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란 소설 <9화>
학교는 1785년에 지어졌다. 최는 캠퍼스를 안내하는 청년 곁에 딱 붙어 걸었다. 가급적 김 선생으로부터 떨어지려는 속셈이다. 영락없는 어린아이다. 김 선생이 눈치챌까 봐 내가 다 조마조마했다. 그 바람에 김 선생과 나란히 걸었다.
“이 선생, 여기 어때요?” 김 선생은 한참 아래의 후배들에게도 늘 존대했다. 만날 때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라고 부탁을 했지만 늘 “다음에, 다음에”라고 미루었다.
“난 말예요. 서른 살 전에 죽고 싶었어요, 물론 문청 시절일 때지. 요절 시인이랄까. 그런데 마흔이 넘고 쉰이 지난 거야. 내 요새 바람이 뭔 줄 알아요? 아흔까지 살고 싶어졌어. 그럼 혹시 알아지는 게 있을까 싶어서. 정말 예전에 몰랐던 게 알아질까? 사십이 다르고 쉰이 달랐거든. 그럼 아흔에는 뭐가 보일까…….”
딱히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다. 김 선생의 시선은 남부 저택의 기둥 꼭대기에 가 있었다. 어제 청년이 말했던 남부의 전형적인 가옥인 듯했다. 지금이라도 문에서 폭 넓은 치마를 입은 스칼릿이 뛰어나올 것 같았다. 가옥의 꼭대기는 생각보다 훨씬 높아 한참 올려다보아야 했다. 어린 젤다는 지붕 꼭대기 위로 올라갔다. 어린애가 올라갈 높이가 아니었다. 물론 그 이후로도 젤다는 자신을 수없이 위험천만인 꼭대기에 올려 세웠다.
소방대가 출동할 때까지 그곳에서 젤다는 무엇을 보았을까. 그전부터 많은 이들이 목화 농사를 접었다. 목화밭이었던 광대한 땅에 무엇이 들어서 있었을까. 앨라배마의 지형은 높낮이 없이 평평해서 젤다는 아주 먼 곳까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높고 낮은 건물들로 잘린, 저 먼 곳의 지평선까지도. 그 먼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미래까지도.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소설 곳곳에 젤다의 일기는 물론이고 편지와 그녀의 말을 그대로 넣었다.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의 말을 빌려오자면, 젤다는 앨라배마를 벗어난 뒤 모든 곳에 가보았고 모든 것을 보았고 모든 것을 해보았다. 자신이 닳고 닳았다고 느낄 때까지.
최가 청년에게 뭔가 얻었는지 호들갑을 떨며 다가왔다.
“선생님, 선생님. 이것 좀 보세요.”
최의 손바닥에 얹힌 것은 견과류의 일종으로 보였다. 다른 것보다 훨씬 크고 검은, 조금 뒤둥그러진 듯한 모양이었다. 최가 주위를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선 이걸 검둥이의 발가락이라고 부른답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린 모양이었다. “평화롭게 보이는 이곳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짐작이 가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건물과 나무와 꽃이 있지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김 선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봐요, 나도 아무렇지 않은 듯 이렇게 서 있지요. 용서할 수 있을까요? 나는 나를?”
열 발짝 정도 떨어진 거리에 청년이 서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천 가방에 든 것이 바로 이 너트인 듯했다. 이곳의 기념품. 예전 백인들이 검둥이 발가락이라고 부르던 것. 혐오스럽게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
“아, 선생님. 왜 이러세요. 참.”
눈물이라도 흘릴 듯 최가 말했다. 잠깐 하늘을 보고 있던 김 선생이 뭔가 생각난 듯 자신의 허벅지를 쳤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허벅지. 통 넓은 바지가 풀썩 가라앉았다가 부풀었다.
“아, 최 선생. 아까 하려던 말.”
최가 우물쭈물 꽁무니를 빼려는데 김 선생이 지금까지 봐온 선생답지 않은 조금 앙칼진 목소리로 최를 붙잡았다.
“이봐 이봐, 최 선생!”
최의 몸이 얼음 땡 동작으로 굳었다.
“내가 지난밤 잠을 다 못 잤어. 뭔가 이상한데 말이지. 생각이 나야 말이지. 날 듯 말 듯 입술은 달싹이는데. 그러다 생각이 난 거야. ……탱자나무.”
뭔 생뚱맞은 소리냐는 듯 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탱자나무요? 무슨?”
“그게 탱자나무가 아니야. 탱자나무 우물가가 아니라 앵두나무야, 앵두나무.”
뭔가 벼락이라도 떨어질 줄 알고 서 있던 최가 그제야 상황 판단이 된 듯 실실 웃기 시작했다. 나도 웃었다. 지난밤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그 단어의 끝을 잡고 얼마나 골똘히 생각했는지 김 선생은 웃지 않았다.
“정말, 최 선생! 얄미운 사람이야.”
무슨 일인가 궁금했는지 청년이 우리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