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원 소설 <6화>
2
억제는 고독한 것이다.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없지만 내 머릿속에선 지금까지 그때의 그 문장이 떠나질 않았다.
그해 연말을 앞두고 큰 눈이 내렸다. 그리고 큰 눈이 오기 사흘 전날, 미군과 화교 일당이 낀 간첩단 사건이 터졌다. 신문에 제임스와 희원이 크게 나왔다. 제임스는 얼굴이 그대로였지만 희원의 사진은 조금 야위어 보였다. 희원과 제임스는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당해 희원은 중국을, 제임스는 일본을 경유하여 자금을 받아 활동했다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진실로 받아들인다. 언제는 말이 되어서 이천 년 동안 왕을 절대 진리로 생각한 것이고 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을 천 년 이상 믿어온 것인가.
제일 먼저 실종된 사람은 민이었다. 걱정은 되었지만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 했다.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영장이 없어도 구금할 수 있는 때였으므로 우린 초조했다. 그중에서도 J의 불안증은 점점 심해졌다. 손님들이 들어와도 J는 화장실이나 카페 밖으로 나가 한동안 숨어 있었다.
- 나를 미행하는 것 같아.
희원과 제임스는 웃었지만 J는 술병을 집어던지며 화를 냈다. 나는 J를 진정시키기 위해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J의 집까지 함께 걸었다.
- 명동을 벗어나도 냄새는 똑같은 것 같지 않아?
내가 말을 붙여도 J는 주변만 살피다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J가 살고 있는 자취방 앞에서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에 J는 나에게 민이 남산으로 끌려간 것이 분명하다고 중얼거렸다.
- 괜찮을 거야. 만약 누군가가 와서 민이나 너를 잡아가려 하면 네 손가락에서 나오는 불길로 그놈들을 모두 태워버려. 알지? 당당함이 없으니 너 같지 않아.
J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늘 J의 방이 궁금했다. 그릇이나 책상은 어떤지, 칫솔과 비누는 무엇인지, 무슨 책을 읽고 어떤 베개가 있는지, 그런 사소한 것들이. 나는 밖에서 한동안 서성이다가 카페로 돌아갔다. 멀리 남산이 보였고, 큰길로 나오자 크리스마스가 다가와서인지 캐럴과 함께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것이 J를 본 마지막이었다.
대학로부터 명동까지 10.5킬로미터를 혼자 다녔다. 늘 같은 냄새가 났고 그때마다 나는 그 냄새를 혼자 맡았다. 다만 바뀐 것은 금지곡이 든 레코드판이나 밀수품을 든 것이 아니라 빈손이라는 점이었다. 어느 골목에선가 숨죽이고 있던 J가 나타날 것 같았지만 J의 행방은 아무도 몰랐다. J를 단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거리와 골목 그 어디에도 J는 없었다.
희원과 제임스의 면회를 가려 했지만 면회는 금지되어 있었다. 면회 신청을 하려 했다는 이유로 나 또한 여러 차례 조사를 받았다. 나는 경찰관에게 카페 ‘제임스’의 열쇠 꾸러미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 가게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 그럼 이렇게 하지. 당분간 카페 영업을 해. 그러면 접선하기 위해 간첩이 다시 올지도 몰라.
경찰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설령 희원과 제임스가 간첩이었다 하더라도 신문에 그렇게 크게 났는데 북한 공작원이 다시 찾아올 리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겨울을 보낼 곳만 있다면, 그래서 연락이 끊긴 J가 찾아올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며칠 동안은 무서웠다. 억제는 고독한 것이다. 길거리로 나가 아무나 붙잡고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마치 백일몽 같았다. 언젠가 제임스가 말해준 매케인의 경우처럼 유럽의 어느 설산에서 외로움에 벌벌 떨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용기를 내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나는 속으로, 속으로 누르기만 했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기타를 잡고 J가 걸어와 엉성한 노래를 금방이라도 부를 것 같았지만 보이는 건 희미한 적막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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