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란 소설 <5화>
자정 무렵이면 나는 깨어 있었다. 그 시간이면 나는 시금치 소테로 간단한 요기를 하곤 했다. 병원의 규칙적인 생활 탓에 공복감은 사라졌지만 정신만은 명징했다. 물론 신경 이완제를 맞지 않은 날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날은 온몸이 축 늘어졌다. 미지근하고 끈적이는 물속에 반쯤 몸이 담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구포가 죽었다고 믿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구포의 장난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면 그는 그런 장난도 서슴없이 할 사람이니까. 하지만 난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취침 시간이 되면 간호사들은 환자들이 침대에 눕는 것을 확인한 뒤 밖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언제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속에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는 것처럼 다른 방의 사람들 속에도 불꽃이 있다.
두터운 완충재를 댄 벽 밖으로 웬만한 소음은 새어나가지 않는다. 어느 방에서 어느 환자가 발작을 일으킨다 해도 아무도 알 수 없다. 만약 소음이 새어나간다면 환자들이 금방 동요할 것이고 병원은 삽시간에 환자들의 발작으로 시끄러워질 것이다.
불을 끄고 나면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벽 위에 너울대는 문양을 본다. 희디흰 벽은 커다란 영사막처럼 수많은 영상들을 흘려보낸다. 가끔 달빛에 창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질 때도 있다. 창살과 창살 사이의 틈이 내가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넓어진다. 마음만 먹으면 나는 그 틈새로 이곳을 나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곳을 제 발로 다시 찾아왔다. 나의 구포가 죽은 뒤에.
달빛과 가로등,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복도의 불빛이 벽에 만들어내는 오묘한 문양들 아래로 밑그림처럼 가려져 있던 풍경들이 떠오를 때도 있다.
몇 해 전 나는 내가 그린 그림 스무 점을 앨라배마에 주둔하는 부대의 예술가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들에게는 물감은 물론이고 그림을 그릴 캔버스를 살 돈조차 없었다. 그림을 나누어주면서 대신 나는 조건을 걸었다. 내가 그린 그림들을 전시하거나 팔지 않기. 그림을 한 점씩 받아든 병사들이 자신의 그림으로 내 그림을 덮어주길. 혹시라도 밑그림처럼 내 그림이 드러나는 게 꺼림칙하다면 내 그림은 다 벗겨 내고 빈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려도 좋다고 했다.
캔버스 위에 내가 무얼 그렸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 구포와 내가 다닌 곳들의 풍경일 것이다. 바다. 내 맨살에 달라붙던 모래알들의 감각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대체 내게 무슨 일들이 있었나. 나는 내가 그렸던 그림을 찾으려는 듯 그림자의 문양 아래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가끔 문양들 위로 밑그림이 떠오른다. 열 살 무렵이다. 소방서에 전화를 건 뒤 나는 지붕 꼭대기로 올라갔다. 저 아래로 우리 집 마당이 내려다보였다. 그때부터 나는 위험을 좋아했다. 올라갈 수는 있었지만 혼자 내려올 수는 없었다. 지붕에서 나를 구출한 건 내 전화를 받고 달려온 소방대원이었다…….
김과 함께 살던 무렵 우리는 종종 미국의 한 천재적인 작가 부부와 비교되곤 했다. 천재성이나 시대의 아이콘과는 전혀 상관없었다. 단지 둘 다 같은 장르의 글을 쓴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우리는 동갑이었다. 같이 소설을 쓴다고 하면 사람들은 서로의 글을 ‘읽어주느냐’고 물어왔다. 아무래도 같은 일을 하다 보면 비평까지는 아니더라도 조언 정도는 하게 되지 않느냐고.
상대방의 책상에 갔다가 모니터에 뜬 글을 우연히 읽게 된 적은 없느냐고도 물었다. 책상에 펼쳐놓은 노트 속에서 재미있는 발상을 본 적은 없느냐고, 몰래 가져다 쓰고 싶은 충동이 인 적은 없었느냐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