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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28 10:00 수정 : 2013.09.03 10:04

박성원 소설 <3화>



제임스가 포크 음악에 빠진 것은 전사통지서 때문이었다. 전사통지서를 돌린 구역의 거리를 합치면 천 마일이 넘는다고 했다. 그동안 그는 오백 곡이 넘는 포크를 들었다.

- 나중엔 애리조나 사막만큼이나 포크가 건조해지더군. 너무도 바삭해서 스피커 밖으로 나오자마자 부서질 지경이었어.

전사통지서를 모두 돌리고 그는 제 방 침대에 쓰러졌다. 애리조나 사막은 융프라우나 몽블랑 같은 유럽의 어느 설산처럼 느껴졌고, 뜨거운 햇살은 거친 눈보라처럼 보였다. 전사통지서 돌리는 일을 모두 마치고 그는 사흘 동안 혼절해 있었다. 온몸에 추위가 달라붙었고 그는 섭씨 40도가 넘는 사막에서 영하를 느꼈다.

사흘 후 제 방 침대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오백 곡이 넘던 포크 음악도 모두 사라졌는데 기억나는 노래는 단 한 곡도 없었다. 어떤 이유로 돌연 사라졌는지, 또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한낮의 태양처럼 한동안 머리 위를 뒤덮고 있다가 그냥 지평선 밖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심지어 전사통지서의 양식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백인들 가운데서 제임스는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그러나 군대를 그만둘 순 없었다. 일본계 미국인이 미국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군 생활뿐이었다. 외조모가 일본인이었기에 제임스에게 일본은 우주의 먼 행성 같았다. 스시조차 먹어본 적이 없었다. 피부색만 동양인이었다.

제임스는 일본으로 근무지를 신청했지만 일본의 학생운동 때문에 주둔 미군조차 내부에서 철수가 검토되고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일본에 주둔 신청을 낸 해는 1969년이었고, 그해는 도쿄대학 야스다 강당 점거 사건이 일어난 해였다. 제임스는 어쩔 수 없이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한국을 택했다.

일본계 미군 제임스, 대만 화교 희원,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파란 눈의 금발인 나. 우리는 자주 어울려 술을 마셨다. 빠지지 않는 담배 연기 때문에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 마치 피라도 쏟아질 것 같은 지하의 어두운 바에서.

- 우리는 왜 서울에 있는 거지?

그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린 왜 고향에서 몇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는 걸까. 어쩌자고.

- 그건 말이야, 너희가 허약하기 때문이지. 중심에 비해서.

J는 언제나 당당하게 말했고 그 당돌함에서 빛이 났다. 좋은 냄새도 나고.

- 중심이란 말처럼 중심 없는 말은 없을 거야. 그곳이 중심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이곳을 중심이라고 말하면 되는 거야. 너흰 그 사실을 알아야 해.

낙오자들이나 어울리는 이곳에 있는 이유? 나로 말하자면, 어쩌면 J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 J를 좋아했다. J는 기분이 좋으면 우리에게 가벼운 뽀뽀를 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근사한 일이었다.

-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몰라. 이런 시대에선 미리 사랑을 고백하는 셈이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말하는 J에게 내 마음을 말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 난 언젠가 방화범이 되고 말 것 같아.

J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자신의 몸 안엔 너무도 뜨거운 열기가 많아, 발산하지 못하면 손끝에서 1,000도가 넘는 화염이 나와 모든 걸 불태울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 그런 건 놀랍지 않아.

희원이 말했다.

- 어제 모처럼 제임스와 극장엘 갔어. 브루스 리가 나오는 영화를 보러 갔는데, 영화 시작 전에 애국가가 나오면서 모두 일어나 경건하게 서더군. 제임스와 난 외국인이지만 일어설 수밖에 없었어. 맞아 죽기 싫었거든.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의 말이 맞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기이한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이다. 기사가 없는 백지 신문도 놀랍지 않다. 누군가가 끌려가고, 농성을 하고, 기상이변이 덮쳐 5월에 눈이 내린다 하더라도 더 이상 놀랍지 않다. 어릴 땐 모든 게 수수께끼였다. 하다못해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저씨가 왜 자신은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는지조차 궁금했다. 수수께끼가 모두 풀린 지금은 미스터리만 남았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알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찾을 순 없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기사 없는 신문이나 J에게 초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이며, 그것이 당연한 일처럼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 그깟 극장에 불이나 지르지 그랬어.

J가 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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