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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9.03 09:59 수정 : 2013.09.03 09:59

박성원 소설 <7화>



눈은 쉬지 않고 내렸다. 이틀 동안 손님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통행금지 시간이 다가와서 가게 문을 닫으려 할 때였다. 어깨와 머리 위에 한가득 눈을 인 채로 민이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민은 형편없이 취해 있었다. 그가 비틀거릴 때마다 눈이 뚝뚝 떨어졌다.

- 없어진 줄 알았는데. 아, 아. 모든 게 사라진 줄 알았는데.

민이 말했다.

- 이언, 술 한잔 줘. 아주 독한 걸로.

나는 말없이 술을 따랐지만 내 손은 지독히도 떨리고 있었다.

- 모든 게 그대로야.

민이 말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 아니야. 여긴 더 이상 J도 제임스도 희원도 없어.

- 그래, 그렇군.

- 개자식.

내가 짧게 욕을 하자 민은 웃었다.

- 어떻게 너만 돌아다닐 수 있는 거지?

- 내가 한 게 아니야. 모두 그 사람들이 시킨 거야. 그 자식들이 얼마나 무서운 놈들인데. 걸리면 죽어. 쥐도 새도 모르게
.

민은 울다가 횡설수설하다가 잠깐 졸다가 다시 깨서 술을 찾았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나는 약간의 현기증이 일었고 코끝이 얼얼했다. 콧속에서 개미 한 마리가 헤집고 돌아다니는 것처럼 신경이 예민해졌다.

- 이언, 넌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걸리면 죽어. 죽는다고.

견딜 수 있느냐고? 물론……. 자신 없다. 우린 모두 허약한 겁쟁이들이다. 우린 전사가 아니다. 우린 지하에 숨어서 노래나 하며 낄낄거리는, 제초제가 뿌려져도 도망조차 갈 수 없는, 그저 풀이다. 작은 이슬에 감사하며 자잘한 바람에도 뿌리가 날아갈까 봐 겁을 내는 나는…….

- J는?

- 으응? 그래, J……. 우리에겐 J가 있었지. 난 결국 더러운 일을 한 더러운 놈이야.

- J는 어디 있냐니까.

- J? 그래도 난 J만은…….

민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그는 흐느끼면서 종이에 주소를 적어주었다. 주소를 보니 카페에서 뛰어가면 십여 분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이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J가 있었다니. 그것도 모르고 그렇게 찾아다녔다니.

나는 민에게 위스키 한 병을 건네고 카페 ‘제임스’를 나왔다. 발목까지 눈에 잠겼고 한밤중이었지만 세상은 온통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쌓인 눈 위로 다시 두꺼운 눈이 쌓여 있어 마치 단층 지대를 지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이름은 클립 영. 어머니 이름은 캐서린 앤 헤쳐 영. 아버지는 1923년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감리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내 이름은 용 이언. 생후 10개월 때 부모를 따라 한국에 왔으며, 파란 눈에 금발인 나는…… 영어를 하지 못하는 미국인이다.

아버지는 군목으로 6․25 전쟁에 참여했다. 경북 왜관에서 있었던 다부동 전투 때 실종되었으며, 어머니는 부산으로 가는 피난길에 실종되었다. 내가 두 살 때의 일이다.

내가 잊지 않으려 하루에 한 번씩 되새기는 이유는 다가올 미래 때문이다. 나는 믿는다. J가 믿은 것처럼 나 역시 믿는다. 미래에는 아픔과 상처를 딛고, 그러한 과거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간절하게 믿는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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