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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구 / 한겨레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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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삼성이 검찰 주요 간부들에게 ‘떡값’을 정기적으로 제공해 왔다는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 기사가 나간 지난달 31일 밤, 삼성의 고위 임원 두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분들은 매우 격앙돼 있었습니다. “김 변호사의 주장은 완전히 거짓말이다. 어떻게 한 사람의 일방적 주장을 그렇게 무책임하게 기사화할 수 있느냐?” 그분들의 항의에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어떤 주장이 나왔다고 무턱대고 기사를 쓰지는 않습니다. 주장의 배경과 앞뒤 정황 등을 다각적으로 꼼꼼하게 따져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를 보고 기사를 내보냅니다. 서로 다른 주장 중에서 어느 쪽의 말이 더 신뢰할 만한가를 판단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삼성에서 하는 말은 이미 신뢰성을 크게 잃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삼성이 스스로 신뢰를 무너뜨린 예를 들었습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관련 기자회견을 하기 전, 김 변호사의 ‘거사’ 움직임을 포착한 삼성 쪽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사가 경영권 방어를 위해 임직원 명의로 약간의 차명주식을 갖고 있는 것은 다반사다. 그런데 김 변호사가 치사하게 그런 것을 폭로하겠다는 것인가?” 하지만 이후 삼성은 말을 바꿨습니다. “그룹 재무팀 임원이 제3자의 돈을 굴린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일관성이 없으면 신뢰를 살 수 없습니다. 요즘 문제가 되는 이명박 후보의 비비케이 주가조작 연루 의혹도 마찬가지입니다. 며칠 전 한나라당 의원 대여섯 분이 저희 신문사를 찾아와 비비케이와 관련한 <한겨레>의 기사가 일방적이고 편파적이라고 항의했습니다. 저는 그분들께 저희가 최대한 검증을 거친 뒤 기사를 내보내고 있으며, 자료와 증거에 입각해 기사를 쓰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도 이 후보 쪽이 스스로 말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예로 든 대목 중 하나가 이 후보의 ‘마사지걸 고르기’ 발언이었습니다. 그 발언은 이 후보가 한나라당 후보로 확정된 뒤 편집국장들과 한 저녁식사 모임에서 나왔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 그 발언의 현장 증인인 셈이죠. 그 내용은 이미 인터넷언론 등을 통해 알려졌으니 새삼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여성인 나경원 대변인도 있는데 저런 말을 함부로 해도 되나’ 하고 제가 걱정을 할 정도로 민망스런 발언이었음은 분명합니다. 독자분들 중에는 ‘왜 <한겨레>가 당시에 그 발언을 기사화하지 않았느냐’고 꾸짖는 분도 있을 겁니다. 결과적으로는 그런 지적을 아프게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후보의 발언은 술자리에서 나온 실언인 셈인데, 그 정도는 봐주고 넘어갈 아량이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쨌든 제가 정말 놀라고 실망한 것은 이 후보 진영의 사후 대응이었습니다. “발마사지 얘기일 뿐”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취지” “45년 전 선배의 이야기를 전한 것” “변명할 필요도 해명할 필요도 없는 사안” …. 끊임없이 말이 바뀌더군요. 현장 증인으로서 그런 치졸한 변명을 듣는 심정은 착잡할 뿐입니다. 저는 정치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언어의 정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말에 대한 예의이기도 합니다. ‘마사지걸 발언’ 파문이든 비비케이 사건이든 그 논란의 핵심은 결국 말의 정직성에 모아집니다. <한겨레>는 앞으로도 밝은 눈, 곧은 마음으로 후보들의 말이 얼마나 신뢰할 만한지 검증하는 노력을 계속할 것입니다.김종구/편집국장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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