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 소설 <5화>
11.
키웨스트에서 매년 헤밍웨이 닮은 꼴 선발 대회를 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수염을 곱게 기른 은발의 할아버지들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수십 명이 모여 있는 사진을 봤다. 산타 선발 대회도 아니고, 헤밍웨이 선발 대회라니. 내 옆에 앉아 있는 남자는 그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올해 우승을 해서 아예 이곳에 눌러살기로 작정했을 수도 있다. 헤밍웨이와 꽤나 닮았지만 이 사람의 얼굴엔 사진 속의 헤밍웨이에게서 보던 미소가 없다. 그 미소가 없으니 보통 사람 같다. 사람들이 모두 잠든 새벽에 잠들지 못한 늙은 남자. 눈 아래 주름도 많고 피부도 푸석푸석하다.
“사람을 찾고 있어요.”
오렌지 주스가 쓰다. 상한 건 아니겠지.
“이 시간에 도망간 남자라면 돌아오지 않을 거요. 여자에게 작별 인사 없이 떠나는 남자는 겁쟁이 중 겁쟁이지.”
헤밍웨이를 닮은 남자가 말한다. 보물처럼 술잔을 두 손에 꼭 쥐고. 그가 말하니 어쩐지 남편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혹시 동양 남자 한 명을 보지 못했나요? 키는 저 바텐더만 하고 검은 뿔테를 낀 호리호리한 체격인데…….”
“내가 알기론 동양 사람은 이곳에 오지 않아. 어디서 오셨소? 일본?”
“한국이요.”
“한국?”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그 한국 말이지? 내가 전장에 가봤어야 하는 건데. 맥아더 사령관은 작전을 잘못 짠 게 틀림없어. 나라를 두 동강 내고 평화를 지켰다고 으스대는 이 나라에 구역질이 나오.”
그는 내 옆자리로 바짝 다가왔다.
“혹시, 여기까지 오는데 수상한 사람 못 봤소?”
달큼한 술 냄새가 풍겼다. 도대체 이 술집에서 몇 시간 동안 앉아 있던 걸까?
“아, 아뇨. 고양이밖에 보지 못했어요.”
그는 출입구를 슬쩍 쳐다본다. 가슴에서 수첩을 꺼내 펜으로 깨알같이 뭔가를 적는다.
“놈들이 벌써 알아챘을지도 몰라. 케첨에서 여기까지 온 건 아내도 모른단 말이오.”
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놈들이라뇨?”
손님이 아무도 없는데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누구긴? 에프비아이지. 내가 이 근처에서 쿠바 녀석들과 접선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 남자는 헤밍웨이의 생김새뿐만 아니라 성격까지 모방하려나 보다. 하지만 이곳에 누군가가 숨어 있다면 연방 정보원이 아니라 닮은 꼴 심사위원일 것이다. 대회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닮은 꼴을 유지하는 이 남자에게 보너스 점수를. 성격 묘사까지 완벽함.
“내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그래요, 당신은 파파니까. 영화배우보다 더 영화배우 같은 작가.”
그는 살짝 웃는다. 헤밍웨이의 사진에 들어 있는 완벽한 미소를 지으면서.
“소설 속의 내가 한 짓을 사람들은 진짜 내가 한 거라고 믿소.”
“대부분 사실이 아닌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오?”
남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소설을 읽는 게 더 재밌어요.”
“나는 숨을 곳이 없소. 사람들은 내 침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까지 알고 있지. 심지어는 소설 속에서도 숨을 수 없다오. 진짜 거짓말을 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소.”
보너스 점수 추가.
“한잔하겠소?”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손을 살짝 든다. 바텐더에게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손가락 둘을 펼친다.
“밤에 오렌지 주스를 마시면 속이 더 쓰리거든.”
술을 못 마신다고 말하려다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투명한 호박색 액체가 담긴 유리잔이 벌써 내 앞에 놓였다. 그는 잔을 살짝 든다. 나도 얼떨결에 든다. 그가 꿀꺽, 하고 한 모금을 마신다. 나도 한 모금을 마셔본다. 입안을 살짝 적실 정도로만.
“감초 맛이 나요.”
나도 모르게 이 말이 나왔다.
“모든 술은 감초 맛이 나지.”*
헤밍웨이의 단편소설에서 들어본 듯한 대사였다.
12.
술을 마시면 가슴이 쿵쾅거린다. 물을 마셔도 멈추지 않고 얼굴이 벌게지기 때문에 자제해왔다. 그런데 이 남자와 감초 맛이 나는 술을 마시니 기분 좋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이니까 더 편해서였을까? 어떻게 해서 남편을 만났고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왔다.
“여기엔 어쩐 일로 오게 되었소?”
남편 친구의 회사가 이곳 업체와 워싱턴에 있는 업체와 공동 개발을 하는데 남편은 아르바이트 겸 일을 도와주러 왔다. 나는 필요할 때마다 통역을 도와주었다. 대부분이 기술 용어라서 뜻도 모른 채 통역을 해줘도 상대방은 대충 알아들었다. 로봇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각하는 척하지만 생각할 능력이 없는 로봇. 능수능란하게 일을 처리해서 칭찬을 받지만 내가 하는 일의 진짜 의미는 파악할 수 없다. 어쩌면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짜 의미 따위는 몰라도 어른이니까 다들 아는 척을 할 뿐.
워싱턴에서 지내는 동안엔 눈이 지긋지긋하게 내렸다. 하루는 50센티미터까지 쌓여서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보름 일정이 나흘 더 늘어났다. 일을 마치고 남은 돈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여행지는 내가 골랐다. 지긋지긋한 눈 때문에 따뜻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하와이는 어떨까, 라고 생각했는데 미국 직원이 지난 크리스마스를 마이애미에서 보냈다고 했다. 그때 키웨스트가 떠오른 것이다. 미국의 최남단에 있는, 헤밍웨이의 생가가 있는 곳.
“영광인걸? 그나저나 남편 이야기나 더 해보슈.”
남편은 호텔 방에서 밤새도록 노트북을 켜놓고 일을 했다. 프로그램을 짠다고 했다. 촤라라락, 알 수 없는 언어와 기호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등을 약간 구부린 채로, 가끔씩 물을 마시거나 화장실에 가는 것을 빼면 꼼짝없이 앉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회사에서도 저런 식으로 일을 했겠지. 그도, 로봇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우리에겐 대화가 필요하다.
나 몰래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건 한 달 전쯤이다. 밥을 먹을 때, 티브이를 볼 때 항상 휴대폰을 들고 있는 건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느낌이 달랐다. 누군가에게 메시지가 왔고, 그것을 확인할 때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나에게 한 번도 지어본 적이 없는 종류의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전쟁이구먼.”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하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네?”
“일차 세계대전 때부터 나는 여러 전장을 돌아다녔지.”
알고 있다. 부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연상의 간호사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던가? 아니지, 짝사랑이었나?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큰 전쟁은…….”
그가 술잔을 비웠다.
“부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법이지.”
*어니스트 헤밍웨이, 〈흰 코끼리 모양을 한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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