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6.02 19:14
수정 : 2006.06.09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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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록 지역담당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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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5·31 지방선거가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막을 내렸다. 선거란 사각의 링에서 벌어지는 격투기처럼 승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특정 정당의 싹쓸이라는 예기치 않은 선거 결과 때문에 무성한 분석들이 나오고 있다. 마치 온 국민이 정치평론가라도 된 듯 결과에 대해 저마다 한마디씩 논평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성난 민심이 폭발했다’는 얘기는 식상할 정도이고 ‘정치적 아이엠에프(IMF)를 맞았다’라는 안타까움도 들린다. ‘이러다 나라 망하는 거 아니야’라는 걱정도 적지 않다. 어떤 평가를 내놓든 간에 모처럼 정치에 관심을 갖는 진지한 모습이 좋아 보인다.
결과만 놓고 보면 무수한 말들이 쏟아지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잠시 차분하게 되짚어 봐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몇가지 현상이 풀뿌리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지방선거가 중앙정치의 대결장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시·군·구 의원까지 정당공천제가 처음으로 도입되면서 일찌감치 우려됐던 바지만, 다음 대선을 앞둔 마지막 선거라는 정치일정까지 겹쳐 우려는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지역일꾼을 뽑는 지방선거의 의미는 실종되고 또다시 정당선거를 되풀이했음을 선거 결과는 보여주고 있다. 중앙당 지도부가 다녀가면 표심이 춤을 추는 선거를 과연 ‘풀뿌리’ 선거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공천 과정에서의 금품 주고받기와 지역구 국회의원의 ‘내 사람 심기’도 여전했다. 중진 국회의원 출신이 기초단체장 공천을 받기 위해 수억원이 든 사과상자를 날랐고, 참신한 인물들의 출마는 원천봉쇄됐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가뭄에 콩 나듯 한 무소속 당선자들 대부분이 정당에 입당할 것이라는 씁쓸한 얘기가 벌써부터 들린다. 생활정치와 가장 밀접한 탓에 어찌보면 단체장보다도 더 중요할 수 있는 기초의원의 당락이 어느 정당 소속이냐, 투표용지상의 기호가 ‘가’냐 ‘나’냐에 따라 엇갈렸다니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모두가 정당공천제가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다.
교사가, 의사가, 은행원이, 택시기사가 퇴근 뒤 대학로의 소극장을 연상하게 하는 의사당에서 회의를 열어 자치단체 예산을 심의하는 유럽 나라들의 지방의회 모습을 그리면서 1991년 다시 시작한 지방자치다. 15년이 지난 지금의 지방자치 모습에 만족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무보수 명예직으로 출발한 지방의원직에 유급제까지 도입됐으니 말이다. 유급제 또한 정당공천제의 부산물로 봐야 할 것이다.
정당공천제가 중앙과 지방 정치를 연결해 효율성을 높이고 정당의 뿌리를 지방에 두어 정당 민주화에 기여한다는 점, 정치 지망생을 훈련시켜 좋은 정치인을 키워낼 수 있다는 점 등을 애써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정당의 민주적 운영이 아직 뿌리내리지 못했고 여전히 지역선거 행태를 보이는 현실에서 과연 4대 지방선거에 일률적으로 정당공천제를 적용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인 것 같다. 우리의 정치 수준과 민도가 좀더 성숙해질 때까지 적어도 광역을 제외한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 선거에서는 정당공천제를 배제하는 쪽으로 정치·사회적 합의를 이뤄 나갔으면 한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그런 합의를 강력히 주문하고 있다.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의 정당공천제에 대해 일반국민 59%, 전문가 그룹 77%, 당사자인 단체장 80%가 반대한 반면, 국회의원만이 56%의 찬성을 보여 대조를 보인다. 이번 지방선거가 던지는 시사점들이 점차 달아오르는 월드컵 열기에 묻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배경록 지역담당 편집장
pea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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