경한 외국 곳곳에 우리들의 발길이 닿기 시작한 시대이면서, 그때껏 관심이 부족했고 제대로 알지 못했던 우리 안의 재발견이 이뤄진 시기이기도 했다. 그 1등 공신 중 하나는 바로 본격적인 ‘마이카’ 시대의 개막이었다. <소년중앙>이나 <새소년> 등의 어린이 잡지에서 뻔질나게 등장하던 “21세기에 이루어질 미래” 같은 기획에서 절대로 빠지지 않았던 것이 ‘마이카(My Car) 시대’였다. 80년대 초만 해도 승용차 수가 18만대에 불과했으니 ‘마이카 시대’는 요즘 북한의 ‘강성대국’만큼이나 허황된 구호로 보였다. 하지만 80년대 말에 이르면 그 수가 열 배로 늘어나 마이카 시대는 본격적으로 그 막을 올렸고 내 집 마련보다는 내 차 마련이 급하다는 사람들의 서두름 속에 “집도 없으면서 무슨 차냐?” 하는 어른들의 핀잔은 이내 무색해져 버렸다. 아마도 90년대 초중반은 자동차업계 최대의 경쟁기이면서 호황기였을 것이다. 몇 달이 멀다 하고 새로운 차종이 등장했고 “뺑소니 차량을 목격하고도 차종을 증언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으니까.
본격적인 마이카 시대는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전면적으로 바꿔 놓았다. 여행 문화에서도 그랬다. 젊은 연인들이 춘천이나 백마로 기차 여행을 떠났다가 “어, 차가 끊겼네. 어떡하지?”의 서툰 연극을 벌이고 또 그 뻔한 연극에 짐짓 속아 넘어가 주는 시대는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시각표>를 사서 각지의 버스 시간과 기차 시간을 메모해 두고 다니다가 어쩌다 늦어지면 무거운 배낭을 메고 전력질주하여 숨이 턱에 닿은 채 버스를 잡아타던 일도 특별한 추억의 영역에 편입돼 갔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술자리에서 누군가 “바다가 보고 싶다”고 한마디 한 것이 계기가 돼 누군가의 차를 꽉 채운 채 영동고속도로를 내달려 강릉 경포대 일출과 조우했을 때의 감회를 지금도 잊을 수 없거니와, 글자 그대로 “차의 소유는 문화의 탄생”(일찍 차를 샀던 내 친구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방을 돌아다니며 버스와 기차가 닿지 않는 국도와 오솔길의 매력에 빠진 이들에게 한 줄기 빛이 내려왔으니 그것은 1993년 출간된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였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전율을 잊을 수 없거니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는 그 책 서문의 글귀는 마치 지혜의 번개처럼 득도의 벼락처럼 머리를 내리쳤다. 대단한 볼거리가 펼쳐져 있지 않더라도, 국보 몇 호의 권위가 없더라도, 우리 땅 곳곳을 지켜온 문화유산들, 옛사람의 자취들, 하다못해 없어진 절터와 그 터를 지키는 돌무더기들에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가치들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깨우쳐 주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때껏 몰라서 보지 못했고 보이지 않으니 느끼지 못했음을 호령하면서.
아내와의 첫 여름휴가 때 우리 부부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남도 답사 코스를 그야말로 답습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저마다 크고 작은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회색 표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책을 꺼내들고 있었고, 그 책에 등장하는 영특한 개를 찾아 헤맸고 그 책에 소개된 음식점을 꼭 찾아들었으며, 정자 위에 앉아 옛 시인 흉내를 냈다. 그때껏 몰랐던 것들을 알게 해준 것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공이 지대할 것이나 그들을 ‘답사기’의 꽁무니를 따라서 방방곡곡을 누빌 수 있게 해준 공로는 그들의 애마, 즉 자동차에도 의지하고 있을 것이다.
다산초당에서 멋모르고 지은 죄
아내와 함께 들른 장소 중에는 다산초당도 있었다. 다산 정약용이 귀양살이를 치렀다는 그 작달막한 기와집은 인산인해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왔고 그들 역시 ‘답사기’ 한 권을 품에 안고 있었다. 깔끔히 단장된 관광지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과 느낌을 끌어들이고 있었으되 그곳을 바라보는 내 심경은 좀 복잡했다. 그곳에는 과거 내 동아리 선배들의 흔적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87년 겨울 합숙 때 관광지인지도 모르고 다산초당 부속건물에서 잠을 잤어. 문은 다 열려 있었고 하도 추워서 나무를 땠는데 구들장이 무너지고 그랬어. 부속건물에서 잤으니 망정이지 자칫하면 다산초당 다 부술 뻔했지 뭐야. 그때 그게 문화재인 줄도 몰랐고 문도 다 열려 있어서 누구든 들어가 잔들 뭐랄 사람이 없었고 1박 2일 동안 거기서 머무는데 찾아오는 관광객도 없었어.” 그렇게 선배들은 자칫하면 역사에 남을 죄를 지을 뻔하였던 것이다. 이렇다 할 관광지도 아니고, 별다른 볼거리도 없이 덩그러니 집 한 채 남아 있던 다산초당, 그래서 길 가는 대학생들이 하룻밤 신세를 져도 아무도 뭐라는 사람이 없던 다산초당은 1990년대에 다시금 우리 곁으로 화려하게 돌아와 다산 정약용의 숨결을 전해 주게 됐다.
|
김형민 방송 피디
|
무릇 여행이란 접해 보지 않은 풍경과 경험과의 조우이며 동시에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하고 스스로 한발 더 내딛고 한 움큼 더 자랄 수 있는 기회이다. 80년대까지 “3등, 3등 완행열차 타고 동해 바다로 가서 고래를 잡는” 일에 만족해야 했던 젊은이들을 위시한 대한민국 국민들은 90년대 들어 3등, 3등 이코노미석을 타고 유럽 지중해에서 고래를 잡고 열차 시간표와 버스 노선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찾아서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권리를 바야흐로 가지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역마살’을 경험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김형민 방송 피디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