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규 소설 <8화>
12
“뭐 이런 걸 갖고 호들갑이야. 본인이 해결하겠어.”
거반 죽어가는 ‘서’를 앞에 두고 그이가 한 말이다. 그이의 한마디가 나오자 수화기를 집어든 부하의 동작이 일순 멈췄고 이제는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워 고통을 호소하는 ‘서’를 향해 여전히 되지도 않는 응급조치를 시도하던 ‘군’ 역시 하던 일을 중단해버렸다.
여사는 그이의 무용담 중 위급 사항 발생 시의 응급조치에 관한 지혜 발휘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다. 그이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자신이 먹던 젓가락 한 짝을 손에 쥐고 수치심을 잃고 바닥에 드러누운 ‘서’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군’에게 ‘서’를 일으켜 자리에 앉히라고 명령했다. 자신의 피앙세인 ‘서’를 일으켜 세울 때 ‘군’의 얼굴에선 비로소 희망의 빛을 발견한 듯 화색이 돌았다. ‘군’은 자신의 직속상관이며 최근 국가의 부름을 아방가르드하게 실천해낸 눈부신 활약상의 주인공인 그이라면 지금의 난국쯤 능히 타개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믿음은 물론 지엄한 그이를 바라보는 여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여사는 직속 부하인 ‘군’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절실하게 그이를 믿었다. 오히려 여사의 얼굴에 안도감이 비친 건 간신히 의자에 앉고서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서’를 바라보는 그이의 시선 때문이었다. 그이가 ‘서’를 바라보는 눈빛에선 이제 더 이상 흠모의 연정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이는 젊고 아리따운 직속 부하의 피앙세일지라도 이런 위급 상황 앞에선 결코 존엄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서’를 통해 새삼 확인했다는 기별로 가득했다.
그이는 이렇듯 모여든 모든 이들의 믿음을 한 몸에 힘입고 ‘서’에게 다가갔다. 그이는 부질없이 ‘서’의 등과 가슴을 계속 문질러대는 ‘군’을 성가시다며 멀찌감치 물러서게 한 다음 장군답게, 군인답게 과감하게 ‘서’의 코앞까지 성큼 다가가더니 이내 그녀의 입을 최대한 크게 벌렸다.
‘서’는 잠자코 그이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장군님 앞에서 흉한 꼴 보인 것에 대해선 나중에 죽을 때까지 속죄하기로 하고 당장은 목에 걸린 이 빌어먹을 찹쌀떡 건더기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는 작심으로 고인 침이 턱 밑으로 흘러내리건 말건 있는 힘껏 입을 벌려 자신의 목구멍 속을 그이에게 열어 보이고자 애썼다.
아주 잠깐 ‘서’의 목구멍을 살핀 그이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오른손에 쥐고 있던 젓가락을 ‘서’의 목구멍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러곤 ‘서’의 기도를 틀어막은 질기디질긴 찹쌀떡 잔존물 제거를 위해 조금은 서툴고 난폭하게 젓가락을 쑤시거나 휘저어댔다.
‘군’은 이 광경을 오직 치유의 과정으로만 이해하려 애썼다. 여사 역시 조금은 과하다 싶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해보기도 했지만 그이의 월남전 참전 당시의 무용담을 전적으로 믿고자 했다. 뭐, 월남전 당시에 그이가 총 한번 쏴본 적 없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긴 했어도 어쨌든 여사는 그이가 이 정도 사소한 일도 해결 못 할 인물이 아니란 확신에 찬 눈길로 그이의 소위 치유 과정을 지켜보았다.
여사, ‘군’, 경호 사병, 직속 부하, 식모, 주방 아줌마, 모인 이들 모두 그이의 전능한 젓가락질을 철석같이 믿고 있어선지 그이가 젓가락을 ‘서’의 목구멍에서 빼낸 뒤 자기 자리로 돌아가 또 한 차례 수정과 한 잔을 시원하게 비울 때까지도 ‘서’의 상태가 어떤 지경인지를 실감하는 데 더없이 인색했다.
그들 중 가장 먼저 ‘서’의 결과를 진단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이였다. 숨이 약간 거칠어진 그이는 수정과를 들이켠 뒤 ‘군’에게 ‘병원으로 데려가는 게 맞겠어’란 짧은 말을 꺼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군’은 ‘서’의 입에서 침이 아닌 검붉은 피가 흐르고 있음을 실감했다. ‘서’의 눈동자는 이미 움직임을 멈췄으며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 그대로였지만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군’은 여전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서’가 죽었다는 사실 말이다. ‘군’은 ‘서’가 죽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만한 그 어떤 방어 장치도 갖지 못했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황망한 상황 속에서 그이가 다급히 여사를 찾았다. 그이는 방금 전 ‘서’의 목구멍을 제법 끝이 날카로운 젓가락으로 쑤셔댈 때의 그 과단성 넘치던 오른손으로 이제는 울지 않는 셋째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여사에게 자신은 다시 본부로 가야 할 것 같다고, 사실 오늘 대단히 중요한 날이라고, 그러니 이곳 뒤처리를 부탁한다는 당부의 말을 남겼다. 그런 그이가 생전 꺼내지 않던 다음과 같은 말도 곁들였다.
“국가가 원하는 삶을 산다는 건 뭐든 힘들어.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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