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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소설 <진짜 거짓말> ⓒ전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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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소설 <1화>
1.
“저기, 잠깐 멈춰.”
남편은 서둘러 안전벨트를 푼다. 섬과 섬을 연결하는 바다 위의 도로를 한참이나 달리고 있었다. 핸들을 조금이라도 잘못 틀면 그대로 바다로 다이빙하겠지. 남의 나라에서 운전하는 거라 신경이 곤두섰는데 이곳저곳에서 내려달라는 옆 사람의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 건 더 피곤했다. 이 남자가 운전을 못 하는 것은 어릴 적 자동차 사고를 당한 트라우마가 아니라 나를 부려먹기 위한 핑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여기가 세븐 마일 브리지가 시작되는 곳이란 말이야.”
차를 세웠다. 선글라스를 벗으면 눈이 멀지도 모를 것 같은 햇볕이 내리쬐고 있다. 차에서 내리니 왼쪽 다리가 뻣뻣하다. 고개를 돌리니 우두둑하고 소리가 난다. 긴장을 풀라고. 어차피 마지막 여행이잖아.
“어디 보자. 1980년까지 이용되었던 원래 다리래. 건너편의 사용하지 않는 다리는 영화 〈트루 라이즈〉에 나왔던 거야.”
“〈트루 라이즈〉?”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나온 영화 몰라? 아내와 딸에게 자기가 비밀공작 요원인 걸 평생 숨겨오다가 들통나잖아.”
남편은 여행 가이드를 펼쳐놓고 사진과 실제 모습을 비교하고 있다. 내가 보기엔 수명을 다해 시커멓게 변해버린 다리일 뿐이다. 마지막 용도가 영화의 폭발 신이었다니 잔인하다. 그런 영화를 본 적도 없다. 네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남편이 완전히 다른 세대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는 신이 났다.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다리 위에 누워 죽은 척을 한다. 사진을 찍어달라는 신호다. 어쩔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나는, 계속 이 남자에게 당하는 것이다. 헤어지지 않는다면 평생. 자, 여기를 보고 찰칵. 다른 방향으로 누워서 찰칵. 지나가던 차에 치인 듯이 찰칵. 그는 카메라 속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좋아, 세 번째 것은 지워주고.”
자동차는 못 다뤄도 카메라 정도는 다룰 줄 알 텐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지워준다. 우리가 찍은 모든 사진들을 죄다 지워버리고 싶다는 걸 이 남자는 아는지 모르겠다.
2.
“너는 뭐 읽고 있냐?”
그가 처음 내게 말을 걸었을 때가 기억난다. 방학 때도 습관처럼 동아리 방에서 책을 읽곤 했다. 선풍기가 힘없이 돌아가면서 더운 바람을 뿜어내고 있었다.
“버, 버지니아 울프. 선배는요?”
“나는 《슬램덩크》.”
만화책을 잔뜩 쌓아놓은 주인공이 이 선배구나.
“그거, 혹시 영어로 된 책이냐?”
나는 대답을 못 하고 미적거렸다. 다른 사람들처럼 비꼬는 말들이 이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문과를 나오면 다 그러냐, 혹시 읽은 척만 하는 것 아니냐, 영화 자막은 필요 없겠네 등등.
“나도 영어로 된 책을 읽고 싶은데. 입문자용으로는 뭐가 좋을까?”
그는 만화책을 덮고 내게 다가왔다. 이상했다. 땀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이마도 축축하지 않고 목덜미와 겨드랑이에 땀자국도 없었다. 나는 손수건을 꼭 쥐었다.
“헤, 헤밍웨이 정도로 시작하세요. 모르는 단어는 별로 없을 거예요.”
“<노인과 바다>를 쓴 할아버지 말이지?”
“초기 단편들이 더 좋아요. 집에 있으니까 빌려드릴게요.”
“고마워. 그럼 내가 밥을 사지.”
그렇게 우리들의 첫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In Our Time》(《우리들의 시대에》)을 빌려주었는데 그걸 다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한 번도 헤밍웨이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까. 그가 궁금해하는 건 나에 관한 것들이었다.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사춘기 시절엔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필이면 왜 영문과에 들어왔으며 문학 동아리에 들어오게 된 이유 등등. 아빠가 일찍 돌아가셨다고 하면 다들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언제, 왜, 어떻게 돌아가셨고 경제적으로는 힘들지 않았는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도 물었다. 그런 질문을 받으니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선배는 공대 다니잖아. 그런데 왜 문학 동아리에 들어왔어?”
내가 제일 궁금하던 것을 물어봤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사람에겐 도망갈 곳이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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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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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지은 책으로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 《뉴욕 비밀스러운 책의 도시》, 《하트브레이크 호텔》, 《파라다이스의 가격》이 있다. 서진의 개인홈페이지 3nightson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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