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원 소설 <4화>
지독히도 술을 많이 마셨다. 숙취에서 깨면 절망이었지만 취하면 모든 게 아름다웠고 희망이 넘쳐났다. 술 속에선 오직 평화, 평화…… 평화만 넘쳐흘렀다. 매일 밤 달이 뜨는 것처럼 우리는 자연스레 카페 ‘제임스’에 모였다.
J가 없었더라면 뭐랄까, 내 삶은 진짜처럼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금발에 파란 눈동자의 내가 한국의 어두운 지하 카페에서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마치 백일몽처럼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꿈에서 깨면 현문교가 보이는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이층집 침대 위에 있을 것만 같은. 그러나 J와 있으면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명확해진다. J가 있으면 모든 게 현실이 된다. 전장에 홀로 떨어진 병사 같은 외로움을 느끼다가도 반드시 살아야 한다는 의지 같은 게 마음 한구석에 오롯이 생기는 것이다.
카페 ‘제임스’에는 J 말고는 손님도 거의 없었다. 아홉 개의 테이블 중 운 좋은 날엔 한두 개의 테이블에만 손님이 있었다. 누군가가 보았더라면 패배자들의 모임이라고 했을 것이다.
출근하고, 밥 먹고, 텔레비전 보고, 현실이란 게 참으로 얼마나 단순한 일인가. 문을 여닫을 줄 알면 되는 정도다. 그러나 세상은 그러한 단순함에 목숨을 건다. 목숨 걸어 얻을 결과라고는 일요일 하루의 휴식뿐이다.
결혼행진곡 대신에 금지곡을 연주하며, 미니스커트를 입은 J와 결혼식장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래서 월급날 무교동에서 함께 소주 한잔을 마시고 ‘제임스’에서 맥주를 마시는 그런 단순함을 나는 가질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 이봐, 이언.
제임스가 내 어깨를 쳤다.
- 언젠가 내가 너를 미국으로 보내줄 테니 아무 걱정 하지 마.
희원이 엄지손가락을 들었고 J가 웃었다.
하루는 통기타를 들고 J가 자작곡을 불렀다. 손님이라곤 제일 안쪽 구석에 청년 혼자 있어 ‘제임스’ 사장은 말리지 않았다. 새벽녘 조용히 떨어지는 빗소리 같은 기타 소리가 났다.
아내가 바람이 났어요. 하늘색 원피스를 즐겨 입고 구름을 좋아하던 아내가 말예요. 열불 났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상대는 슈퍼맨. 그 누가 있어 상대할 수 있겠어요. 그냥 악수만 하고 함께 사진도 찍었어요. 그래요 영광이죠. 아내가 바람이 났어요. 저녁노을을 좋아하며 맥주 한 잔에 얼굴 빨개지던 그녀가.
뭐 그런 가사였다. 기타 리프가 약하고 코드 처리가 엉성했지만 어쨌거나 가사만큼이나 음색은 독특했다. 내가 의견을 내놓자 J는 코웃음을 쳤다. 그때 구석에 앉아 있던 청년이 다가와서 자신이 기타 반주를 해도 되는지 물었다. ‘제임스’ 사장이 무슨 상관이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J의 연주 실력이 <월하의 공동묘지>를 보는 것 같았다면 청년의 기타 연주는 천국에서의 느긋한 한나절을 보는 것 같았다. 코미디 같던 노랫말은 흥겨운 풍자로 들렸고, 중간중간 삽입된 즉흥 연주는 유타 주의 어느 골목길을 걷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 브라보, 브라보. 원더풀, 원더풀.
연주가 끝나자 제임스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박수를 쳤다. 무뚝뚝하기가 단단한 소나무 같던 ‘제임스’ 사장도 쇠뭉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청년은 대학에 다니다 지금은 휴학 중이라고 했고 이름은 민이라고 했다. 민은 그날부터 카페 ‘제임스’에서 파트타임으로 공연을 했다. 입소문이 난 탓인지 민이 공연을 한 이후로 손님이 조금씩 늘기 시작하더니 한 달이 지나자 아홉 개의 테이블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입구에 서서 맥주를 든 채 공연을 구경하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빈자리가 줄어들수록 나는 점점 우울해졌다. 아내가 바람이 났어요, 어쩔 수 없어요, 상대는 슈퍼맨, 노래 가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민과 J는 가끔씩 함께 공연을 했고 나는 그때마다 그 둘의 공연에서 주황색이 번지고 있음을 느꼈다.
- 우리는 더러운 일을 하는 좋은 사람들입니다.
민은 항상 공연을 비슷한 멘트로 시작했다. 다른 음악다방과 차이가 있다면 민의 공연은 한 편의 모노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공연 중간에 시위 현장이나 대학가의 인터뷰, 그리고 대한뉴스 등을 섞은 녹음테이프도 켰는데, 그 모든 기획은 민과 J가 했고 시위 현장의 자료는 주로 내가 준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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