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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 법조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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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올 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법조 브로커 사건을 취재할 때의 일이다. 검사한테서 이 노회한 브로커가 수사망을 요리조리 피하는 행태를 전해 들었다. 그는 조사를 받다가 궁지에 몰리면 땅바닥에 벌떡 드러누워 기절한 척하거나 갑자기 “할렐루야!”를 외쳐대는 등의 ‘기행’을 일삼았다고 한다. 조사받는 태도가 어찌나 당당한지 다른 피의자를 호송 나온 교도관조차 그에게 아는 척을 할 정도였다. 검사 앞에서 능글맞게 구는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순간 나도 모르게 흥분하고 말았다. “그런 ×은 기자실로 보내세요. 우리가 하루 만에 자백을 받아줄테니 ….” 최근 금태섭 검사가 〈한겨레〉에 연재를 부탁하며 기고한 글을 처음 봤을 때 문득 이 말을 떠올리고는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랐다. 금 검사는 “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일지라도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는 헌법적 권리를 냉정하게 상기시켰다. 동료 검사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낡은 수사 관행을 버리자”고 촉구했다. 기자를 더욱 부끄럽게 만든 것은 이 대목이다. “여론의 지탄을 받는 범죄라고 해서 어떻게 해서든 진실을 밝히라는 요구도 이제는 접어야 한다.” 검찰 출입기자들은 동료들로부터 ‘친검(親檢) 기자’라는 비아냥을 종종 듣는다. 검찰을 주제로 논쟁을 벌일 때 아무래도 검찰을 두둔하는 쪽에 서기 때문이다. 피의자 인권이 상대적으로 강조되면서 수사 환경이 얼마나 나빠졌는지 설명하다 보면 내가 검사인지 기자인지 스스로 헷갈릴 때가 있다. 출입처에 대한 인지상정인 측면이 있지만, 검찰의 수사권 남용을 견제해야 할 기자의 본분을 망각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친검 기자’의 진면목은 기사를 쓸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검찰이 피의자를 압박하려는 의도로 흘려주는 정보를 아무런 여과 없이 덜컥 받아 쓴다. 법원에서 아직 유죄 판결이 나지 않았는데도 기사에서는 이미 범죄자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온데간데없다. 오죽하면 ‘언론재판’이라는 말이 생겨났을까. 지난해 행담도 개발비리 의혹 사건이 터졌을 때 문정인 교수와 정태인, 정찬용씨는 청와대를 이용해 ‘호가호위’하는 인물로 언론에 등장했다. 이들은 검찰 수사가 진행될수록 ‘공공의 적’으로 확실히 낙인찍혔다. ‘친검 기자’들은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냉정하게 따져 볼 여유도 없었고 그럴 의사도 없었다. 검찰 수사 결과가 발표됐을 때는 이들에게 “아마추어리즘의 극치”라는 비아냥까지 퍼부어 댔다. 하지만 검찰이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기소한 문 교수와 정태인씨는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고, 정찬용씨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언론보도에 의해 실추된 이들의 명예는 과연 회복됐을까. 1심 재판 결과만 언론에 간단히 보도됐을 뿐이다. 〈한겨레〉도 예외가 아니었다. “검찰 수사 단계에서 일방적으로 매도당해 힘들었다.” 정태인씨를 변론했던 한 변호사의 말이다. 정태인씨는 청와대를 떠난 뒤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까지 내몰렸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문 교수와 정찬용씨도 한동안 엄청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분들께 이 지면을 빌려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실체적 진실 발견과 특종 경쟁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금태섭 검사처럼 동료들의 따가운 눈총을 각오하고 ‘언론의 명예훼손 보도에 대처하는 법’ 같은 글을 쓸 용기가 내게 있을까. 동료 기자들에게 “반론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낡은 보도 관행을 없애자”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금태섭 검사의 용기가 부럽다.이춘재 법조팀장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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