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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겸 정치부문 정치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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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5공 시절 전·현직 교사 9명이 빨갱이로 몰려 고초를 당한 ‘오송회 사건’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던 지난달 25일 밤. ‘오송회 제자’ 네 명이 서울 마포 뒷골목의 허름한 술집에 모여 술잔을 기울였다. 얘기는 2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2년 이들 넷은 월북시인 오장환의 시집을 엉겁결에 버스에 놓고 내렸다. 선생님한테 빌린 책이었다. 신고 정신이 투철한 버스안내양은 경찰서로 달려갔고, 시집은 ‘간첩단 일망타진’에 결정적 단서로 쓰였다. 불과 몇 년 뒤 오장환 시집은 금서 목록에서 풀려나 버젓이 대형서점 문학코너를 장식한다. 교사들이 잡혀가고 머잖아 이들 네 명도 경찰서로 끌려갔다. 주먹다짐과 발길질을 받으며, 선생님들의 ‘이적행위’를 일러바쳐야 했다. 진술서를 쓰다가 부은 눈을 들어 김득구의 권투경기를 보았다. 김득구도 챔피언 맨시니에게 흠씬 두들겨 맞아 눈 언저리가 퉁퉁 부었다. 김득구는 세상을 떠났고, 이들의 청춘도 그렇게 끝났다. 이때 19살이었다. 3~4년 뒤, 네 사람 중 셋은 차례차례 징역을 간다. 징역 말고는 딱히 갈 곳이 없었다. 남편을 감옥에 보낸 선생님 부인의 푸석한 얼굴과, 빨갱이 자식이 돼버린 아이들의 머룻빛 눈망울을 바라보면서는 딴 맘을 먹기 힘들었다. 이들은 “교도소에서 선생님들을 만나 빨래라도 해드려야겠다”고 말하며 떠나갔다. 이들만이 아니었다. 1985년은 유난히 점거농성 사건이 많았다. 미국 문화원, 민정당 연수원, 미 상공회의소 등등. 그때마다 다른 오송회 제자들도 구속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네 명 중 나머지 한 명에게는 오히려 징역이 사치스러운 도피처였다. 생활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넋두리했다. “여차저차 대학을 졸업했더니, 주위에 남은 친구가 하나도 없더라고. 다들 징역 가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되뇌었지. 하지만 나는 진작부터 그걸 감수하기로 했어. 언젠가 사죄할 만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자위하면서….” 그래도 그는 선생님들 옆에 있었다. 자격지심에 심장이 오그라들고, 가슴 아래 싯누런 농이 흘러도 묵묵히 제 몫을 떠안았다. 정작 더한 가슴앓이는 또다른 제자 ㄱ에게 지워졌다. ㄱ은 1심 재판 때 검찰 쪽 증인으로 끌려나왔다. 검사의 호통에 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선생님들을 ‘고발’했다. 눈알이 부리부리한 그였지만, 선생님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슬금슬금 친구들도 피했다. 가끔씩 잊혀질 만하면 밤늦게 술에 젖어 물기 어린 목소리로 전화를 하곤 했다. “잘 지내냐, 그냥 걸어 봤다.” 그가 26년 만에 다시 재심 법정의 증인으로 섰다. “워낙 겁에 질려서 검사가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들은 그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오송회 교사들은 애초 1심에서 대부분 풀려났다. 그러자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빨갱이들을 풀어주는 게 법관이야?”라며 불호령을 내렸고(박철언 회고록), 모두 2심에서 다시 구속돼 중형에 처해진다. 그 직후 1심 판사는 좌천돼 다시는 형사재판을 맡지 못한 채 옷을 벗었다. 2심 판사는 영전돼 승승장구하다 헌법재판소 재판관까지 올랐다. 10여년 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수갑을 찬 채 구속됐고, 문제의 제자 넷 중 하나는 한겨레 법조출입 기자로 이 장면을 취재한다. 이날 넷은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다음에 만날 때는 선생님들 모시고 망년회 함께 하자.” “그날은 ㄱ 그 자식도 불러내야 돼.” 지금 이들 나이 45살이다. 대한민국은 그렇게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다.김의겸 정치부문 정치팀장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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