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규 소설 <6화>
8
그이는 저녁 7시에 집으로 돌아왔다. 12시경에 전화로 말했던 것처럼 그이는 혼자 퇴근하지 않고 손님을 함께 데리고 왔다. 여사도 알고 있는 그 손님은 그이가 특별히 총애하는 직속 부하 ‘군’이었다.
꽤 오래전부터 봐왔지만 여사는 ‘군’의 강직한 태도, 적당히 딱딱하게 구는 말투와 늘 변함없는 태도에서 나타나는 믿음직함이 싫지 않았다. 늘 그랬듯 이러한 ‘군’의 모습은 여사에게 그이에 대한 신뢰로까지 발전되었다. 그이가 평소 보여주는 모습이 그랬기 때문이다. 국가를 위해서라면 이해하기 힘든 선택을 하더라도 패기 넘치게 밀어붙이는 강한 인상을 여사에게 심어주었기에 그이가 선택한 직속 부하 ‘군’ 역시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게 여사의 지론이었다.
‘군’이 여사에게 구십도 각도로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자신의 피앙세 ‘서’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한담을 나누는 동안 그이는 양복도 벗지 않은 채 성큼 발걸음을 옮겨 단숨에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더니 이내 2층 마지막 방에 틀어박혀 숨죽이고 있던 셋째 아들의 목덜미를 붙잡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셋째 아들을 호랑이가 그려진 카펫 위에 패대기치듯 내던진 뒤 녀석을 무릎 꿇린 그이에게 여사가 한 박자 먼저 다가가 사정하듯 말했다. 여사는 모든 게 자식 잘못 키운 자신의 잘못이니 선처를 부탁한다고 말하며, 오늘 같은 날 역정은 적당히 내셨으면 좋겠다는 진심 어린 말도 함께 건넸다. 동시에 여사는 그이가 갖고 있는 정보력의 위대함에 새삼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 대의를 위해 필요한 정보를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수집하는 기관의 수장으로만 알았는데, 그이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셋째 아들이 오늘 학교를 조퇴했는지 안 했는지까지 귀신같이 알아내는, 그야말로 시시콜콜한 정보 수집에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셋째 아들 역시 아버지가 발휘하는 정보력의 심대함을 오래전부터 뼛속 시리게 깨우치고 있었기에 자신이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따위의 질문은 애초에 꺼내지도 않았다. 다만 태생이 심약한 녀석은 아버지가 이번엔 어떤 체벌로 자신을 혼내줄지 심히 두려워했다.
어쩐 일인지 그이가 셋째 아들에 대한 체벌을 잠시 고민했다. 그래도 오늘은 손님, 그것도 자신의 직속 부하와 그 피앙세와의 저녁 약속이 예정돼 있어서였는지. 또한 이번 한 번만 너그럽게 보아 넘기면 어떻겠냐는 여사의 청을 뿌리칠 수 없어서였는지, 무엇보다 자신 앞에서 못생겼다고 손사래를 치며 결혼한다고 말하던 ‘군’의 말과 다르게 피앙세 ‘서’가 빼어난 미인이란 점에 다소 불편한 심기가 누그러졌는지 그이는 셋째 아들에게 어른들 저녁 식사 마칠 때까지 현관 앞에 무릎 꿇고 두 손 들고 있으란 지극히 가벼운 체벌만을 지시했다. 하지만 셋째 아들은 완화된 체벌에도 불만이 남았는지 입이 툭 튀어나와 보는 이들 앞에서 시위하듯 현관문을 가로막은 채로 무릎 꿇고 손들었다. 현관문 양옆엔 경호 사병들이 항시 근무 중이었고 거실과 마당에도 적지 않은 경호 사병들이 어슬렁거렸다.
‘서’를 향해 평소 보여주지 않던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인 그이가 시장하니 어서 빨리 식사하자는 말로 저녁 식사의 서막을 고했다. 그이가 앞장서자 여사가 그 뒤를 따랐고, ‘군’과 ‘서’도 서둘러 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9
그이는 평소 식사 시간보다 훨씬 더 말수가 많았다. 여사는 그이의 수다를 뜨겁게 데운 정종을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마셨던 탓으로 돌리고 싶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충분히 있을 수 있지만 말이다. 그 다른 이유 중 가장 적당한 이유로, 그이는 식사 자리에서 내뱉는 당신의 말(씀)을 마치 교주의 복음처럼 경청하는 이들을 만났을 때도 종종 말이 많아지곤 했다. 또 하나의 가능성도 상존했지만 여사는 애써 그 가능성을 무시했다. 자기보다 젊은 여자를 만나거나 그 젊은 여자가 누가 보아도 빼어난 미모를 가진 미인이며, 빼어난 미색으로 무장한 젊은 여자가 자신의 말(씀)마저 복음으로 받아 마시는 태도를 보이면 그이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경륜 중 뭐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 몸이 달아오르곤 했다.
그이의 말하는 속도나 모습으로만 보면 필경 세 번째 가능성, 미인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기질이 가장 확실했지만 여사는 결코 그 가능성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건 자신과 그이 사이에 형성된 믿음을 파기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여사는 저녁 식사 내내 도리 없이 그 눈길이 마냥 늠름한, 천생 군인 같은 ‘군’에게 집중되는 자신의 관심 또한 한사코 진실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다짐받아야 했다. ‘군’이 젊디젊으며, 게다가 정력적이기까지 한 몸을 가졌고 법적으론 아직까지 엄연한 총각이며, 무엇보다 머리숱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그이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풍성하고 검은 머리칼을 자랑하는 사내라는 점에 관심을 갖는다는 건 여사 스스로 세워놓은 그이와의 초기 감정, 군인 아내로 일부종사하겠다는 확고하고 지엄한 연애 감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군’은 그이를 말끝마다 ‘장군님’, ‘장군님’으로 부르며 그이의 말(씀)을 강렬한 눈빛으로 빨아들였다. 그 눈빛을 보아하니 아예 그이의 말(씀)을 씹어 삼킬 기세로 이글거렸다.
그런데 한 가지 묘한 건 그이가 자신만을 향해 열렬한 눈빛 분사를 지속하는 ‘군’을 쳐다보기는 했지만 오히려 ‘군’보단 고개를 다소곳이 숙인 채 구첩반상 다 놔두고 오직 자신과 여사가 정성껏 빚은 찹쌀떡만 주야장천 주워 먹는 ‘서’에게 더 많은 눈길을 할애했다는 점이다. 그런 그이가 앉아 있는 자리 뒤로 그이의 또 다른 직속 부하들이 군복 차림으로 부동자세를 유지했는데, 여사가 가만히 보니 그이가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게 아니라 어깨에 훈장을 주렁주렁 매단 군복 차림으로 저녁 식사에 임한 게 눈에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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