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 소설 <6화>
13.
내가 그를 부축했는지, 그가 나를 부축했는지 잘 모르겠다. 똑바로 걷고 싶은데 제대로 되지 않았다. 넘어질 뻔했는데도 까르르, 웃음이 나왔다. 남편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걱정이 되지 않았다. 카지노에서 잭팟을 터뜨렸을 것도 같고, 괴한에게 총격을 당해서 죽었을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는 기분이 좋으니까. 아, 이래서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구나.
“다 왔소.”
고개를 들었다. 어둠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아도 이곳이 어딘지는 안다. 키웨스트에서 가장 유명한 집이다.
“우리 집에는 손님용 침실도 있소.”
그것도 안다. 약간 작아 보이는 싱글 침대가 있고 주름진 커튼이 팔랑거리고 있었지. 협탁에는 놋쇠로 된 물 주전자가 있을 것이다. 그는 나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원한다면 나와 함께 자도 좋소.”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당신은 모든 여자들이 당신과 자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는 어깨를 들썩거렸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여자를 얼마나 혐오하는지 알고 있어요.”
나는 그를 떠밀었다.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중심을 잡고 일어났다.
“당신의 소설을 읽어보면 다 알 수 있어.”
그는 멍하니 나를 쳐다본다. 나도 그를 쳐다본다. 서로에게 변명을 해야 하는데 할 말을 찾기가 힘들다. 바보. 나는 그를 진짜 헤밍웨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손을 흔든다. 파리를 쫓은 시늉 같다. 대문을 열자 끼익, 소리가 난다. 거실의 불이 켜지더니 곧 이어 2층에 있는 침실의 불이 켜진다. 잠시 뒤, 침실이 어두워졌다.
문이 살짝 열려 있다. 일부러 잠그지 않은 걸까? 문고리를 잡아본다. 새벽이슬이 맺혀 있어서 축축하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14.
눈을 떴을 때, 누군가 내 옆에서 코를 골고 있었다. 천장의 무늬를 한참 바라보다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내 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있는 사람은 남편이었다. 이곳은 우리가 묵었던 하트브레이크 호텔이고. 어떻게 된 걸까? 나는 문을 열고 헤밍웨이의 집으로 들어갔는데……. 이불 속을 살펴본다. 지난밤에 입고 잤던 팬티와 티셔츠 차림이다. 생수를 꿀꺽꿀꺽 삼켰다. 미지근했다.
아침 식사는 호텔 로비에서 유럽 스타일로 제공된다고 했지만 바싹 마른 크루아상과 텁텁한 커피뿐이었다. 제대로 된 아침을 먹기 위해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몸을 비틀거렸다. 남편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휴대폰으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슬러피 조의 바로 발길이 향했다. 위치는 똑같았는데 분위기는 달라 보였다. 늦은 밤까지 잠들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술집이 아니라 관광객을 위한 싸구려 술집 같다. 키웨스트에서 가장 유명한 술집이라고 요란을 떠는 문구가 군데군데 보인다. 벽에 걸린 흑백사진에는 헤밍웨이를 닮은 할아버지 다섯이 어깨동무를 하고 활짝 웃고 있다.
“당신은 헤밍웨이의 열혈 팬이구나.”
남편이 웃는다. 거의 비웃음에 가깝다.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샌드위치를, 남편은 새우 칵테일과 맥주를 시켰다. 그는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곳에 오기까지 내가 한 말이라고는 ‘응’, ‘아니’라는 대답뿐이었으니까. 아침 먹으러 갈까? 응. 여기서 먹을까? 아니. 어디 생각해둔 곳 있어? 아니. 대답이 짧을수록 남편은 긴장을 한다. 남편은 긴장을 해야 한다. 이제 중요한 질문을 할 테니까.
음식이 나왔다. 남편이 포크를 들 때, 내가 말했다.
“김미정이 누구야?”
그는 포크를 내려놓는다.
“다 알고 있으니까 말해. 여기서 거짓말하면 나 혼자 차를 몰고 떠날 테니까.”
사실은 아무것도 모른다. 남편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거짓말을 꾸며낼 시간이라도 필요한가 보다.
“나중에 당신한테 다 말하려고 했어. 좋은 결과가 나오면.”
“무슨 결과?”
“김미정 몰라? 문학 동아리 1년 후배 있잖아. 국문과에 다니던 똘똘한 아이. 걔가 출판사에 다니거든. 벌써 편집장이야.”
“그래서?”
“책이 나올 것 같아.”
“무슨 말이야?”
“장편소설을 쓰고 있었어. 작년에 1억짜리 공모전에 투고했는데 떨어졌지만. 김미정이 보여달라고 해서 줬더니 자기네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고 싶대. 잘만 수정하면 꽤나 팔리는 소설이 될 거라나. 어젯밤에 연락받은 거야.”
칭찬이라도 받고 싶은지 으스대는 저 남자의 얼굴에 얼음이 가득한 물을 뿌릴 뻔했다. 그동안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 남자는 짐작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새벽엔 어디 갔었어? 한잔하고 돌아왔더니 없던데.”
나는 대답 대신 물을 꿀꺽꿀꺽 삼켰다.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거짓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은, 진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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