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3.25 18:04
수정 : 2007.03.25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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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빈/산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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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밥 한 공기에 들어가는 쌀값은 200원쯤 한다. 스타벅스 커피 한 모금 값이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대부분 밥심으로 살아가면서도 쌀보다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을 훨씬 더 높게 쳐준다. 쌀 생산 농민으로서는 분통이 터질 일이지만 현실이다. 이런 시장에 적응하려면 얼른 쌀 농사 포기하고 커피 농사를 지어 스타벅스에 납품하는 게 낫다. 이론상으로만 그렇다. 우리 농민이 커피 농사를 짓는다는 전제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쌀과 커피처럼 성격이 다른 상품들이 경쟁하는 시장이 아니라 같은 상품을 여러 나라에서 공급하는 시장을 가정하면 말은 되는 결론이 나온다. 생산비가 비싼 쪽이 구조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농산물 같은 특수성이 있는 상품에 대해 어느 나라 정부가 감히 이런 시장을 상상하겠나 싶은데, 있다. 노무현 정부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0일 농수산물유통공사 업무보고에 참여한 농·어업인들에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일장 훈시를 했다. 논지를 뒷받침하는 몇 대목을 간추리면 이렇다. “상품으로 경쟁력이 없으면 농사를 더 못 짓는다. 수지 안 맞으면 농촌에 들어갈 수 없다. 농업도 시장 바깥에 놓일 수 없다. 충격을 주지 않으면 농업 구조조정이 안 된다. 한-미 에프티에이를 통해서 농업 구조조정하자.”
농업도 시장개방과 경쟁원리로 구조조정을 하자는 뜻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그 도구인 셈이다. 이 도구가 유용하려면 개방을 해서 제대로 된 경쟁시장이 열려야 한다. 한데 그럴 가능성이 없다. 미국은 농업 경쟁력에서 세계 최강국이다. 미국은 농가당 평균 농산물 재배면적이 84헥타르(2002년 기준)로, 우리나라 농가의 1.2헥타르에 견줘 70배에 이른다. 단순 계산하면 우리나라 농지가 지금보다 70배 늘어나거나, 아니면 98%의 농민이 농촌을 떠나야 농업 부문에서 미국과 경쟁해 볼 수 있게 된다.
이것만으로만 해결되는 게 아니다. 미국 농민들은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나프타) 발효 뒤 정부로부터 1인당 연평균 1만4천달러(약 1300만원)의 보조금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2004년 한-칠레 에프티에이 발효 뒤 정부가 쌀 재배 농가에 주는 보조금이 연간 50만~70만원이다. 이처럼 두 나라의 산업기반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나는 현실은 외면한 채 “서로 문을 열고 경쟁해 보자”는 주장을 누가 받아들이겠나. 권투시합으로 비유하면, 플라이급 선수에게 헤비급 선수와 맞서 싸우라는 주장이다.
지난 10개월여 동안 에프티에이 협상 과정을 유심히 살펴보면, 어느 쪽이든 일관되고 보편타당한 논리를 펼 수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서로 유리한 결과를 얻어내려고 자기 처지에 맞는 주장을 할 뿐이다. 그런데 우리 정부나 협상단 관계자들은 미국 처지에 맞는 주장이나 논리를 펼 때가 잦다. 노 대통령의 최근 농업 관련 발언들이 단적인 사례다. 스크린쿼터 축소에 항의하는 영화인들에게 김종훈 협상단 수석대표가 “한국 영화도 미국 영화관에 걸릴 수 있을 만큼 잘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주장했다가, “미국 업자 대변인”이란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통상 관료들이 어떻게든 미국과 협정을 맺어 보려는 심정은 이해하겠는데, 제발 국민들에게 구체적인 이익을 어떻게 얻는지는 설명하지 못하면서 “개방만이 살길이다”라는 투의 비이성적인 주장으로 설득하려 들지 마시라. 염장 지르는 협박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박순빈/산업팀장
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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