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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9.27 10:10 수정 : 2013.10.02 10:26

강병융 소설 <5화>



벙커

인간은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불을 붙였습니다. 쥐는 구석에 누워 낑낑 신음을 내며 뒹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누가 들어도 가짜 신음이라는 것이 너무 티가 났습니다.

인간은 성냥불을 양초에 옮겼습니다. 촛불은 고작 하나였지만, 생각보다 꽤나 밝은 빛을 냈습니다. 양초 위에서 불꽃이 활활 타올랐습니다. 초라하게 구석에 찌그러진 채 신음하고 있는 쥐의 모습도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벙커 안이 밝아지자, 쥐를 기다리고 있던 몇 가지 기계들이 보였습니다. 싱크대도 보였습니다. 인간은 싱크대로 가 물을 틀었습니다. 콸콸콸 물소리가 시원하게 났습니다. 쥐는 촛불 때문에 눈이 부시다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휙 돌렸습니다. 물소리도 듣기 싫다는 듯 앞다리로 귀를 막았습니다. 쥐는 양초가 어디서 난 것일까, 궁금했습니다.1) 또 물소리가 왜 그렇게 크고 차갑게 느껴지는지도 의문스러웠습니다.

쥐는 인간이 무슨 말을 하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본래 입이 없는 존재처럼 입을 꽉 다물고 있었습니다. 벙커 안이 서늘한 분위기로 꽉 찼습니다. 물소리만 대포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스르르 불길한 기운이 벙커 바닥에 깔리자, 쥐는 슬슬 인간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모든 일을 다 해봤다던 쥐도2) 이런 상황은 처음 겪는 듯했습니다. 쥐는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 애처롭게 보이려고 몹시 노력했습니다. 아주 귀여운 고양이에게나 어울릴 법한 표정을 지으며 인간을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두 발을 교대로 얼굴에 삭삭 비비며 살려달라는 시늉을 하고 있었습니다. 꼬리도 살랑살랑 흔들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습니다. 눈길 대신 발길을 선사했습니다. 힘차게 쥐의 배를 걷어찼습니다. 쥐는 찍소리 할 틈도 없이 벽으로 휙 날아가 버렸습니다. 벽에 머리를 콩 박은 쥐의 콧구멍에서 새빨간 피가 쪼르륵 귀엽게 흘러내렸습니다.

인간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잠시 만지작거리자, 벙커 안에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쥐가 예전에 꽤 즐겨 불렀다던 노래3)였습니다. 쥐는 익숙한 노랫가락 덕분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백악산에서 그 노래를 듣던 추억4)을 떠올렸습니다. 쥐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습니다. 무언가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스테인리스 안전 장갑을 끼고, 기계들을 하나씩 하나씩 살폈습니다.

노란색 안전 열쇠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빨간 손잡이를 당긴 뒤, 녹색 버튼을 누르자, 고기 박피기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박피기는 우렁찬 소리를 내며 고깃덩어리를 기다렸습니다. 고슴도치의 가죽이라도 벗겨낼 기세였습니다. 거북이의 등껍질도 남아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박피기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확인한 인간은 전원을 끄고, 골절기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기계 하단의 녹색 버튼을 누르자, 가는 톱이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박피기의 소음보다는 가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골절기가 움직였습니다. 절로 소름이 돋는 지독한 소리였습니다. 빨간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골절기의 실톱이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기계가 멈출 때마다 노래가 크게 들렸습니다. 물소리, 기계음과 함께 뒤섞인 음악이 원곡의 장엄함과 더불어 으스스한 분위기까지 뿜어냈습니다. 쥐는 그야말로 쥐 죽은 듯이 숨죽이고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네 다리가 덜덜덜 떨렸습니다.

인간은 마지막으로 슬라이서를 점검했습니다. 전원을 켜고, 손잡이를 좌우로 서너 차례 움직였습니다. 인간의 팔 동작에 따라 손잡이가 부드럽게 좌우로 움직였습니다. 슬라이서 점검을 마친 인간은 전원을 끄고 고기 두께를 조절하는 레버를 만졌습니다. 눈금은 1mm를 가리켰습니다. 슬라이서는 어떤 고깃덩어리도 샤부샤부용으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간단히 기계 점검을 마친 인간은 연육 망치를 들고 쥐에게 다가갔습니다. 쥐에겐 연육 망치도, 인간도, 기계들도, 음악 소리도, 물소리도, 심지어 인간이 끼고 있던 스테인리스 그물망 안전 장갑까지도 위협적이었습니다. 쥐구멍도 없는 벙커에서 쥐가 갈 곳은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공포의 상황을 피할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라고 했건만, 도무지 쥐는 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움직일 용기도 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무심하게 쥐를 향해 연육 망치를 휙 집어 던졌습니다. 망치가 휭휭휭 허공을 몇 차례 천천히 돌며, 쥐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습니다. 놀란 쥐는 간신히 망치를 피했습니다. 망치는 쥐 대신 쿵 하고 벽을 때렸습니다. 인간은 바닥에 떨어진 망치를 주워 또다시 쥐를 향해 휙 던졌습니다. 쥐는 또 가까스로 피했습니다. 하지만 공포까지 피할 순 없었습니다. 벙커의 벽에 망치 자국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바닥에도 망치 자국이 생겼습니다. 쥐는 벽에 난 망치 자국들과 움푹 팬 바닥을 보며, 극한의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저 살기 위해 망치를 피하며 정신없이 이리저리 벙커 바닥을 기어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의 표정은 망치처럼 차갑고 딱딱했습니다. 사방이 망치 자국으로 가득할 무렵, 쥐는 완전히 지쳤습니다. 축 처진 눈을 하고, 헐떡거리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꼬리까지 축 처져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표정이었습니다. 인간은 쥐의 표정을 잘 읽고 있었습니다. 쥐는 차라리 망치에 맞아 죽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확히 그 순간, 인간은 망치를 더 이상 던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벅저벅 쥐에게 다가갔습니다. 쥐는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다가올수록, 인간이 크게 느껴질수록, 몸은 더욱 굳는 것 같았습니다.




독자의 기호에 따라 주석에 밝힌 신문 기사들과 곁들여 읽으셔도 재미있습니다.

1) <세계일보> 2008년 5월 27일 자 <‘촛불시위 배후수사’ 칼은 뽑았지만…물증확보 “글쎄”>

2) <프레시안> 2013년 2월 7일 자 <'MB', 임기 말에도 '내가 해봐서 아는데…'>

3) <참세상> 2012년 4월 26일 자 <“MB 아침이슬 부르며 쇠고기 협상 사과 해놓고…”>

4) <이데일리> 2008년 6월 19일 자 <청와대 뒷산서 아침이슬 듣는 대통령 기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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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강병융의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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