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 소설 <4화>
9.
“까톡.”
경박한 메신저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딘지 한참 생각해야 했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꿈을 꾼 것도 같다. 그렇다. 여기는 키웨스트다. 스탠드를 켰다. 흐트러진 침대 시트 밖으로 남편의 휴대폰이 삐죽 빠져나와 있다. 남편은 어디 갔을까? 화장실이라도 간 걸까? 휴대폰을 집어 든다.
〈잘 봤어요. 내일 연락 주세요.〉
발신자는 김미정. 채팅 창을 열어본다. 지난 대화 내용이 없는 걸 보니 더 수상하다. 무슨 내용이었기에 지웠을까? 김미정이라…….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지만 떠오르는 얼굴이 없다. 남편이 휴대폰에 집착하는 것은 늘 있던 일이지만 요즘 들어 그 증상이 심해졌다. 혼자 큭큭거릴 때도 있고, 내 눈치를 살피면서 휴대폰을 들고 다른 곳으로 사라질 때도 있다.
잘 봤어요. 내일 연락 주세요.
백 번을 봐도 이 두 마디뿐이지만 그 사이에 생략되어 있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온갖 상상력을 동원했다. 김미정은 무얼 봤다는 걸까? 해외에 있는데도 내일 연락을 달라고 할 만큼 중요한 일이 뭘까? 내가 답장을 한번 해볼까?
온갖 상상이 머리를 뒤집어놓는다. 심지어 남편이 직장을 그만둔 이유, 아이를 갖지 않는 이유, 내가 남편을 멀리하게 된 이유도 모두 김미정 때문인 것만 같다.
아,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생각을 그만두자. 남편이 돌아오면 담판을 지을 것이다. 아무것도 속이지 말고 나에게 모든 걸 털어놓으라고. 단 한 마디의 거짓말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지금까지 나를 잘 속여 왔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모른 척 속아준 것이니까 발뺌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는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화장실엔 불이 꺼져 있다. 잠이 오지 않아 산책을 나갔을지도 모른다. 새벽 2시 20분에 휴대폰도 없이?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는다. 30분이 되었을 때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10.
듀발 스트릿을 걷는다. 낮에 길을 어슬렁거리던 관광객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자동차도 없다. 가로등이 있긴 하지만 일부러 도롯가로 천천히 걸었다. 지갑과 핸드폰, 그리고 호텔 열쇠가 담겨 있는 백을 바짝 끌어안았다. 식당과 기념품 가게들은 문을 닫았다. 고양이 한 마리가 야아옹 하고 울면서 내게 다가온다. 분명 발가락이 여섯 개일 것이다. 등을 쓰다듬어주니 갸르르릉거린다. 털이 온통 검은색인데 눈만 노란색이다. 살아 있는 것을 만져서 그런지 마음이 조금 놓였다.
길모퉁이에 은은한 네온사인 불빛이 보인다. 나도 모르게 불빛에 이끌려 그곳으로 가본다. 슬러피 조의 바(Sloppy Joe’s Bar). 이 근방에 아직까지 문을 열고 있는 술집이라면 남편이 있을지도 모른다.
문을 열자 술집 특유의 눅눅한 냄새가 풍겼다.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탱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가게는 전체적으로 어두워서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켜고 싶은 심정이었다. 테이블에는 낮은 촛대가 하나씩 놓여 있지만 불은 다 꺼져 있었다. 바에는 기름 램프의 불빛이 흔들거렸다. 빈티지 소품으로 예전 분위기를 내려나 보다. 바텐더도 회색 조끼를 입고 빨간 넥타이를 맸다. 나를 보며 살짝 웃는다.
손님은 단 한 명뿐이다. 등을 구부리고 턱을 괸 채로 바에 앉아 있다. 어깨도 넓고, 머리도 하얗기 때문에 남편이 아니라는 건 눈치챘지만 그냥 나가기도 어색해서 바로 걸어갔다. 남편이 이곳에 왔었는지도 물어봐야겠다.
“뭐로 드시겠습니까?”
바텐더가 묻는다.
“물…… 물이요. 아니, 오렌지 주스를 주세요.”
바텐더는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얼음물과 오렌지 주스를 각각 한 잔씩 내놓는다. 두 자리 건너 앉아 있던 남자는 나를 힐긋 쳐다본다.
“그걸 마시면 잠이 올 거라고 생각하오?”
남자의 음성은 바리톤처럼 낮다. 머리도 하얗고 콧수염도 하얗다. 볼은 약간 상기되어 있고 살짝 튀어나왔다. 파란색 체크무늬 셔츠의 버튼이 두 개나 풀려 있다. 그 사이로 복슬복슬한 가슴 털이 보인다. 운동으로 단련된 어깨와 팔뚝, 햄버거를 먹으면 소스가 묻을 것 같이 튀어나온 배. 나는 다시 한 번 그를 쳐다보았다. 누군가와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오늘 13달러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집의 주인장과 똑같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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