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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규 수석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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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개발지상주의, 승자독식주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 무한 탐욕, 불로소득, 계층 갈등, 국가 폭력, 사적 폭력, 유전무죄 무전유죄, 편가르고 색칠하기, 인명 경시, 양심 마비 …. 용산 철거민 참사사건 속에는 요즘 한국 사회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악덕과 악행이 녹아 있는 듯하다. 어느 것 하나 유쾌한 항목을 찾을 수 없지만, 이 중에서 우리를 가장 참담하게 만드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위정자들의 ‘양심 마비’일 것이다. 경위야 어쨌든 이번 사건으로 철거민 다섯, 경찰 한 사람이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 그것도 전대미문의 경제위기 속에서, 엄동설한에 갈곳 없는 철거민들이 희생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 때문에 시민들이 느끼는 슬픔과 충격도 매우 크다. 하지만 이 사건을 대하는 위정자들의 태도는,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일반시민의 감성지수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사과나 사죄는 아예 꿈도 꾸지 않는다. 진정한 애도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철거민들에 대한 준열한 책임 추궁과, 경찰력 행사에 대한 일방적인 변호·변명만이 있을 뿐이다. 과잉·강경 진압으로 참사의 큰 요인을 제공한 경찰은 ‘법과 질서’를 방패 삼아 진압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총수 구하기’ 여론조작까지 서슴지 않는다. 수사 개시 단계부터 경찰 봐주기 인상을 짙게 풍겼던 검찰은 철거민들에 대한 책임 추궁엔 피도 눈물도 없다. 심지어 불에 타 숨진 아버지의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채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 중인 아들을 끌어내어 옥에 가두는 지경이다. 측은지심은 추호도 없는 것 같다. ‘철거민=악’이라는 확신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철거민에 대한 구속영장 실질심사에 참석했던 한 검사는 “내가 현장에 직접 가서 망루를 봤는데 도심 속 게릴라 아지트를 보는 것만 같았다”, “(철거민들의 행동은) 사회공동체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는 표현을 했다고 한다. 구속영장이 집행되던 한 철거민은 “억울한 일이 없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우리는 테러집단이 아닙니다”라는 외마디 절규를 했다. 수사 과정에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박장규 용산구청장의 ‘떼잡이’ 발언도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 있다. 그는 참사가 일어난 뒤 한 주민 모임에서 “오늘 그(용산 철거 참사) 세입자들 이야기를 뒤늦게 해주겠다. (이 사람들이) 세입자들이 아니에요. 전국을 쫓아다니면서 개발하는 데마다 돈 내놓으라고. 그래서 떼잡이들이에요”라고 말했다. 이들의 언행을 보면, 마치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의 하마스나 팔레스타인 사람에게 하듯이 철거민을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악명 높은 옛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백분리 정책(아파르헤이트)이 우리 안에 부활한 것 아닌가 하는 착각도 하게 된다. 설사 철거민들이 법과 질서를 어긴 부분이 있다고 해도, 위정자들의 이런 태도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사람이 먼저 있고 법과 질서가 뒤에 있는 것이지, 그 반대일 수는 없다.이명박 대통령은 30일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의 거취에 대해 “지금 내정 철회를 할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검찰의 수사결과를 보고 난 뒤, 즉 형사책임 여부를 따져 본 뒤 거취를 결정하겠다는 얘기다. 사람보다 법을 앞세운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법이 아니다. 큰 정치이고 도덕이고 양심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위정자의 모습을 보고 싶다. 오태규 수석부국장o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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