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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9.10 09:39 수정 : 2013.09.11 10:37

서진 소설 <2화>



3.

키웨스트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한다. 지도상으로는 1시간 40분이 남았다지만 또 어디에서 사진을 찍자고 할지 모른다.

“이런 멋진 곳을 드라이브하려면 배경음악이 필요하지?”

남편은 쿵쿵거리는 댄스음악을 튼다. 여자아이들이 깜찍한 옷을 입고 춤을 추는 노래다. 소파에 앉아서 입을 벌리고 멍하게 보는 것도 모자라서 세계 최고의 드라이빙 코스에서도 이런 노래를 듣다니. 참자. 2차선 도로에 푸른 바다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참자.

“저녁은 뭘 먹지?”

남편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 작년만 해도 최신 모델이었는데 직장을 그만둔 이후로 남편의 휴대폰은 더 이상 바뀌지 않는다.

“찾았다. 굴 요리 전문점이 있네. 생굴이 껍질째로 나온대. 지난밤 멕시코 요리는 끔찍했잖아.”

지피에스에는 일직선의 2차선 도로가 심심하게 그려져 있다. 마이애미를 떠날 때만 해도 교통 체증을 벗어난 것에 감사했다. 하지만 수평선과 쭉 뻗은 도로만 있는 풍경을 계속 보고 있으니 지루해졌다. 시속 120킬로미터로 지나가는 지루함. 사람들이 꽤나 살고 있을 법한 마을에는 식당 몇 개와 대형 슈퍼마켓이 있을 뿐이었다. 일상을 떠나 왔는데 일상의 모습을 보게 되면 눈을 돌리고 싶다. 관광객이라고 놀려도 좋다, 판타스틱한 걸 보여다오.

세븐 마일 브리지를 지나자 풍경이 변했다. 신호등과 건물이 갑자기 나타났다. 야자수가 길게 이어진 길이 보인다. 빅토리아 양식의 집들과 그럴듯한 호텔도 보인다. 반바지를 입은 관광객들도 보인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목적지까지는 15분 남았다. 마이애미에서 키웨스트까지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달릴 수 있을 거라고 그를 설득했지만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오직 하나, 헤밍웨이의 생가다.

4.

그는 졸업과 동시에 취직했다. 동아리나 학과 선배들이 취업을 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학원 선생님도 아니고 계약직 교사도 아니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전자업체의 휴대폰 개발부였다. 우리가 어정쩡한 선후배 관계에서 연인 관계로 발전한 결정적인 계기는 그의 빳빳한 명함이 아니었을까? 동아리에서 멋진 소설을 쓰던 선배도 졸업 후에 도서관에 처박혀 있으니 더 이상 멋져 보이지 않았다. 등단해서 작가가 된 선배들도 궁핍한 생활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졸업을 앞둔 나도 슬슬 걱정이 되었다. 작가가 되겠다는 꿈은 어릴 적부터 갖고 있었다. 동아리에서 나름 실력도 인정받았다. 대학교 신문에서 주최한 소설 문학상도 받았다. 하지만 머뭇거려졌다.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서 다른 일로 돈을 벌어야 한다면 글쓰기에 대한 굳은 의지가 있어야 한다. 아니, 그런 걸 생각할 겨를도 없는 열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나에게는 그런 것들보다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 더 앞섰다. 먹고사는 걸 걱정하지 않고 작가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졸업과 동시에 결혼했다. 안정된 직장과 자동차와 아담한 아파트 한 채를 갖고 있는 그와. 미래에 대한 걱정은 해결되었지만 나는 점점 불행해지기 시작했다. 나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완만하게. 먹고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글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5.

남편은 입장료를 내면서까지 헤밍웨이의 생가를 구경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했다. 대신 동네를 산책하면서 사진을 찍고 싶단다.

“당신도 봤지? 집들이 다 100년은 넘은 것 같아. 영화 세트 같다고. 시원하게 맥주도 마시고 싶어. 어차피 당신은 술도 못 마시잖아.”

“당신, 헤밍웨이를 좋아하지 않아? 그가 쓰던 타자기도 있다고.”

“뭐, 타자기는 타자기일 뿐인데. 헤밍웨이를 직접 만날 수 있다면 모를까.”

“좋은 기를 받을 수도 있어.”

혼자 들어가기 싫어서 궁리를 해보지만 남편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는 성격이니까. 할 수 없이 혼자 표를 끊고 들어갔다.

저택을 기대했는데 테라스가 달린 소박한 2층집이다. 1층에 들어가니 초상화가 몇 개 걸려 있다. 그중에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콧수염을 기른 중년의 헤밍웨이다. 반바지를 입고 쪼그려 앉아 개를 쓰다듬고 있다. 클라크 게이블 같은 능글능글한 웃음을 지으면서. 흑백사진도 여기저기에 걸려 있다. 젊었을 때도, 늙었을 때도 작가라기보다는 영화배우 같다. 카메라를 보고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찰칵. 작가 같은 여유로운 포즈로 찰칵.

“헤밍웨이는 두 번째 부인인 폴린과 함께 이 집에서 살았지요. 그가 네 번 결혼한 건 다들 아시죠?”

얼굴의 주름이 흘러내릴 것만 같은 할머니가 설명한다. 팔과 다리가 부풀어서 터질 것만 같은 여자 서너 명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남자 한 명이 아이와 함께 할머니의 설명을 듣고 있다. 꼬마 남자애는 복도를 기웃거린다. 아빠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랴, 아이를 다그치랴 분주하다. 그들은 마치 할리우드 영화배우의 집을 방문한 것처럼 들떠 있다. 이들 중에 헤밍웨이의 책을 읽어본 사람이 있는지 궁금하다.

“헤밍웨이는 결혼을 할 때마다 더 부자인 여자와 만났답니다.”

사람들은 웃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을 할 때마다 가난해진다. 욕실에는 자기로 된 하얀 욕조가 있다. 수도꼭지와 세면대도 요즘 것과는 달리 투박하고 작다. 80년 전에 이곳에서 헤밍웨이가 이을 닦고, 욕조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침실에는 고양이가 누워 있었다. 모형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꼼짝하지 않고 몸을 둘둘 말은 채로. 수십 마리의 육손 고양이가 헤밍웨이의 집을 돌아다닌다고 한다. 가이드는 고양이의 이름을 모두 외워야 한단다. 할머니가 침대 위에 있는 고양이의 이름을 말해줬는데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관광객들을 따돌리고 나왔다. 뒤뜰로 돌아가니 커다란 수영장이 보였다. 다른 그룹의 관광객들이 건장한 남자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다.

“당시에는 이 주변에 개인 풀을 가진 사람이 없었지요. 그가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폴린이 지은 건데, 얼마나 돈이 많이 들었는지 그는 수중에 있던 마지막 1페니마저 폴린에게 쓰라고 줬답니다. 그래서 수영장 앞쪽에 1페니 동전이 박혀 있어요.”

사람들은 웃는다. 관광객들은 가이드의 말에 억지로라도 웃을 준비가 되어 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헤밍웨이의 침실도, 수영장도 아니다. 목표는 그가 소설을 쓰던 서재다. 서재는 별채에 있다. 두 번째 관광객 그룹도 따돌리고 혼자 살금살금 별채로 갔다.

2층의 서재에는 널따란 마룻바닥 위에 책상과 의자, 그리고 타자기가 놓여 있었다. 마치 단편소설 한 편을 막 끝내고 산책이라도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타자기에 꽂혀 있는 종이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읽고 싶지만 철조망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언제나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준비된 직사각형 모양의 여행 가방도 보인다. 가방 옆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곳을 거점으로 틈만 나면 쿠바로 떠났겠지. 대작가의 책상치고는 소박하다. 의자가 너무 작다. 그가 저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무기여 잘 있거라》를 완성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거대한 마호가니 책상에 온몸이 파묻힐 만한 가죽 의자를 상상했는데.

나는 눈을 살짝 감았다. 서재에서 헤밍웨이의 기가 솟아 나와 내 몸에 스며들 수 있도록. 하지만 관광객들의 발걸음 소리와 웃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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