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원 소설 <8화>
주소지에 다다랐을 때 뒤덮인 눈 사이로 비죽이 나와 있는 작은 나뭇가지들이 보였다. 현관 앞에서 잠시 서성이다 문을 두드렸다. 작은 창으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나는 다시 문을 두드리고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그러자 누군가가 문 안에서 작은 소리를 냈다.
- 누구세요.
흐릿한 목소리였지만 J가 분명했다.
- 나야, 이언.
문을 사이에 두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 위에 있던 눈덩이가 떨어졌다.
- 돌아가.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아.
나는 말없이 나무문을 손가락 끝으로 두드렸다. 몇 센티미터도 되지 않을 나무문의 안쪽이 마치 만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보스턴처럼 느껴졌다.
- 제발.
제발이라고 말했지만 그다음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부디 문을 열어줘, 한 번만 얼굴을 보여줘, 돌아가란 말은 더 이상 하지 말아줘. 여러 문장들이 회오리바람처럼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 제발.
나는 한 번 더 조용하지만 절실하게 말했다. 문 안에선 여전히 침묵뿐이었다. J의 방을 제외하곤 단 한 곳도 불 켜진 곳이 없었다. 억제된 불빛. 억제된 골목. 억제된 거리. 오직 켜켜이 쌓여 있는 눈만이 말없이 우릴 지켜보고 있었다.
- 돌아가 줘. 난 너무 더러워졌어.
J의 작은 목소리가 깨진 유리 조각 위에 서 있는 사람처럼 떨리고 있었다. 나는 나무문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 내가 왜 여기 한국 땅에 있는지 몰라. 어쩌다보니 있는 거야. 고장 난 기차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하지만 후회하진 않아. 왜냐하면 덕분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까 말이야. 선로 위에 있는 사소함 때문에 기차가 멈출 수도 있구나. 작은 실수로 경로를 벗어날 수도 있구나. 더러움도 우리의 일부일 뿐이야. 숨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아주 잠시뿐이야.
- 그만해.
J가 내 말을 끊고 말했다.
- 그래, 네 말처럼 숨을 멈출 수 있는 건 아주 잠시뿐이야.
J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 시간이 지나면……. 내일은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흉터도 아물기 마련이잖아. 며칠 지나면 상처 따윈 잊힐 거야.
작은 발걸음 소리가 나더니 J의 방에서 비치던 불빛이 사라졌다. 나는 손을 뻗어 사라진 불빛을 잡으려 했다.
그래. 나는 언제나 J를 믿는다. J의 말처럼 상처 따윈 며칠 지나면 잊힐 것이다. 우리가 상처를 기억하는 한 미래는 밝을 것이다. 상처가 반복되는 일 따윈 없을 것이다. 나는 보스턴보다 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나무문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며칠 후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했다. 그러고는 불빛이라곤 없는 골목을 빠져나와 눈길을 걸었고 통행금지에 걸려 가까운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며칠이 지난 뒤 다시 찾아갔을 때 J는 없었다. 내가 문을 두드렸을 때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홀아비 같은 아저씨였다. 그는 나를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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