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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30 19:02 수정 : 2006.06.30 19:02

강태호 통일팀장

편집국에서

“나는 우리가, 부시 행정부가 반드시 모색하게 될 외교적 통로를 열어놓았다고 생각했다. 정권 이양 기간에 파월 국무장관 지명자는 내게 새로운 팀은 우리가 떠난 곳에서 시작할 거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와 세계는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걸 곧 깨달았다.”

매들린 올브라이트(69)는 회고록 <마담 세크러터리 매들린 올브라이트 1,2>(황금가지 2003년)에서 이렇게 썼다. 세 아이의 어머니로 정치에 입문해 유엔대사를 거친 그에겐 두가지 기록이 따라다닌다. 하나는 클린턴 2기 행정부에서 여성으로서는 미국 역사상 가장 높은 공직인 국무장관을 지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 정권 수립 이후 미 고위관리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한 인사라는 것이다. 이 대목은 2000년에서 2001년 초의 시기에 대한 언급으로, 외교적 통로란 북한과의 미사일 협상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취임 직후인 2001년 3월6일 기자회견에서 ‘클린턴 팀이 떠난 곳’에서 시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일부 유망한 요소들이 (협상) 테이블 위에 남겨져 있으며, 우리는 이들 요소를 검토할 것”이다. 이는 그가 인준 청문회 등에서 밝힌 것이기도 하다. 그는 한 걸음 더 나가 ‘클린턴 행정부가 남겨 놓고 떠난 곳에서 시작함으로써 북한을 포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워싱턴에서 조지 부시 미 대통령과 첫 한미정상회담을 하기 하루 전에 한 말이다.

그러나 다음날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김정일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며 속내를 드러냈다. ‘솔직하고 격의 없었다’는 김 대통령의 말은 그 뒤 외교적으로 ‘이견이 있었다’는 말의 동의어가 됐다. 동시에 파월의 말도 달라졌다. 그는 “대북 미사일 협상을 곧 재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당시 언론들은 이를 미 대북정책의 ‘혼선’, ‘불협화음’ 등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그 뒤의 과정을 보면 한마디로 파월의 ‘왕따’가 시작된 것이었다.

새삼 올브라이트를 얘기하려는 것은 그로부터 5년여가 지난 지금 그의 말들이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 미사일 위기는 발사 임박도, 상황 종료도 아닌채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 <뉴욕 타임스>의 비아냥 처럼 북한은 미사일 발사를 준비 중인데도 부시 행정부는 ‘우리가 아직 준비가 안됐으니 미사일을 쏘지 말라’는 형국이다. 부시 행정부는 지금 외교적 해결을 말하고 있다. 오히려 <워싱턴 포스트> 기고를 통해 예방적 선제공격을 주장한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이나, ‘무력 사용을 테이블에서 내려놓아서는 안된다”는 올브라이트 전 국무 등 클린턴 정부 사람들이 더 강경한 것처럼 비친다. 그러나 한꺼풀 벗겨보고 나면 부시 행정부가 하고자 하는 것은 북한을 외교적으로 압박해 고립시키겠다는 것이다. 반면에 클린턴 사람들의 말은 부시가 북한과의 미사일 협상을 내팽겨치고 추진한 미사일방위(MD)체제로는 북한의 미사일을 막을 수 없다는 뜻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2000년 11월2일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한 연설의 한 대목은 지금 더 생생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우리가 50년이라는 냉전시대의 갈등을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다른 국가들에게 끼치는 북한의 미사일 위험을 줄일 수 있는 이 같은 역사적인 기회를 활용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무책임하게 될 것이다”.

올브라이트가 언급한 역사적 기회란 자신의 평양방문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연설을 하기 일주일전인 2000년 10월 22~24일 말 그대로 역사적인 평양 방문에 나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6시간여의 회담을 했다. 그리고 두사람은 “평화구축이 공통의 관심사임을 확인”했다. 뒤에 밝혀졌던 것이지만,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바로 직전 북한은 미국과 중·장거리 미사일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파기할 것에 동의하였다. 이견이 남아 있었지만 김 위원장은 최종 마무리를 위해 클린턴 미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했다. 부시 대통령당선자 팀은 그의 방북을 막았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평양방문을 초청 받은 건 2000년 7월28일 방콕 아세안지역포럼에서 백남순 북한 외무상과 첫 북-미 외무장관회담을 했을 때였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꼭 6년이 지난 2006년 7월28일 이번엔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아세안지역포럼이 열린다. 백남순 외무상도 참석한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도 참석할 것이다. 지난 6월1일 북한 외무성이 대변인 담화를 통해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의 평양방문을 초청한 건 여전히 유효하다. 이제라도 그 5년반의 잃어버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클린턴이 미쳐 끝내지 못한 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는가.

강태호 통일팀장 kankan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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