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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26 10:34 수정 : 2013.09.03 10:03

박성원 소설 <우리가 지금은 헤어져도> ⓒ전지은

박성원 소설 <1화>



1

아버지의 이름은 클립 영. 어머니 이름은 캐서린 앤 헤쳐 영. 아버지는 1923년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감리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내 이름은 용 이언. 생후 10개월 때 부모를 따라 한국에 왔으며, 파란 눈에 금발인 나는…… 영어를 하지 못하는 미국인이다.

아버지는 군목으로 6․25 전쟁에 참여했다. 경북 왜관에서 있었던 다부동 전투 때 실종되었으며, 어머니는 부산으로 가는 피난길에 실종되었다. 내가 두 살 때의 일이다.

1973년 9월 13일. 장발 단속 하루 동안 12,999명이 적발되었고,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가 발표되었다. 1975년 6월. <철새>, <기러기 아빠> 등 대중가요 마흔세 곡이 보급 금지를 당했으며, 그해 7월, <그건 너>, <한잔의 추억>, <미인>, <생일 없는 소년> 등 마흔다섯 곡이 금지곡으로 결정되었다. 다시 그해 10월, 남진의 <사람 나고 돈 났지> 등 대중가요 마흔여덟 곡이 추가로 금지곡이 되었으며, 1차에서 백삼십 곡, 2차에서 마흔네 곡 등 모두 이백이십이 곡이 금지곡으로 결정되었다. <아침이슬>은 방송의 날에 건전가요 대상을 수상한 노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금지곡이 되었다. 1975년 그해에는 영장 없이 구금도 가능했다. 내 나이 스물여섯 때의 일이다.

명동에선 늘 같은 냄새가 났다. 희미한 공기 속에, 회색 베일을 깊게 눌러 쓴 수녀들이 지나갔고 그 자리엔 몇몇 비둘기들이 날아와 앉았다. J와 난 대학로에서 명동, 명동에서부터 남대문시장까지 자주 걸었다.

- 우리 사이에 특별한 색깔은 없어. 알지?

J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특별한 색깔이라…….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J와 거의 매일 만나면서부터 그 뜻을 차츰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우리 사이에 특별한 색깔은 없다. 피부색이 달라도 우리의 어색한 관계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J가 경찰관 앞에서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내 팔짱을 껴도 특별한 색깔은 생길 수 없을 것이다. J는 서로 사랑하면 색깔이 생긴다고 말했다.

- 언젠가 키가 크고 기타를 아주 잘 치는 남자를 본 적 있어. 그 남자와 사귀면 어쩐지 주황색 사랑을 할 것 같았어.

주황색이라. 정말이지 좋은 색이다. 기타를 잘 치게 되면 나에게서도 주황색을 볼 수 있을까? 기타는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인 평균보다도 조금 작은 내 키는 어쩔 것인가.

나는 알고 있다. J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외모다. 카메라를 들고 어슬렁거려도 불심검문을 한 번도 받지 않을 권리. J가 금지곡 테이프나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을 소장하고 다녀도 나와 팔짱만 끼면 무사통과라는 것을 나나 J 모두 잘 알고 있다. J의 말처럼, 정말 우리 사이에는 특별한 색깔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 원어민 영어강사라면 믿어줄까?

내 말에 J는 웃었다.

대학로에 있는 음악다방 ‘정인’부터 명동에 있는 ‘제임스’와 ‘시인’, 그리고 남대문시장 가는 길에 있는 ‘파도’와 ‘갈채’까지, 왕복 10.5킬로미터. 금지곡 LP나 테이프를 들고 오가는 길. 같은 냄새를 맡고 같은 거리를 보며 같은 이정표를 따라 오가는 길. 아무런 색깔도 없는.

가끔은 귀찮은 일이 생기기도 한다. 이를테면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진짜 외국인을 만날 때가 그렇다. 그들은 나를 보면 가까이 와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말한다. 그러나 나는 대답을 해줄 수도 없고 알아들을 수도 없다. 내가 알아듣는 유일한 영어는, ‘mother fuck’뿐이다.

세상엔 가능한 일보다 불가능한 일이 더 많다. 노래로 세상을 바꾼다는 것 자체가 그렇다. 노래로 세상이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다니. 좋은 노래 한 곡을 단 한 사람에게 이해시키는 것조차 힘들다. 그러나 J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J가 그렇게 믿기 때문에 나 또한 그럴 것이라고 믿으려 할 뿐이다.




박성원(소설가)


박성원

〈문학과사회〉 가을호에 단편소설 <유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이상(異常), 이상(李箱), 이상(理想)》, 《나를 훔쳐라》, 《우리는 달려간다》,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루》 등이 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동국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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