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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경제부문 산업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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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출입처라는 이유로 본의 아니게 서울 장교동 한화그룹 본사에 2주 가까이 ‘출근 중’이다. 김승연 회장 ‘보복폭행’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이후다. 출근한다고 하지만 얼굴을 익힌 사람은 고작 홍보실 임직원들과 로비를 지키는 건장한 아저씨들뿐이다. 같은 층 건너편에 법무팀이 있지만, 보안문은 절대 열리지 않는다. 답답함에 직원들 사이에 ‘파리공원’으로 불리는 작은 휴식터로 나서 본다. 김 회장도 예전엔 가끔 나타나 직원들에게 “담배 한대 주라” 하며 담배를 나눠 피웠던 곳이다. 마주치는 직원들의 표정은 보통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면 곤혹스러움과 억울함이 배어난다. “개인 죽이기가 심하다” “왜 그룹과 개인을 연관시키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새로운 개혁을 다짐하는 그룹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을 그들이니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정작 한화의 위기 대응법이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점은 잊고 있는 듯하다. 상층부는 수시로 회의를 열지만, 대응은 ‘회장 감싸기’가 고작이다. ‘회장의 인간적 면모’라는 자료를 돌리고, 수사 초기 직원들한테 탄원서 서명을 받은 건 두고두고 입길에 올랐다. 남대문경찰서에, 공항에, 가회동 김 회장 자택에, 홍보실 직원들은 포토라인을 치고 지켜볼 뿐이었다. 한 직원은 “위에서 방향을 내려야 홍보전략을 짤텐데 아무것도 없다”고 답답함을 털어놓는다. 대신 그룹의 공식 견해를 지배하는 건 ‘법적 논리’뿐이다. ‘상대방이 애초 가해자다’ ‘피의사실 확정 전에 이름을 밝히는 건 위법이다’ ‘왜 옛날 일을 들추냐?’ 이런 가운데 한화는 더 큰 것을 잃고 있다. 위기에 몰렸던 삼성, 현대차가 초기에 법리대응만 내세우다가 전략을 선회한 이유를 되짚어보자. 기업은 사회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임을, 여론은 기업을 좌지우지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화의 태도는 불신을 키우기만 했다. 열흘 가까이 부정하다가 비서실장이 출두해 청계산 폭행을 인정했다. 내부에서도 김 회장이 출두 때 이 점을 밝히고 사죄했어야 했다는 말이 나오지만 이미 때늦었다. 25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미국 존슨앤존슨의 위기대응 사례는 지금 한국에서도 여전히 유효할 듯하다. 1982년 9월 어느날 시카고의 27살 주부를 비롯해 7명이 청산가리가 든 타이레놀 캡슐을 복용하고 숨졌다. 타이레놀은 존슨앤존슨의 자회사인 제약회사 맥닐의 제품이다. 모든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했음은 물론이다. 조사 결과 회사 쪽 과실은 없었지만, 주목할 점은 사건 초기부터 존슨앤존슨이 보인 태도다. 존슨앤존슨은 사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모회사에서 직접 처리하겠다고 나서 언론의 문의 폭주에 투명하고 정확하게 실시간으로 사건 경과를 알렸다. 소비자들을 위해 무료 문의전화를 긴급 설치해 거의 전 직원이 콜센터에 매달리는 한편, 상세한 자체조사를 벌였다. 수백억원의 비용을 들여 전국에 배포된 타이레놀을 전면 리콜조처했고, 소비자 안전을 위해 캡슐을 폐기하고 알약으로만 제품을 내놓았다. 이런 ‘투명’한 조처는 언론과 여론의 신뢰를 얻었고, 판매량이 20%까지 급감했던 타이레놀은 1년이 안 돼 시장의 선두권으로 뛰어올랐다. 처음부터 ‘자회사의 일이다’ ‘제조 과정의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의 범죄다’라는 사실만 강변했다면 이런 기적 같은 재기가 찾아왔을까? ‘파리공원’의 작은 무대엔 매주 금요일 정오 한화 주최로 시민들을 위한 음악공연이 열려왔다. 사건 이후 공연은 취소되고 지금은 펼침막만 날릴 뿐이다. 이 무대가 다시 열려 떳떳하게 시민들을 맞이하는 한화를 하루빨리 보고싶다. 김영희 /경제부문 산업팀 기자 dora@hani.co.kr▶ ‘보복폭행’ 사건 피해자 3명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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