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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길 /민족국제부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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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한국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심심한 감사와 함께 진심 어린 사과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얼마전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이 타결됐다는 보고를 받고서, 취임 이후 6년 세월 동안 한국을 홀대했던 점에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나는 요즘 이라크전 실패와 중간선거 패배로 곤궁한 처지입니다. 무엇보다도 의회에서 기세등등한 민주당에 맞설 명분과 소재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저에게 단비입니다. 의회에서 민주당에 맞서고, 나의 권능을 보여줄 지렛대입니다.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이번 일에 반대하겠지만, 그럴수록 나는 좋습니다. 미국의 주류세력들이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사안을 반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나를 비판하는 〈뉴욕타임스〉도 8일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한반도 주변의 민감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 우려스러운 것”이라며 “이를 추진하고 뭔가를 이뤄야 한다는 타당한 압력들이 있을 것”이라고 민주당 인사 미키 캔터 전 상무장관의 말까지 인용해 보도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도 “의회가 통상정책과 세계화, 미국의 주요 동맹국과의 관계 등에 대한 일련의 중대한 결정에 직면하게 됐다”며 협정 통과를 사설에서 지지했습니다. 6월에 끝나는 나의 통상 관련 협상권한인 무역촉진권(TPA) 연장도 촉구했습니다. 그마저 박탈된다면 나는 대외정책에서 아무런 수단도 남지 않게 될 처지였습니다. 〈뉴욕타임스〉는 미국에 더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했더군요. 이 협정이 진전이 없는 다자간 무역협상인 세계무역기구의 도하라운드 협상을 재고하게 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정하는 규율로 세계화를 지향합니다. 유럽과 개도국들이 다자협상에서 번번이 토를 달아, 우리 미국은 요즘 별 흥미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양자 무역협상이란 우리의 규율과 질서를 퍼뜨리는 세계화의 도구입니다. 유럽연합, 북미자유무역협정 다음 규모인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이런 미국식 세계화의 큰 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반도 평화구조 정착을 위한 ‘2·13 합의’도 나에게는 큰 숨통이었습니다. 이라크전 실패에다 북한에까지 일을 저질렀다면 아마 나는 지금쯤 자리 유지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북한 문제는 무력을 통해서라도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네오콘의 의견에 저항해 준 한국민들의 평화의지 덕분입니다. 사실 나는 좌파에서 전향한 콤플렉스 때문에 우익 근본주의적 가치관을 더욱 고집하는 네오콘과는 근본이 다릅니다. 나는 미국의 정통 주류입니다. 우리 미국 주류들의 국가철학은 국가의 동인은 이념이나 윤리가 아니라 경제·군사적 우위를 취한다는 ‘현실주의’입니다. 효과적이라면 군사제재든 대화든 가리지 않고 이용합니다. 매카시즘의 실질적 배후였던 공화당 선배 리처드 닉슨이 중국과의 수교 등 데탕트를 이룬 것이 잘 말해 줍니다. 나는 이라크전 실패 경험으로 지금 북한 문제에선 대화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북한과의 평화구도 정착도 미국에 좋은 것입니다. 한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은 북한도 미국식 세계화 구도에 편입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나의 임기는 아직 2년이나 남았습니다. 나도 내 친구인 노무현씨처럼 화끈하게 하겠습니다. 한국 국민 여러분 다시 한번 감사와 사과를 올립니다.” 아마 요즘 부시 미국 대통령은 한국에 이런 생각을 품을 것이다. 한국의 정치세력들 사이에 찬반 지지가 극명히 엇갈리는 자유무역협정과 2·13 합의도 미국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사안이다.정의길 /민족국제부문 편집장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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