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1.18 16:51
수정 : 2007.01.18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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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규/민족국제부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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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군사 용어에는 의학 용어만큼이나 보통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마치 의사들이 전문 용어를 남용하며 환자들의 정보 접근권을 차단하듯이, 군사 분야에서도 일반인들의 이해를 흐리게 하는 용어가 많이 생산된다. 그 폐해는 매우 크다. 자신의 생명이 걸린 중대사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 오해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전시 작전통제권이 좋은 사례다. 작전통제권은 그나마 그럭저럭 알겠는데, 그것을 전시와 평시로 나누어 설명하니 오히려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다. 나누지 않아야 할 것을 억지로 쪼갠 데서 나온 일이다. 작전통제권은 문자 그대로 군대의 작전을 통제하는 권한이다. 군대의 작전은 전쟁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작전통제권이 곧 전시 작전통제권’이라고 보면 무리가 없다. 굳이 권총을 방어용과 공격용으로 구분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럼에도 한국에서만 유독 작전통제권을 평시와 전시로 구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광주 민주화운동’ 때문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 때인 1950년 7월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미군에 ‘상납’했다. 그 뒤 한국 정부는 그것을 ‘회수’할 엄두도 못 냈다. 풍전등화의 조국을 구해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나라에, 빌려준 물건을 달라고 하듯이 채근하는 것은 은혜를 배신으로 갚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80년 광주’는 이런 상황을 일거에 뒤집었다. 미국은 ‘은혜의 나라’에서 ‘학살 방조범’으로 바뀌었다.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는 미국이 계엄군의 광주 이동을 막기만 했어도 광주의 참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인식의 확산과 함께, 반미운동도 기승을 부렸다. 이에 당황한 미국은 김영삼 정부 때인 94년 12월 작전통제권에서 평시만을 떼어내어 돌려줬다. 반미운동의 확산을 막으려는 고육지책이었다. 당시 김영삼 정권은 이를 ‘제2의 창군’이라고 크게 떠벌였지만, 작전통제권의 고갱이인 전시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객군’인 미군의 손에 놓여 있다.
앞으로도 이런 상황을 그대로 놔둘 것인가? 이 물음을 놓고, 한국과 미국, 정부·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 진영 사이에, 논란이 한창이다. 한-미 정부는 환수 원칙에 합의했다고는 하나, ‘2009년이냐 2012년이냐’는 시기를 놓고 아직도 날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합의의 성과를 강조하는 것이 무색할 지경이다. 여기에 한나라당과 전직 군 수뇌를 포함한 보수 진영이 북한 핵실험을 계기로 사실상의 환수 반대 운동을 하고 나서면서, 논란이 꽈배기처럼 꼬였다.
하지만 역사를 잠시 살펴보기만 해도, 작전통제권이 없는 나라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 때 조선군을 지휘했던 명군은 왜군과의 강화론이 나오던 1593년 2월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는데도, 칭찬은커녕 권 장군 체포령을 내렸다. 지시 없이 왜군을 공격했으니 곤장을 때리겠다는 이유였다. 또 한국전쟁 때 휴전 뜻을 굳힌 미국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반공포로를 석방하며 반발하자, 쿠데타 계획을 흘리며 압박했다. 이 전 대통령이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인 광복군은, 중국 군사위원회가 1941년 11월 ‘한국 광복군 9개 행동준승’이라는 문서를 보내 중국 군사위의 지휘를 받으라고 하자, 3년여의 피눈물 나는 투쟁 끝에 44년 9월 중국 정부로부터 ‘9개 준승’의 폐기를 얻어냈다.
우리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작전통제권은 나라의 운명이 ‘내 손에 있느냐, 남 손에 있느냐’를 묻는 문제다.
오태규/민족국제부문 편집장
o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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