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10.28 18:07
수정 : 2007.10.28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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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겸/정치부문 대선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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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미국에서 1년 연수를 마치고 8월 초 돌아와 맡은 일이 ‘대선기획팀장’입니다. “뭘 해야 하죠”라고 물으니 ‘정책 중심의 선거보도’를 하라고 했습니다. 주위에 부담감을 털어놨더니 한 선배가 대뜸 “정책? 뭐 별 거 있어, 그걸 누가 읽어?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내놓으면 되지!”라고 ‘격려’를 해줬습니다.
“연예인들이 이혼할 때 ‘성격차이’라거나 ‘서로 놓아주기로 했다’느니 얘기하지만, 사실 바람피운 경우가 태반이라지. 다들 후보를 평가하는 데 정책 역량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만, 사실 맹위를 떨친 것은 지역감정이었잖아. 전두환 노태우도 정책이 좋아 대통령이 됐나.” 나름 중책을 맡은 데 따른 압박감을 이런 ‘자기위안’으로 털어버리려 했습니다. 정책검증을 열심히 하고 후보별로 점수를 매겼다는 어느 신문을 들춰봤습니다. 이명박 후보는 자기 당에서 3등, 정동영 후보도 3등, 권영길 후보는 2등이었습니다만 그래도 대통령 후보가 됐습니다. 정책은 역시 별 게 아니구나 하는 확신이 더욱 커졌습니다. 남은 일은 그럴듯하게 정책기사의 ‘폼’을 잡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00인 유권자위원회는 이런 불온한 생각 속에서 탄생됐습니다.
그리고 10월20일 처음으로 100인 유권자위원회가 참여하는 정책평가 워크숍이 열렸습니다. 행사장에 들어서는데, 심상찮은 열기가 확 뿜겨 나왔습니다. 전화가 왔습니다. 제주도에서 아침 첫 비행기를 타고 막 서울에 도착해 가는 중이라고. 전날 밤 12시 경남 사천을 출발해 서울 고속버스터미널 근처 사우나에서 잠깐 눈을 붙인 뒤 참석했다는 학원 영어강사도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밥그릇은 아랑곳하지 않고 끈질기게 사교육 대책을 따져 물었습니다. “개인적인 생존을 위해 학원 강사를 하지만,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는 사교육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돼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어이쿠 너무 가볍게 잘못 생각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책 토론의 후끈한 열기는 26일 열린 문국현 후보 초청 토론회에서도 이어졌습니다. 토론자에 이어 방청석에 마이크를 넘기니, 질문이 폭포수처럼 쏟아졌습니다. 어느 유권자위원은 소수점 아래 두자리 수치까지 대가며, 유류세 인하를 공약한 문 후보를 추궁했습니다. 저녁 8시에 시작한 토론회는 밤 11시가 다 돼서야 겨우 끝났습니다. 그 열기에 취했는지, 문 후보는 자정까지 더 하자고 했습니다.
토론자로 나섰던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과 맥주 잔을 앞두고 뒤풀이를 했습니다. 그는 “진보진영 경제학자들 모임에 가면 항상 막내인데 그게 벌써 10년째”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끝으로 경제학계 진보논객의 맥이 이어지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진보나 민주진영이 ‘담론경쟁’에서 밀리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한겨레>에도 정책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기자가 없다고 은근슬쩍 꼬집었습니다. 정치지형이 지금처럼 뒤틀린 데는 쟁점이 되는 정책들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지 못한 기자들의 무능과 게으름 탓도 크다는 꾸짖음으로 들렸습니다.
워크숍 기사는 23일치부터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사를 두고 편집회의에서 다들 한마디씩 했습니다. “재미가 없다” “단조롭다” “기사형식을 바꿔 봐라.” 복도에서 마주친 한 후배도 한마디 하더군요. “품을 판 것에 비하면 기사가 별로네요.” 평소같으면 “그럼 네가 해 봐!”라고 핏대를 올렸을 텐데 목소리가 잦아들었습니다. 유권자위원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열의를 이렇게 파묻어 버려도 되나 하는 중압감이 몰려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정책기사를 쉽고 재미있게 쓸 수 있지? 연구가 모자란가, 머리가 모자란가.” ‘정책, 뭐 별거있어’라고 시건방을 떨던 일이 머쓱하기만 합니다.
김의겸/정치부문 대선기획팀장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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