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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부문기자 김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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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지난 12일, 감독님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을 보고 왔습니다. 솔직히 전 감독님의 ‘팬’은 아닙니다. <서편제>나 <취화선>을 볼 때도 좀체 영화의 흐름에 몸을 맡기기가 어려웠습니다. 전 판소리보다 스윙재즈가 더 친숙한 요즘 관객들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꼭 극장에 가고 싶더군요. 아마 투자 문제로 영화 제작이 중단됐던 사정에 안타까움이 남아 있었나 봅니다. 개인적으로 이야기 한번 들어볼 기회 없던 감독님이지만 영화를 보니 이렇게라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습니다. 우선 <천년학>이 너무 아름다워서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힘겹게 나온 작품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로 스크린쿼터가 영원히 ‘73일’로 묶여버린 지금 상영되는 것이 아이러니해서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슬퍼서였습니다. 그날, 변두리 극장의 첫날 첫회였던 탓도 있겠지만 영화가 시작할 때까지 관객은 저 혼자였습니다. 나중에 중년여성 넷이 들어왔지만요. 젊은 송화를 첩으로 두었던 친일파 출신 백사노인이 눈을 감는 장면부터 가슴이 먹먹히 차올랐습니다. “꿈이로다, 꿈이로다…”라는 송화의 노래를 들으며 흩날리는 매화꽃을 보고 있자니 영화가 ‘위안의 예술’임이 새삼 느껴지더이다. 영화는 2시간의 오락이고 도피처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깊숙한 상처를 어루만져 줍니다. 외국 작품 중에도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내가 살아온 산천, 내가 보아온 얼굴, 내가 들어온 언어로 우리네 삶을 말할 때 영화는 특별한 정서를 전해주나 봅니다. 굽이굽이 송화와 동호가 걷는 인생을 따르다 보니 상영시간은 금방 지나갔습니다. 감정적인 장면들을 배제한 연출이라지만, 송화와 동호가 잡은 손, 스치는 옷깃이 서로 얼싸안는 남녀보다 훨씬 가슴 떨렸습니다. 스크린쿼터가 무력화되면 홍보보다 관객들 입소문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천년학> 같은 작품들의 자리는 더욱 좁아질 겁니다. 쉽게들 말하죠. 영화 잘 만들면 된다고. 그러면 관객들이 저절로 모인다고. 일단 작품을 ‘볼 수 있어야’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있는데 말이죠. 개봉 직후 상영 기간이 판가름나기에 적잖은 작품들이 순제작비의 70~80%에 이르는 비용을 마케팅비에 쏟아붓는 형편입니다. 할리우드엔 비교할 수 없는 액수지만요. 그조차도 없는 영화들은 어찌 될까요. 스크린쿼터를 영화인들의 ‘밥그릇 지키기’로 보는 시각은 뿌리깊습니다. 언론 또한 이 이슈를 ‘지겨워하고’ 자유무역협정 타결 뒤엔 무관심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저 또한 영화 담당을 할 때 ‘스크린쿼터가 있어 억지 저질 영화가 계속 만들어진다’거나, ‘숫제 우리 영화계도 멕시코처럼 망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는 ‘막가파식’ 사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1994년 북미자유협정 체결 뒤 연간 제작이 10편 이하로 떨어졌던 멕시코는 10년이 지나 겨우 20편대가 됐더군요. 하지만 개봉되는 작품은 절반에 불과합니다. 2년 전 한국산업연구원이 스크린쿼터를 20% 축소하면 1277억원의 매출액 피해와 2439명의 인력 감소가 있을 거라 예상했죠. 지금은 스크린쿼터가 아예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사실 숫자야 틀릴 수도 있습니다. 피해액 규모론 영화가 협상에서 ‘바꾸기 대상’에 올려지는 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그보다 더 천문학적인 액수와 사람들의 삶이 무너지는 분야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천년학>을 보며 이런 영화가 상영 안 될 때 그 손해액을 ‘돈’으로만 따질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미래의 한국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경제 선진국’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건가요. 착잡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감독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천년학>을 포기 않고 만들어 줘서. 이 세상에 돈으로만 잴 수 없는 문화의 가치라는 것을 보여주어서.경제부문기자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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