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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0.24 18:42 수정 : 2014.10.25 11:18

1994년 9월21일 오후 전남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연쇄납치 살인조직 지존파 일당의 아지트에서 범인 김현양이 도끼로 피해자 대역인 마네킹을 내리치는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32) 지존파와 증오 범죄

▶ 김형민 방송 피디. 에스비에스(SBS) <리얼코리아> <긴급출동 SOS 24> 등을 연출했고, 현재는 에스비에스 시엔비시(SBS CNBC) 소속으로 를 제작하고 있다. 교양 피디로서 사람들의 일상과 삶의 총합이라 할 역사에 관심을 기울여왔으며, 오늘의 역사를 연재한 글들을 모아 <그들이 살았던 오늘>(2012년)을 내기도 했다. 한겨레 토요판에서 20세기 마지막 격변기였던 1990년대를 탐험한다.

<한겨레> 초창기 시사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를 들었던 박재동 화백. 그의 <목 긴 사나이>라는 만화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만화가 실려 있다. 학창 시절 ‘영원한 우정’을 약속하고 그 시절을 기념사진으로 간직하고 있던 옛 친구 둘이 반가운 만남을 가진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한 친구가 모처럼 때 빼고 광내서 서울에 올라왔는데 또다른 친구가 엄청난 졸부가 돼 있었다. 가족마다 차를 굴리는 것은 기본, 온 집안을 대리석으로 장식하고 수천만원짜리 난 향을 맡으며 호텔 뷔페는 애들이나 오는 데라 영 시원찮다고 불평을 하는 졸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아내와 자식들을 위한 백화점 쇼핑까지 으리으리하게 끝장내 버리는 졸부 말이다. 다시 시골로 내려간 친구는 농약을 마신다.

아니, 친구가 잘될 수도 있지, 그런 일로 농약을 마시는 게 이상한 설정 아니냐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겠다. 그러나 순진한 농민을 절망에 빠뜨린 것은 친구에 대한 시기가 아니라 당시 한국 사회의 수많은 보통 사람들을 강타한 박탈감이었다. 만화 속의 ‘농약’은 그 박탈감을 상징한다. 만화에 나오는 문제의 부자 친구는 “땅만한 게 없지!”를 뇌까리는 부동산 졸부였다. 실제로 1990년대 초반 경기도 일원, 즉 분당, 일산, 산본, 평촌 등 한적한 교외에 별안간 아파트의 거탑들이 치솟으면서 그 땅의 소유주들은 돈벼락을 맞았고 그들 중 일부는 한국 사회의 과소비를 주도하는 ‘돈×랄’의 경지를 개척했다.

“1억을 며칠 만에 거머쥐니 200만원은…”

비단 신도시뿐이 아니었다. 80년대 말 90년대 초 전국을 휘몰아친 부동산 열풍 속에 입지전적인 기업가가 평생 벌 돈을, 한순간에 거머쥔 인사들이 속출했다. 1991년 12월27일 한겨레신문의 ‘한겨레 한마당’에는 대문짝만한 크기로 ‘졸부의 전성시대’라는 기사가 실린다. 땅 투기로 떼돈을 번 전 은행 차장과 공무원의 아내 등이 연이어 등장하는 이 기사에 따르면, 91년 9월 서울대학교 경제 연구소 심포지엄에서는 1989년을 기점으로 토지매매를 통해 실현된 자본 이득이 국민총생산의 38%에 이르며 토지공사 추정으로는 국민총생산의 총 77%인 85조원에 달했다고 한다. 이 기사 속의 은행원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1억을 며칠 만에 거머쥐니 월급 200만원이 우습게 보였다.’

최근 안 좋은 소식이 들리는 트로트 가수 송대관의 출세작으로 ‘해뜰 날’이라는 노래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노래는 이렇게 신이 나야지!”라고 한마디 했다는 소문이 난 ‘건전가요’이며, 한국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좋아하고 사랑했던 이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모두 비켜라/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 뛰고 뛰고 뛰는 몸이라 괴로웁지만/ 힘겨운 나의 인생 구름 걷히고/ 산뜻하게 맑은 날 돌아온단다/ 쨍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

신도시 개발 돈벼락과 땅투기
90년대 초반 졸부들의 대행진
천민자본주의의 화려함 앞에
졸부의 극단에 선 이들은 절망
그 어떤 절망은 독기로 변했다

‘살인공장’ 차려 실행한 지존파
외제차 모는 여성 생매장해 죽인
막가파와 ‘살인택시’ 몬 온보현
그들은 악마의 짓거리 했지만
상대적 빈곤이 만든 괴물이었다

이 노래가 국민가요가 된 데에는 누구에게나 비슷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한 부잣집도 있고 찢어지게 가난한 집도 많았지만 뼈 빠지게 일하고 등골 우려내 자식 공부시키면, 또는 남동생 대학 보내면, 우리 막둥이가 고시 패스만 하면, ‘쨍하고 해뜰 날’이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 말이다. 그리고 고대광실은 아니더라도 번듯한 내 집에서 자식들 방 하나씩 주고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일렁이던 시대가 분명 있었다. 적어도 90년대 이전만 해도 그랬다. 물론 그 희망의 촛불에 타죽은 불나방도 숱했고 촛불이 엎어져 집구석을 태워버린 경우도 있었지만 희망은 희망이었다.

그러나 90년대 초반 한국을 강타한 졸부들의 대행진은 “뛰고 뛰는 몸이라 괴로워도” 쨍하고 해뜰 날을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볕 들어 봐야 쥐구멍’임을 일깨우는 뺨따귀였다. 천민자본주의가 펼쳐 보이는 화려함 앞에 가장 먼저 절망한 사람들은 졸부들의 극단에 선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의 가슴속에서 절망은 독기로 변한다. 1994년 추석 무렵, 대한민국 국민들은 별안간 눈앞에 펼쳐진 독기의 향연 앞에 그만 모골이 송연해지고 만다.

1994년 9월19일은 추석 연휴의 마지막날이었다. 연휴의 피곤함을 잊고자 일찍 잠자리에 들 채비를 하던 사람들은 티브이 화면 앞에서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지존파라는 이름의 조직이 사람들을 납치하여 돈을 뺏고 죽이고 소각로까지 설치하여 불태워 버렸다는 엽기적인 뉴스가 화면을 뒤덮은 것이다.

연습 삼아 사람을 죽였고, 일종의 ‘살인 공장’을 차려두고 그를 실행에 옮겼다는 그들의 범죄는 한국 범죄사뿐 아니라 세계 범죄사를 통틀어도 드문 예였다. 담당 형사였던 고병천 당시 서초경찰서 강력1반장의 말을 들어 보자. “마피아 등 조직범죄는 100% 폭력조직이다. 하지만 살인을 목적으로 모인 범죄조직은 전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었다.”(<일요신문> 2014년 7월23일치) 그야말로 준비된 살인자들의 집단. 요즘 이 얘기를 하면 누구나 ‘사이코패스’를 운위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가장 강력히 부인하는 것 역시 담당 형사였다. 그들을 체포했고 후일 사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지기 전 가톨릭의 세례를 받을 때 대부까지 되어 주고 가족도 인수를 거부한 시신까지 거둔 경찰관 고병천의 말이다. “그들은 사이코패스가 아니었어요. 우리 사회의 엄청난 상대적 빈곤이 괴물을 만든 겁니다.”

카메라 앞에서도 히죽히죽 웃으며 “나는 인간이 아니야”라고 뇌까리고 차마 다시 쳐다보기도 끔찍한 범죄를 눈 하나 깜짝 않고 저지른 저들이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니. 그 속사정은 수사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집이 너무 가난하여 크레파스조차 챙겨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은 그런 저를 친구들 앞에서 모욕하고, 옷까지 벗긴 채 수업 시간 내내 알몸으로 복도에서 서 있게 했습니다. 수치스러웠습니다. 가난이 저주스러웠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그런 모욕을 주지 않았더라면 제가 오늘 이런 범죄자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라는 주범 김기환의 말은 일견 뻔뻔하지만, 차갑기 짝이 없는 진실의 창끝을 불쑥 내밀고 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우등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돈이 없어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왜 ‘그랜저 이상의 차 소유자’라 명시했나

체포 후 조사를 받을 때 형사가 8000원짜리 잡탕밥을 시켜 주었을 때, 일당 중 한 명은 말한다. “이게 제가 세상에서 먹어 본 가장 비싼 밥입니다.” 그가 바로 카메라 앞에서 히죽히죽 웃으며 “더 못 죽인 게 한”이라고 뇌까리던 김현양이었다. 그 외에도 일가족이 모여앉아 “같이 죽어버리자”는 말이 나와 공포에 떨었던 어린 시절을 지녔던 이도 있고, “가난에 평생 시달린 부모님께 효도 한번 하기 위해” 범죄에 가담했다는 이도 있었다. 언뜻 다양해 보이지만 결국은 엇비슷한 동기 속에 그들은 인간에서 악마로 탈바꿈했고 온 나라를 요즘 말로 하면 ‘멘붕’으로 몰아넣었다.

고병천 형사에 따르면 지존파는 두번에 걸쳐 만들어졌다. “첫번째 지존파는 그래도 먹고살 만한 애들이었다. 그런데 범죄 계획을 듣고 다들 못하겠다고 한 것이다. 두목 김기환의 성격을 아니까 첫번째 지존파 애들은 외지로 피신하고 그랬다. 두번째 모은 애들이 사건의 장본인들이었다. 처음 모은 지존파가 실패하자 더 어렵게 살고 더 못 배운, 삶이 힘든 애들만 모은 것이다.”(위 <일요신문> 기사)

그나마 먹고살 것이 있고 벼랑 끝까지는 내몰리지 않은 범죄꾼들이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한 뒤 김기환은 이미 벼랑 아래로 떨어진 뒤 올라갈 희망이 없어진 이들을 찾았다. 희망의 동아줄이 사라진 이들에게 드리워진 절망의 독사 꼬리였다. 지존파 이외에도 그 독사 꼬리를 움켜쥔 사람들은 많았다. 막가파라는 이름의 범죄 조직은 외제 자동차를 몰고 가는 여성을 납치한 뒤 생매장해 죽이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그들 역시 부유층을 무차별적으로 납치해 돈을 빼앗고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돈이 많은 사람을 무조건 죽이고 싶었다”고 했다. 택시를 몰고 다니며 여자들을 납치 살해했던 온보현 역시 “나 같은 사람들은 살기 각박해서”라고 범죄 동기를 밝히고 있다.

그들의 행동이 악마와도 같았음은 부인할 수 없다.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사람들 앞에서 웃으며 삽질을 하거나 목을 조르고 공기총을 쏜 순간 그들은 완벽한 독사의 현신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독기는 그들이 오롯이 키워낸 것은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그 독기의 상당 부분은 우리 사회가 불어넣은 것이었다. 한 예를 들어 보자. 1994년 1월17일, 그러니까 지존파가 출현하기 9개월 전, 서울 도산대로에서는 해괴한 폭행 사건이 일어났다. 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손자와 롯데그룹 부회장의 아들 등이 “티코가 그랜저를 추월한다”는 이유로 티코에 탄 운전자 일행을 두들겨 패 전치 8주와 4주의 중상을 입힌 것이다. ‘그랜저 이상의 차 소유자’를 명시한 지존파 일당의 살인 강령이 묘하게 겹쳐 보이지 않는가.

지존파가 던진 충격파는 상당했다. 온 언론이 ‘인간성 회복 캠페인’을 벌였고 그 가운데 ‘사회 지도층’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뒤를 이었다. “범죄자에 대한 개인적 증오와 저주에만 집착한 나머지 우리 사회의 총체적 병리 현상과 그것이 주는 경종의 의미를 가볍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되며”(<동아일보> 1994년 11월3일치) 상대적 빈곤감을 부추기는 우리 사회의 모순 척결에 나라의 명운을 걸어야 한다는 호소가 줄을 이었다. 그런데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에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서 있었다. “평준화라는 이름으로 기계적인 교육을 시켜 온 탓에 이상스런 사상이 침투했다”(<한겨레> 1994년 9월24일치)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지존파는 우리 사회의 모순이 키운 악마가 아니라 ‘이상스런 사상’의 결과였다. 이외에도 김종필 전 총리는 지존파의 사회적 의미를 탈각시키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한 공무원 교육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으로 건강하게 태어난 것, 기아와 내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에 태어나지 않았고, 한반도 중에서도 북한이 아닌 남한에 태어났다는 것, 이 세 가지에 고마워할 줄 알아야 건전한 사람이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지존파를 사회의 잘못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그로서는 지존파를 이해하기도, 그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인정하기도 싫었던 것 같다. 더 힘든 삶 속에서도 자신들한테 고분고분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고 살아가는 ‘건전한’ 사람들도 많은데 어찌 그런 인간 이하의 짓을 저지를 수 있으며 그 책임을 사회에 돌리기까지 하다니! 그의 눈에 지존파는 그저 돌연변이고 불그죽죽한 사상이 준동한 결과물이며 그냥 도려내 버리면 되는 독버섯일 뿐이었던 것이다. 이 김종필 전 총리의 발언을 암담한 잿빛으로 기억하거니와 나는 이 개념 있는(?) 발언의 전통을 얼마 전에도 확인한 바 있다. 부산의 재개발촌에서 여중생을 성폭행하고 살해했던 김길태 사건 때 당시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는 이렇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김길태 같은 자가 태어난 것은 좌파교육 탓”이라고.

2014년 경비원들의 수치심이 말해주는 것

지존파는 이 세상에 없다. ‘집중심리제’를 통해서 최대한 신속히 재판이 진행되었고, 이후 사형수로서 몇 년을 지내는 관례조차 무시된 채 서둘러 교수대에 매달았던 것이다. 이에 대한 유감은 없다. 죗값은 치러야 하므로. 그러나 다른 데 유감이 있다. 지존파 사건 이후에 장안을 달군 사회적 반성과 지도층의 회개와 부유층의 각성 촉구의 목소리는 깡그리 사라지고 김종필 전 총리와 같은 목소리가 어느덧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되어 한강처럼 교교히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김종필 전 총리가 불만스러워하던 ‘평준화 교육’은 이미 깨져 버졌고 결코 ‘기계적’이 아닌, ‘실력’과 ‘스펙’을 통한 학교 교육의 ‘우파적’ 재편을 통해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들은 부모의 능력에 따라 분리돼 자라나고 있다. ‘상대적 빈곤감’ 따위는 없도록 ‘절대적 빈곤감’이 점차 확산되는 가운데 부유층에 대한 불만이라도 내비칠 양이면 ‘반기업 정서’에 ‘좌익 근성’에 ‘정당한 부에 대한 질투’라는 융단폭격이 단계별로 퍼부어지기 일쑤다.

김형민 방송 피디
범죄꾼들은 자신의 과오를 사회에 돌리는 무책임한 독버섯들일 뿐이며 “아프리카도 아니고 북한도 아니고 남한에 사지 멀쩡하게 태어난” 이들이라면 그저 묵묵히 일하고 시키는 대로 따르고 주는 대로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미덕이 된 사회가 오늘날 우리 사회다. 경비원이라는 이유로 아파트 주민에게 온갖 설움을 다 당하고 ‘이 새× 저 새×’ 소리 들어주다 5층에서 개밥 던져주듯 하는 행태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킨다는 것이, 결국 자기 몸에 불을 댕기는 게 고작인 사회가 되었다. 그 분신 앞에서 아파트 주민들은 집값을 결정하고 그들 가운데 자신들의 안전과 편리를 지켜 주던 경비원이 3도 화상을 입고 누워 있는 병원을 찾는 이는 없거나 드문 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공활한 가을 하늘에 빛나는 태양만큼이나 명백한 사실은 1994년 당시보다 불평등은 심해졌고 절망은 깊고도 넓어졌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존파는 과거지사이기만 할까.

김형민 방송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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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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