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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규 /민족국제부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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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차베스 정권을 지탱하는 힘이 석유라는 분석이 많은데, 석유 값이 급락하면 정권 유지가 힘든 것 아닙니까?” “베네수엘라 경제가 석유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비석유 부문도 상당히 발전하고 있습니다. 또 국영 석유회사가 벌어들인 이윤의 상당 부분을 별도의 사회개발기금으로 적립해 다양한 사회운동에 지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석유 값이 하루아침에 폭락하는 사태는 예견하기 어렵습니다. 차베스 정권은 그와 관계없이 상당 기간 유지될 겁니다.” “베네수엘라로부터 한국 사회가 배울 것은 무엇입니까?” “베네수엘라의 현상은 극심한 양극화의 결과입니다. 한국의 양극화가 남미 수준은 아니지만 초기에 빨리 치유해야 합니다.” 최근 공관장회의 참석차 일시 귀국했던 신숭철 주베네수엘라 대사와 나눈 대화의 일부다. 미국이나 유럽의 주류 언론들은 우고 차베스 대통령을 고유가 시대에 집권해 석유의 힘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운 좋은 포퓰리스트 정도로 평가한다. 서구 언론의 영향을 많이 받는 한국에서도 실정은 비슷하다. 하지만 신 대사의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차베스에게는 석유를 뛰어넘는 ‘내공의 힘’이 있다. 석유만 믿고 날뛰는 대책 없는 반미주의자, 반신자유주의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의 반미와 반신자유주의가 베네수엘라, 더 나아가 남미에서 선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1980년대 남미 경제를 도탄에 빠뜨린 ‘원조 신자유주의’ 정책(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은행들에 진 빛을 회수하는 데만 초점을 맞춘 워싱턴 컨센서스는 남미 국가들에 경제 파탄과 극심한 양극화를 불러왔다. 특히 백인 중심의 소수 석유귀족과 원주민 중심의 다수 빈민으로 갈라져 있는 베네수엘라는 대표적인 피해국이었다. 이런 때 차베스가 나타나, 일부 부자들이 독점하던 부를 모든 계층에 고루 나눠주는 사회개혁에 착수했다. 일부 석유귀족이 쥐고 있던 송유관을 80%가 넘는 빈민과 농민에게 돌린 것이다. 차베스가 이 과정에서 특히 역점을 둔 사업은 무상 교육 및 의료, 값싼 식료품 공급이다. 문맹퇴치 운동과 함께 사회적 탈락자를 재교육하고, 쿠바에 석유를 무상지원하는 대신 수천 명의 의사를 수입해 빈민촌 무상의료 사업을 벌이고 있다. 도시에선 값싼 식료품을 공급하는 슈퍼마켓과 협동조합을 운영하고, 농촌에선 농업 살리기 계획을 펼치고 있다. 또 기득권 언론에 대항해, 일요일 아침마다 〈알로, 프레시덴테〉(안녕, 대통령)라는 토크쇼로 민중과 직접 대화를 하고 있다.이런 정책을 통해 난생처음 사람 대접을 받게 된 민중이 그의 강고한 지지세력으로 변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이런 힘을 바탕으로 98년 집권 이래 지금까지 총 9차례의 선거에서 내리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2002년 4월 군부쿠데타 때는 산 위의 란초(판자촌)에서 쏟아져 나온 빈민들이 그를 살려냈다. 이 나라 사상 처음으로 석유와 민중의 지지를 동시에 얻은 그는 ‘세계의 경찰’ 미국에도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린다. 98년 금융위기 이래 신자유주의가 지배권을 획득한 한국에서도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차베스와 달리 ‘좌파 신자유주의자’를 자임하며 신자유주의 정책을 방조·조장하고 있다. 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차베스의 원기’와 ‘노무현의 무력함’의 원인을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오태규 /민족국제부문 편집장 o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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