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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4.01 17:33 수정 : 2007.04.01 17:33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편집국에서

일본 소설들이 쏟아져 들어온다는 게 새삼스런 얘기가 아닌 이즈음이다. 대형서점 매대는 벌써 오래 전부터 일본 소설들로 뒤발되어 있다. 일본 소설이 한국 독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한국 소설은 어딘지 무겁고 답답한데 일본 소설은 산뜻하고 ‘쿨’해서 좋다는 것이 독자들의 일반적인 반응이다. 여기에다가 한국 소설에는 이야기가 부족한데, 일본 소설은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내장하고 있다는 평가가 곁들여진다. 그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한국 소설의 이념 과잉이 독자 이탈의 주범으로 들먹여지기도 한다.

이런 반응은 자연스레 다음 차례로 넘어간다. 한국 소설이 일본 소설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 소설에서 배우자’는 주장은 일반 독자들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언론과 출판계, 나아가 문단에서까지 비어져 나오고 있다. 작가들에게는 은근한 압박이 가해진다: 어깨 힘 좀 빼고, 쉽고 재미있게 쓰란 말이야! 분단이니 민족이니, 공동체니 변혁이니 하는 낡은 가치는 제발 벗어던져 버리고!

그렇지만 이런 주장에 맹점은 없는 것일까. 가령 지금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최상위권에 있는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공중그네〉를 보자. 엽기적인 정신과 의사와 육감적인 간호사를 등장시킨 이 연작소설은 아닌 게 아니라 시종 재미있게 읽힌다. 킥킥 웃음을 깨물며 책을 읽다 보면 무언가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듯한 뿌듯함도 만져진다. 그런데 막상 책을 덮고 나면 문득, ‘이건 소설이라기보다는 만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스꽝스러운 캐릭터와 과장된 상황, 그리고 너무도 경쾌한 문제 해결까지.

독자들이 일본 소설에서 얻는 위안과 즐거움이 〈공중그네〉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본다. 한국 독자들이 선호하는 일본 소설들이란 대체로 감성 연애 소설이 아니면 코믹 멜로물, 또는 추리물이기 십상이다. 이 소설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쉽고 빠르게 읽힌다는 점이다. 그 비결은 무얼까. 단순한 문체, 또는 문체의 부재가 아닐까. 대부분의 일본 소설들은 문체의 몫을 배제한 채 철저히 스토리 위주로 짜여 있다. 이런 소설들은 소설이 아닌 다른 장르로 옮겨져도 그 핵심을 조금도 잃지 않는다.

그렇지만 문체의 포기란 곧 문학(성)의 포기가 아니겠는가. 문학의 문학다움은 무엇보다 문장의 밀도에서 오는 것이다. 주제니 문제의식이니 하는 것도 문장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염불일 따름이다. 문체를 포기한 소설에 대해서는 별도의 이름이 마련되어 있다. ‘대중 소설’이 그것이다. 한국 소설이 벤치마킹해야 할 것이 일본의 대중 소설은 아니잖겠나.

문체의 부재는 ‘문제의 부재’를 수반한다. 일본을 대표하는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에서 근대문학은 끝났다’고 선언할 정도로 일본 소설은 오래 전부터 현실의 핵심적인 문제를 외면해 오고 있다. 주변국을 불안하게 하고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저항하는 일본 소설을 본 적이 있는가. 그렇기는커녕 일본의 대표적인 작가들인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는 군국주의를 대변하는 듯한 소설을 버젓이 내놓고 있는 실정이다.(〈해변의 카프카〉와 〈반도에서 나가라〉) 그들이 표방해 온 비(非)이념으로서의 댄디즘과 개인주의란 이토록 쉽사리 군국주의와 어깨동무할 수 있는, 무서운 ‘이념’이었던 것이다.

한국 소설의 미래가 일본의 대중문학일 수는 없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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